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네 말대로 하겠다
야홍릉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말투는 뼈를 에일 것처럼 차가웠다.
“죽든 감옥에 들어가든, 부황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잠깐 멈추었다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목국의 장군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면 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무엄하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태후는 화가 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퍼레진 채, 일그러졌다.
“황상, 좀 들어보세요. 저 아이가 아주 말을 아주 잘하네요! 이 어미가 손녀딸에게 사죄라도 해야 하나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홍릉아, 태후께 용서를 빌어라.”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홍릉은 차가운 얼굴로 꿈쩍하지도 않았다.
“홍릉아.”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황께서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부르신 건, 제 죄를 물으시려는 건가요?”
“물론 아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의 안색이 묘하게 바뀌었다.
“난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태후가 부른 것이지,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지금 아셨으니 이제 제 죄를 물으실 건가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태후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알았…….”
“모후.”
황제가 평온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홍릉이의 행위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말에 대전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태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황상,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후와 비빈들은 모두 경악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야홍릉을 싸고돌아도 되나? 야홍릉은 태후를 크게 무시하는 행동을 한 거잖아!’
황자들도 황제의 말에 당황했다.
“홍릉이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버릇을 고치지 못한 건 사실이나 그 일이 저 아이를 탓할 이유는 못 됩니다.”
황제가 말했다.
“만약 전쟁터에서 장군을 죽이려고 시도한다면 군법으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태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장양후가 좀 다치기는 했으나 며칠 쉬면 나을 일입니다. 그가 왜 나 장군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홍릉아, 혹 이유를 알고 있느냐?”
황제가 물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신은 줄곧 군영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척진 적도 없고 숭준과 갈등이 있던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후궁의 여인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야홍릉의 기를 죽일 생각도 없었다.
‘모후와 황후가 홍릉이에게 불만이 많은 건…… 3황자와 한씨 가문의 일 때문이겠지?’
황제는 태후와 황후가 야홍릉을 미워하고 있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도 한씨 가문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야홍릉과 한옥금의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빌미가 생긴 그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씨 가문의 세력을 약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황제가 야홍릉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 일도…….
야홍릉은 장양후부의 쓸 만한 사람들을 거의 모두 죽여버렸다. 일단 노발대발하는 태후를 달래기 위해서 그는 야홍릉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어찌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야홍릉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야홍릉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야홍릉은 천성적으로 차가운 성미를 가졌으며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는 한옥금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야홍릉이 황위를 노린다고 야자릉이 말하긴 했다. 처음에는 그도 괜스레 의심이 들어 야홍릉이 병권을 반납하는 것도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야홍릉처럼 차가운 성격의 사람이 굳이 큰 야심을 품을 것 같지 않았다.
‘야심이 있는 아이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며 사람들에게 밉보인다고? 오히려 둘째와 넷째가 더 수상하지 않나. 평소에는 조용히 있더니 도화연에 홍릉이가 갔다는 말을 듣고 다들 뛰어갔잖아? 홍릉이를 끌어들여 황위를 쟁탈하는 데 힘을 실으려고 하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는가?’
‘그러나 이미 병부를 받아버리는 바람에 후회되어도 다시 홍릉이에게 돌려줄 수도 없겠군. 돌려준다면 너무 티가 나지 않겠어? 오늘 일도 숭준의 잘못이지. 모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다른 사람을 건드린 것은 그렇다 쳐도 홍릉이마저 건드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게 아닌가? 그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는데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어?’
‘며칠 전에 궁에서 홍릉이에게 덤비다 다쳤다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지. 장양후로 봉해졌다고 해도 황족 공주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모후의 총애를 좀 받는다고 자신을 아주 대단히 여기고 까불었군.’
황제는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지만 모두 찰나의 일이었다.
황제는 입을 열었으나 다른 내용 없이 나신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나 장군은 어떻더냐?”
“만도에 허리를 베였는데 상처가 깊습니다.”
