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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42)화 (4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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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무릎 꿇어

한령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마에 부풀어 오른 실핏줄은 그의 기분이 겉보기처럼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야홍릉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다.

두 달 전까지 야홍릉과 가까운 사이던 그들은 지금 야홍릉과 아예 남이 되고 말았다.

야홍릉 때문에 그들은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한옥금은 한 달 넘게 감옥에서 고생한 데다 곤장을 오십 대나 맞았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 야홍릉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벼슬길에서 오랫동안 있은 한 어사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는 야홍릉을 증오했지만 오직 그녀만이 심씨 가문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씨 가문이 몰락하자 문무백관은 그들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3황자는 변방에 있어 그들을 도울 수 없었고 다른 황자들은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그들의 등에 칼을 꽂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울 뿐인데 어찌 도와주기를 바라겠는가?

심씨 가문의 일은 4황자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한 어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홍릉이 도와주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야홍릉이 한옥금과의 정을 봐서라도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정은 없겠지만 한옥금과 닮은 한경백의 얼굴을 봐서라도 공주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녀의 말 한마디면 황제는 틀림없이 심씨 가문 사람들을 봐줄 것이다.

“경백아, 네 어미가 살아 있을 때 항상 명분에 신경을 썼단다.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아비가 네 어미를 평처(平妻, 정실이 한 명 이상일 때 부르는 호칭)로 임명해주마.”

한 어사는 평온한 말투로 말했으나 적선을 하듯 도도한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네 어미가 평처가 되면 너도 한씨 가문의 적자가 된단다. 앞으로 너도 적자가 받을 수 있는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거지. 네 어미가 저승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매우 기뻐할 게야. 안 그러냐?”

한경백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한 어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놀람, 경악, 의아함, 그리고 알 수 없는 표정도 스쳐 지났다.

그러나 한 어사와 한 부인이 예상했던 기쁨은 없었다.

“평처? 적자요?”

한경백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버님, 농담도 참.”

한경백은 일어서며 느긋하게 옷을 정리했다.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평처요? 정녕 제 어머니가 신분을 신경 쓰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적자요?”

그는 또 차갑게 웃었다.

“제가 그런 신분을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 어사는 얼굴이 시커메졌다.

그는 음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경, 백…….”

“아버지께서 오늘 그 말씀만 안 하셨다면 전 두 분을 대단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한경백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어머니를 언급하지는 마셨어야지요. 어머니만 생각하면, 전 한씨 가문이 십팔 층 지옥에 영영 떨어졌으면 좋겠거든요.”

그의 마지막 말에는 소름끼치는 한기가 담겨 있어 들은 사람들 모두 흠칫 굳어버렸다.

주변은 정적에 쌓였고 공기도 순식간에 굳어버린 듯했다.

한 어사와 한 부인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서슬 푸른 눈빛으로 한경백을 쏘아보았다.

한령도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경백은 담담하게 웃고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갈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송학청 밖에 호원들이 잔뜩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족히 스무 명은 되는 듯했다. 깔끔한 회색 경장을 입은 그들은 건장하고 사나워 보였다.

한경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한경백.”

한령이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호국 공주가 왜 궁에 들어갔는지 아느냐?”

한경백은 고개를 돌리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궁금하긴 하네요.”

한령은 당황했다.

순간 그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한옥금인 줄 알았다.

비단 옥포에 감싸인 훤칠한 몸에 온화한 얼굴을 가진 한경백의 몸에서는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겉으로 보면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명문가 귀공자 같았다.

호국 공주부에 두 달 동안 있은 사이에 한씨 가문의 서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말을 할 때도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어젯밤에 호국 공주가 장양후부의 호원을 죽였거든.”

정신을 차린 한령이 또박또박 말했다.

“장양후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겠지? 야홍릉은 장양후부의 호원을 전멸시키다시피 했을 뿐만 아니라 장양후까지 건드렸다. 넌 태후와 황상가 야홍릉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을 들은 한경백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러니 형님의 뜻은…….”

