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벌을 내려 주세요
장양후부의 일은 야홍릉이 예상했던 대로 궁을 발칵 뒤집었다.
황제부터 문무백관과 신하들까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양후. 그는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했지만 누구도 감히 숭준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는 제경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황자들도 그와 척지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숭준이 장양후가 된 뒤, 사람들은 속으로 그를 아무리 무시하고 경멸해도 대놓고 그를 겨냥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호국 공주가 선례를 내보인 것이었다.
장양후부의 호원과 시위가 호국 공주의 손에서 전멸되다시피 했고 장양후부도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호국 공주의 패기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녀의 매서운 수단에 겁을 먹은 사람들도 있었다.
숭준은 다들 알다시피 태후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총애하는 숭준이 야홍릉에게 된통 당했으니, 태후가 어찌 가만히 있으려고 하겠는가?
날이 밝자 성지가 호국 공주부에 도착했다.
야홍릉더러 바로 궁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야홍릉은 평온한 얼굴로 성지를 가져온 내관의 말에 대답하고 일어나서 세수한 뒤 얇고 깔끔한 검은색 경포를 입었다. 허리선을 강조한 경포 덕에 그녀의 몸매는 더욱 가늘어 보였다.
그녀는 한경백과 아침 식사를 하고 마차에 앉아 한씨 저택의 대문 밖에 도착했다. 한씨 가문의 집사가 공손하게 한경백을 저택 안으로 모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다시 궁으로 갔다.
“전하.”
영영이 살며시 마차 안으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상께서 조조(早朝)에서 내려오신 뒤, 금군 통령 한묵을 데리고 자안궁으로 가셨습니다. 황자들도 모두 불려갔습니다.”
야홍릉은 비단 탑에 기댄 채, 담담하게 알겠다고 했다.
영영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능묵.”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와.”
또 하나의 검은색 그림자가 차창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삼자경’을 외워 봐.”
능묵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의 평온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울려 퍼졌다.
“인지초, 성본선(人之初, 性本善,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하다). 성상근, 습상원(性相近, 習相遠, 사람들은 본성은 비슷하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달라진다)…….”
야홍릉은 탑에 기대앉으며 눈을 감았다.
마차는 곧 궁 문 가까이 도착했다. 소년은 평온한 목소리로 ‘삼자경’을 외웠다.
“시춘추, 종전국(始春秋, 終戰國, 앞은 춘추시대요, 뒤는 전국시대이니). 오패강, 칠웅출(五霸強, 七雄出, 춘추시대에는 5패가 힘을 뽐내고 전국시대에는 7웅이 나타났다). 영진씨, 시겸병(贏秦氏, 始兼併, 진나라가 가장 강해서 다른 제후국을 합병해 진조를 세웠다). 전이세, 초한쟁(傳二世, 楚漢爭, 진조 2세에 가서는 나라가 또 어지러워져서 초나라와 한나라가 싸우는 국면이 되었다)…….”
야홍릉은 눈을 떴다.
“그만하면 되었다.”
능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홍릉은 마차에서 내린 뒤, 문을 지나 궁으로 들어갔다.
대충관 손평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야홍릉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손평의 안내를 받으며 자안궁으로 향했다.
널찍하고 우아한 정원에 들어서자 벽 모서리의 화원에 옥란화가 예쁘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야홍릉은 꽃을 힐끗 훑어보고 다시 시선을 계단에 돌렸다.
대전에 들어서자 화난 얼굴의 태후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후와 겁은 먹었지만 흥미진진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비빈들까지 보였다.
황자들은 말없이 옆에 서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는 제법 공개 심문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야홍릉은 평온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간 뒤, 무릎을 살짝 굽혔다.
“부황.”
그녀는 도도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태후는 시퍼레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곱게 한 화장도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가리지 못했다.
“홍릉아,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물었다.
“부황께서 무슨 일에 대해서 여쭈시는 것인지요?”
경제가 입을 열었다.
“장양후 말이다.”
야홍릉의 표정이 바로 차가워졌다.
“장양후는 어젯밤에 나신을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나신은 혼자의 힘으로 그들을 대적하지 못하자 저에게 뛰어와 도움을 청했지요. 그 과정에서 제 저택의 호원들이 나서서 몇 사람을 죽였습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리고?’
야홍릉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 나신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홧김에 장양후부로 뛰어가 사람을 좀 죽였습니다. 그리고 장양후를 지하 감옥에 넣었습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야홍릉은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야홍릉!”
