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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43)화 (4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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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같은 남편을 섬기다

둘은 마차를 타고 말없이 공주부로 돌아왔다.

한경백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울적한 듯했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워낙 관심이 없는지라 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널찍한 대청을 지나 홍릉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때, 한경백이 뒤에서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전하.”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한경백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 바쁘십니까?”

“아니. 할 얘기가 있느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옆의 다리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한경백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리를 지나자 홍릉원 동쪽의 주원이 나타났다. 시녀 한 명이 깨끗한 물을 떠 와서 야홍릉의 손을 씻겨 주자 다른 시녀가 손수건을 건네 손을 닦아 주었다.

손을 씻은 야홍릉은 창가의 앞에 있는 비단 탑에 기대앉았다.

정란은 찻주전자를 접시에 담아 내왔다. 그리고 찻잔에 부어, 한 잔은 야홍릉 앞에, 다른 한 잔은 한경백의 앞에 놓은 뒤,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공손하게 물러갔다.

홍릉원의 시녀들은 모두 눈치가 빨랐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야홍릉은 곁에 사람을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측군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물러갔다.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앉지.”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한경백은 의자를 끌어와 야홍릉과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곧게 앉았다.

“제가 한씨 가문의 서자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니 더 할 말은 없습니다.”

한경백은 시선을 내리깔고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한씨 저택에 다녀오자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 뒀던 한이 떠올랐습니다. 오래도록 마음 깊이 숨겼던 말이지만 지금은 문득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어졌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약간 놀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차를 마신 뒤, 담담하게 말했다.

“하고 싶으면 하거라.”

“사람들이 저와 한옥금이 닮았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매인 제 어머니와 한 부인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 부인은 제 이모가 되는 거지요.”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 한옥금과 연인 사이일 때 그녀는 종종 한씨 저택에 갔었다. 그녀는 한경백의 생모를 본 적이 없었으나 심씨 가문의 자매가 같은 남편을 모셨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 어머니와 한 부인은 친자매일 뿐만 아니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입니다.”

한경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한 부인은 용모가 비슷하여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야홍릉은 그 말에 조금 놀랐다.

한경백의 어머니와 한옥금의 생모가 자매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이 쌍둥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두 분은 같은 심씨 가문 출신에 어머니도 같았지만 성격은 많이 달랐습니다. 한 부인은 성격이 드세고 제 어머니는 온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한경백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겉은 부드러우시나 속마음은 강한 분이셨습니다. 자매가 같은 남편을 섬기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실 수 없으셨던 거지요.”

세상일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나곤 했다.

한 부인의 이름은 심교(沈嬌), 한경백 생모의 이름은 심완(沈婉)이었다.

둘은 성격도 이름과 비슷했다. 한 명은 도도하고 드셌으며 다른 한 명은 부드럽고 온화했다.

심씨 가문의 자매는 그때 시절 제경에서 소문난 미인이었다. 심씨 가문이 지금처럼 유명한 대갓집은 아니었으나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난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해에 한씨 가문의 적자가 과거시험에 급제를 했고, 두 여인의 운명은 그렇게 묶이고 말았다.

심씨 가문의 가주 심명덕(沈明德)은 유능한 청년인 한서화(寒瑞華)가 마음에 들었다. 스무 살 남짓한 그는 인물도 훤칠하고 재주도 뛰어난데다 유명한 명문가 자제이기도 했다. 한서화의 아버지는 예전에 권세가 대단한 권신이었고 지금 태후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

외모, 학식, 집안이 모두 뛰어난 한서화는 수많은 여인이 꿈에 그리던 서방감이었다.

게다가 한씨 가문의 누이는 궁에 들어가 비로 책봉되어 한씨 가문은 더욱 큰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그때의 한씨 가문의 적자는 제경 모든 귀족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자 수많은 여인들 흠모하는 상대였지요.”

한경백은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차 위에 뜬 거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만약 한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만 있다면 심씨 가문의 앞날이 아주 휘황찬란할 것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하늘이 소원을 들어준 것인지, 아니면 심씨 가문의 선조가 덕을 많이 쌓은 덕인지, 한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 있는 행운은 심씨 가문에 떨어졌다.

단, 조건이 있었다.