야홍릉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젯밤 제가 저택에 있는 의원더러 살펴보라고 해서 약도 바르고 붕대로 감싸기도 했습니다. 아마 침대에 보름쯤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달 안에는 군영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더군요.”
그 말을 들은 황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죽이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군? 그래서 홍릉이가 저리 화난 거였어.’
“손평.”
손평이 허리를 굽혔다.
“네, 황상.”
“태의더러 나 장군을 살펴보러 가라고 이르거라. 태의원에서 좋은 약재들을 많이 가지고 가라 이르거라.”
“네, 알겠습니다.”
태후는 굳은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탁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예쁜 호갑(護甲, 고대 귀족 여인이 사용하는 가짜 손톱)이 부러질 것 같았다.
“황상.”
비빈들도 안색이 변했다.
특히 아까 야홍릉을 꾸짖었던 비빈들은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오직 사현비만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황상는 야홍릉의 죄를 물을 리 없다니까. 야자릉이 망발을 퍼부어 야홍릉이 병부를 바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야홍릉 마음속의 울화가 다 사라졌을 것 같나?’
그녀는 황제가 야홍릉의 병권을 거두어들인 것을 후회할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은 모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라고 자신의 아들이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든든한 배경을 가진 황자들도 황위를 노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배경도 없는 공주 야홍릉이 어떻게 황위를 노릴 수 있겠는가?
야자릉의 말은 바보나 믿을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황제는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황제가 태후의 노리개를 위해 전쟁에 능한 딸을 서운하게 할 리 없었다.
“황상! 이번 일은…….”
태후가 시퍼런 얼굴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어미는 황상의 해결 방법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황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장양후가 최근 몇 년간 방자하게 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갑군의 장군마저 건드리다니요. 배후에서 누가 꾸민 짓인지 낱낱이 알아보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태후는 멍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황후와 다른 비빈들도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부황, 다른 용건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야홍릉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한 어사의 생신이라 제 측군은 한씨 저택에 갔습니다. 저도 가보고 싶네요.”
그 말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짐은 왜 들은 적이 없지?”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떠들썩하게 보낼 기분은 아니었나 봅니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최근에 한씨 가문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그가 자신의 생일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일 리 있겠는가?
생일이라고 굳이 알린 것도 한경백을 집으로 불러들이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얼른 나가 보거라.”
황제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홍릉아, 미리 해둘 말이 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측부와 시군을 찾아 주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느냐?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황후와 비빈들은 깜짝 놀랐다.
‘황상께서 왜 저러시는 거지? 황자들도 다 있는데 황자들에게 왕비를 찾아 주겠다는 말은 하시지 않고 도리어 공주에게 시군을 붙여주겠다고? 이렇게 되면 7공주를 아내로 들이려는 남자가 있기는 하겠어?’
“전 꽃구경 연회가 너무 번거롭다고 생각합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부황께서 적당한 사람을 찾으시면 제 저택에 바로 보내주세요. 제가 마음에 드는 이들로 남겨 놓겠습니다. 어떠신가요?”
태후와 황후를 비롯한 비빈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고 해도 야홍릉이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주에게 시군을 골라 준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황제는 생각해 보더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하자꾸나.”
야홍릉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야홍릉은 궁에 들어와서 떠날 때까지 싸늘한 얼굴로 말 몇 마디 한 것을 제외하고 황후와 비빈들에게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태후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안하무인’ 네 글자를 몸소 시전 해주었다.
태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봐야 할 상주서가 많으니 여기서 함께 점심 식사를 못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황자들을 보면서 밖으로 걸어갔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어서방으로 가자.”
손평이 바로 높게 외쳤다.
“폐하께서 어서방으로 향하신다!”
자안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비빈들은 일어서서 황제가 갈 때까지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황제의 모습이 궁 문 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비빈들은 눈을 내리깐 채, 각자의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은 태후의 곁에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았다.
공개 심문회처럼 가득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황후밖에 남지 않았다.
태후는 화가 난 나머지 손에 든 찻잔을 바닥에 던졌다.
찻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궁녀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죽였다.
“태후마마, 노여움을 푸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