“아버지께서 태후께 사정하여 호국 공주의 죄를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령은 협상을 시도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심씨 가문의 일은…….”

“어찌 황후의 오라비가 사정해야 할 죄목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어찌 내가 모르고 있느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한령과 한경백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한 어사 부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란 눈으로 한기와 함께 들어온 호국 공주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전쟁터에서 뒹구는 사내 못지않게 기세가 강한 사람이었다. 태후와 황제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그녀이니 지나가는 곳마다 얼어붙고 눈보라가 휘몰아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씨 저택의 시녀들과 하인들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한경백을 둘러쌌던 호원들도 무릎을 꿇고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야홍릉은 혼자 다니는 데 익숙해져서 사람을 잘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녀는 무공도 고강했기에 한령조차 그녀가 언제 들어왔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던 한령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한 어사 부부도 정신을 차리고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행동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덤덤하게 그들을 훑어보더니 감정을 알 수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경백.”

한경백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전하.”

“축하 인사는 다 드렸는가?”

“……네.”

한경백이 대답했다. 그리고 관심 어린 어투로 물었다.

“전하께서 궁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 난처하게 굴지는 않으셨습니까?”

이 말을 들은 한령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야홍릉은 장양후부의 일로 궁에 들어간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온 거지?’

“그런 일은 없었다.”

야홍릉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일이 없으면 나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자꾸나.”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지요.”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버지와 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괜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일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 정한 운명이니 누가 그 운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 예전에 ‘착한 사람은 명이 짧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지금 저는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는 그 업보가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 마님, 알아서 잘 처신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한 어사와 한 부인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시하고 야홍릉의 앞으로 걸어갔다.

“전하, 가시지요.”

야홍릉은 말없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 부인은 화가 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야홍릉과 한경백이 멀어진 것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 위의 찻잔들을 모두 바닥에 내팽개쳤다.

“쟤가 말한 게 무슨 뜻이에요? 한경백 저 녀석이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 한씨 가문이 업보를 치르는 것이란 말이에요? 꿈 깨라고 해요! 꿈 깨라고 해!”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갈수록 갈라져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마치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만해!”

한 어사가 시퍼런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당신 모습이 어떤지 아시오? 아주 미친 여편네 같소!”

말을 마친 그는 홱 돌아서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미친 여편네?’

한 부인은 탁자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시퍼런 그녀의 얼굴에는 원망, 증오,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한 부인은 우아한 대갓집 가주 부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심씨 가문이 그녀의 친정인 것을 어떡하겠는가?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와 형님, 조카들…….

족히 몇십 명이나 되는 식솔들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다.

“령아.”

그녀는 무기력하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격렬하던 감정이 사그라들자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난 이젠 어떡하면 좋으니? 심씨 가문이 망하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는 거지? 어떻게 살라는 거야…….”

한령은 말없이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 눈을 감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까 한경백에게 말하던 자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세?’

한 부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서는 아직도 원망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걔는 서자고 난 적모인데 내 자세가 뭐가 틀렸다는 거냐?”

“하지만 그는 지금 호국 공주의 측군이고 저희가 사정하는 입장이었지 않습니까?”

한령이 차가운 얼굴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께서 심씨 가문을 걱정하신다면 왜 사정하는 자세를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한경백이 저택에 들어온 뒤부터 어머니는 줄곧 적모의 신분으로 그를 비꼬고 호통치셨…….”

“그럼 내가 그 녀석에게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다는 것이냐?”

한 부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

“걔는 그저 비천한 서자야! 그런데 내가 왜 걔한테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한령은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부인은 숨을 들이쉬고 무기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자세가 틀렸다는 걸 알아. 난 한경백을 그렇게 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걔가 하는 말을 너도 들었을 것 아니냐? 한씨 가문이 십팔 층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냐? 한경백은 짐승이라고!”

그녀는 한경백을 진작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한령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참 뒤에야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더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먼저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고 다른 방법이 없나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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