한씨 가문에서는 쌍둥이 자매가 함께 시집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심명덕은 당황했으나 2각 정도 망설이다가 결국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한서화의 조건이 얼마나 우월한지도 알고 있었고 또 글을 읽는 선비들은 여러 아내의 섬김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서화처럼 우월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평생 아내 한 명만 들일 리 없었다. 다른 가문의 여인이 들어와 그들의 딸과 겨루는 것보다 아예 쌍둥이 자매가 합심하여 남편의 마음을 다잡기를 바랐다.

이렇게 생각한 심명덕은 기쁜 마음으로 혼사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해, 제경은 이 일로 떠들썩했다. 심씨 가문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경멸하며 뒤에서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심명덕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딸이 함께 시집가면 뭐 어때? 한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수만 있다면 다른 가문들도 모두 우리를 존중하게 될 거야.’

그러나 무작정 기쁜 그와는 달리 심완이 결사적으로 반대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함께 시집가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친언니와 한 남편을 공유하는 것은 더욱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한씨 가문의 요구가 파렴치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미 다 정한 일이다. 혼인 날짜도 정해졌으니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소용없다.”

심명덕의 단호한 말에 심완은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단식을 시작했다. 나날이 말라가는 딸을 보자 심명덕 부부는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도 아파 어르고 달래며 호통도 쳐보았다.

그러나 심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심교가 방법이 있다고 속삭이며 심명덕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한씨 가문으로 시집갈 때, 그녀는 자신이 정실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실은 한 명뿐이었다. 자매라도 둘이 함께 시집을 간다면 신분이 나뉠 수밖에 없었다.

심교가 정실이 된다면 심완은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명덕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심완이 흔쾌히 시집갈 방법을 제시할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 허락할 수 있었다.

심교가 정실이 되나, 심완이 정실이 되나 그에게는 다른 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흘 뒤.

심명덕은 집에서 잔치를 열고 예비 사위 한서화를 초대했다. 술잔이 오가는 술자리에서 심명덕은 두 딸을 불러 한서화에게 보였다. 부드러운 등불에 자매의 용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듣던 대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한서화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술을 많이 마셨다.

심명덕은 예비 사위가 볼수록 마음에 들어 술을 잔뜩 권했다.

술을 많이 마신 한서화는 곧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심명덕은 사람을 시켜 그를 뒷마당의 방에 데려가게 했다.

밤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깬 한서화는 자신이 여인의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옆에는 심씨 가문의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이 누워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식은땀이 흘렀다.

한서화는 선비였다. 마음속으로 대다수 남자들처럼 많은 여인을 품에 안기 바랐으나 그래도 선비인지라 자신의 명성과 여인의 정조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심씨 가문의 쌍둥이 자매의 용모를 확인하려고 초대에 응한 것뿐이었다.

물론 직접 보고 난 그는 더없이 만족했다.

그러나 심씨 가문의 여식이 시집도 오기 전에 이렇게 그의 품에 뛰어드는 행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 아닌가?

한서화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또 기쁜 마음도 들었다. 고민에 잠겨 있던 한서화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때, 소녀가 검은 보석 같은 눈을 번쩍 떴다. 한서화는 흠칫 놀라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시선에 놀란 표정이 드리웠다.

“누구…….”

“쉿.”

한서화는 소녀의 입술을 막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는 심교요, 아니면 심완이오?”

“전……”

“심완일 것 같군.”

한서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심씨 가문 미인, 오늘 일은 오해지만 난 분명 책임을 질 거요.”

심완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한 공자? 당신이…….”

‘어떻게 내 방에 들어온 거지?’

“긴장할 것 없소.”

한서화는 느긋하게 일어나 자신의 옷매무시를 살펴보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그러니 낭자는 걱정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된 심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한서화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째 낭자,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것이오? 이걸 원했던 게 아니오?”

‘내가 원했던 거라고? 설마 내가 원해서 안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심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원하던 게 아니에요.”

‘뭐라고?’

한서화는 당황했다.

“한 공자, 이건 제가 원했던 게 아니에요. 누군가 절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심완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애써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공자께서 심씨 가문의 쌍둥이 자매를 맞이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을 물으신 적이 있으셨나요?”

그 말을 들은 한서화는 곧바로 침착해졌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싫다는 말이오?”

심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싫어요.”

한서화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싫어도 낭자가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오.”

심완은 깜짝 놀랐다.

한씨 가문의 적자에 장원 급제까지 한 한서화는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 그를 떠받들기에 바빴다.

여태 그를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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