태후는 화가 나 얼굴이 퍼레졌다. 그녀는 탁자를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숭준은 내정의 제일 고수다. 그런데 네가 어찌 그를 그렇게 괴롭힌 것이냐? 네 눈에는 이 할미가 보이긴 하느냐? 그리고 부황과 율법이 두렵지도 않느냐?”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나 장군은 무장으로 전쟁터에 나간 적도 많고 공을 수태 세워 독립적인 장군부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장양후가 그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낸 건 전쟁터에서 나라를 배반하고 역모를 꾀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넌 지금 전쟁터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무장은 필요 없는 존재라는 말씀이신가요?”
야홍릉이 무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태후마마의 뜻은 무장을 죽인 죄는 묻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태후는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부황께 말씀드려 그더러 결정하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장양후가 정말 나 장군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다면 큰일이니 황상께 보고를 올려 황상께서 직접 결정을 하시게 해야 했어.”
황후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홍릉아, 넌 호국 공주이긴 하나 사적으로 권리를 남용하면 안 되었다.”
초 숙비(肖淑妃)가 시선을 내리깔고 손톱에 그려진 예쁜 꽃송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국 율법이 장난도 아니고 어찌 사람을 마구 죽일 수 있나요?”
이 말에 옆에 서 있던 2황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야홍릉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야홍릉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후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호국 공주가 전쟁터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지금 전쟁터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매비(梅妃)가 시선을 들고 말했다.
“7공주, 그렇게 제멋대로 굴면 안 돼요. 장양후가 강한 실력으로 태후마마를 몇 번이나 구했는데 태후마마를 봐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었어요.”
“그러게요, 그리고 나 장군도 죽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좀 다친 걸 가지고 이렇게 사람들을 마구 죽이다니.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7공주, 병권을 내놓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나신의 일에 그토록 진심인데요?”
비빈들은 어렵사리 기회를 잡았다 싶어서 너도나도 한 마디씩 야홍릉을 꾸짖으며 태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황제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가끔 시선을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지만 야홍릉의 무표정한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
야홍릉은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 무덤덤한 얼굴로 사람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네 명의 비 중 하나인 사현비(謝賢妃)는 눈을 내리깐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태후에게 잘 보일 생각도, 야홍릉의 역성을 들 생각도 없는 듯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다른 비들을 비웃고 있었다.
‘멍청이들. 태후와 황후의 편을 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들은 모두 이익의 대립각에 서 있는 사이였다. 아들이 있는 후궁의 여인이라면 다들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다. 태후와 황후는 3황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하는데 다른 비들이 그 둘에게 잘 보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다고 3황자를 지지하는 태후와 황후가 생각을 바꿀 리도 없었다.
‘꿈 깨라지. 야홍릉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야홍릉과 척지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야. 다들 태후가 야홍릉을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3황자 쪽에서 아직 전갈도 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사현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전 변방에서 3년간 전쟁을 치르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자질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로 부황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야홍릉은 도도한 얼굴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후궁 비빈들이 모여서 아웅다웅 떠드는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였다.
“장양후가 목국의 무장을 죽이려고 한 것 자체가 큰 죄이니 부황께서 법으로 처벌하시려거든 지금 바로 형부 사람을 장양후부에 보내시면 되겠군요. 그리고 그에게 왜 나 장군을 해치려고 했는지 물으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대전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황자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서는 무장을 죽이는 짓은 적군 첩자의 소행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제경에 돌아와 보니 무장을 죽이는 게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무장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면 이용 가치가 없으니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태후마마?”
태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 야홍릉, 너 간도 크구나. 감히 이 할미에게 따지는 것이야!”
야홍릉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파란색 옷을 입은 미인을 바라보았다.
“양비(良妃)께서는 제가 병권을 내놓았는데 왜 나신의 일에 그토록 진심이냐고 물으셨지요. 그럼 제가 죽어가는 장군을 보고도 모른 척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양비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나신은 제 휘하의 장군입니다. 제가 병권을 바쳤어도 그가 저와 함께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제가 죽어가는 나신을 모른 척해야 한다는 건가요?”
야홍릉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만하거라!”
태후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홍릉, 언제까지 이렇게 예의 없게 굴 것이냐? 잘못을 저지른 건 너다. 그런데 감히 할미와 후궁들에게 따지고 드는 것이냐?”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부황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