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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8)화 (3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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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난 떠날 것이다

야홍릉은 몸을 돌려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나신의 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나신은 손으로 허리의 상처 부위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제가 내일 병부에 휴가를 신청하겠습니다. 오늘 밤에 갑작스럽게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고…….”

“아니, 그럴 것 없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에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다들 알게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들 알게 떠들자고?’

나신은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쉬거라.”

야홍릉은 한 마디만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전하. 병부의 일은…….”

나신이 그녀를 불렀다.

“병부가 없으면 현갑군이 현갑군이 아니게 되느냐?”

야홍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녀의 말투는 평온하기만 했다.

“병부가 남의 손에 들어간들 또 어떠냐? 나는 여전히 나이고, 현갑군도 여전히 현갑군인데.”

말을 마친 그녀는 편전 문을 나섰다.

그 말을 들은 나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현갑군은 전하께서 직접 키우신 병사들이고 다들 공주 전하만 모시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병권을 가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제경에서 우리 현갑군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전하께서 현갑군은 2년 안에 전쟁터에 나갈 일이 없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원래 대로 훈련을 하면 돼. 2년 동안 사고만 없으면 되는 거지.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나신은 전에 8공주가 피웠던 난동이 떠올라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현갑군은 야홍릉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은 현갑군을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편전 밖에 서서 말없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영영.”

영영은 나타나며 무릎을 꿇었다.

“전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장양후부의 호원들이 모두 죽거나 다쳤을 테니 네가 몇 명 데려가 그들의 시체를 공주부 밖에 옮기거라.”

영영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하?”

“그대로 하거라.”

야홍릉은 싸늘한 얼굴로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이 건장한 이들로 데려가거라. 나 장군의 저택, 장양후부와 내 저택의 대문 밖에 모두 적절하게 꾸며 두거라.”

영영은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십니까?”

야홍릉은 먼 곳에서 흔들리는 등불을 보며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나신이 군영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다 장군부 밖에서 암살당할 뻔했는데 실력이 좋아 적 네다섯 명을 죽인 거지. 그런데 적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어서 중상을 입고 호국 공주부로 도움을 청하러 온 거야.”

야홍릉의 말을 알아들은 영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날 듯이 자리를 떠났다.

나신이 도움이 청한 뒤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야홍릉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신은 야홍릉이 가장 믿는 네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야홍릉이 병권을 반납했다 해도 그동안 쌓은 정이 있으니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호국 공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홍릉도 나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객들이 그녀의 집 문 앞까지 왔는데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게 이상했다.

야홍릉은 나신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장양후부에 따지러 간 것으로 하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장양후부 밖에 시체가 널브러진 것도 말이 되었다.

“주인님.”

능묵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속임수는 효과가 있기는 하겠으나, 허점이 너무 많습니다.”

공주부 밖에서 사람을 죽인 것과 장양후부 밖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남은 흔적도 다를 것이다. 나신이 잡혀갈 때의 시간도 늦은 게 아닌데 그가 장군부 밖에서 암살당할 뻔했다면 목격자 한 명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심지어 장군부에서는 기척을 들은 사람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허점들은 조금만 자세히 알아봐도 바로 들통날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야홍릉의 어여쁜 얼굴에 서리가 끼었다.

“허점이 있어도 괜찮다.”

야홍릉은 단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녀의 사람을 건드린 사람은 그게 누구라도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그뿐이었다.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야홍릉은 몸을 돌려 홍릉원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능묵을 바라보았다.

“능묵.”

능묵이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주인님.”

“오늘 밤의 일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녀는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아느냐?”

능묵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주인님의 생각을 짐작하겠습니까?”

“나신은 내 휘하의 사람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난 이미 병권을 반납했으니 이런 시기에는 나신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게 좋단다. 안 그러면 불필요한 억측이 많아질 수 있으니까.”

능묵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듣고 있었다.

“나도 원래는 오늘 밤에 장양후부에서 있었던 일을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능묵은 그녀의 말속에서 해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신이 다쳤고 그것을 숨길 수는 없지. 장양후부에 생긴 일도 숨길 수 없고.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일을 놓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능묵은 여전히 말없이 듣고 있었다.

“어차피 남들이 알게 된다면, 먼저 내가 나서서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게 낫지.”

야홍릉의 말투는 싸늘하기만 했다.

“책략은 소용 있을 때나 정성 들여 꾸미는 것이지. 그러나 그 어떤 책략도 소용이 없을 때는 고민할 필요 없이 강력한 실력으로 다 깔아뭉개면 된단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느냐?”

능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뭘 알았느냐?”

야홍릉이 다시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처음에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태후와 장양후가 오늘 당한 일로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기를 바라셨겠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현갑군의 병사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장양후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임을 알리려는 생각이시겠지요.”

능묵이 대답했다.

숭준은 중상을 입은 데다 독약까지 먹었으니, 해독약을 위해서라도 외부에 말을 아낄 것이다. 야홍릉이 이번 일을 숨기고 싶다면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야홍릉은 태후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신이 다친 것은 숨기기 어려웠다. 그가 아프다고 해도 자신의 장군부에 있어야지, 호국 공주부에 나타난 건 말이 안 되었다. 만약 그의 저택에 있었다면 의원은 한눈에 그가 아픈 게 아니라 다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제가 그를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태의라도 보낸다면 곧 들통날 일이 아닌가?

괜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명만 뒤집어쓸 수 있었다.

그래서 야홍릉은 제경 전체 사람들에게 나신의 복수를 하기 전에 장양후부에서 먼저 살인 행각을 벌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태후가 가장 총애하는 장양후마저 직접 찾아가 혼쭐을 내줬는데 다른 사람이 어찌 감히 현갑군을 건드릴 생각을 하겠는가?

현갑군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든, 현갑군의 장군을 괴롭혀 야홍릉을 협박할 생각이었던 사람이든,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홍릉의 이번 행위는 혹시 모를 후환까지 완벽하게 없앤 것이었다.

그러나 능묵은 야홍릉이 왜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나의 어영위다. 그러나 영위뿐만이 아니지. 필요하다면 내 마음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도…….”

야홍릉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많이 써야겠지.”

어영위는 지옥처럼 잔혹한 훈련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주인을 지키고 주인의 적을 살해하는 것뿐이었다.

야홍릉은 능묵을 그저 어영위로 쓸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이 문무에 모두 능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력은 갖추어야 했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그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급할 것은 없었다. 천천히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어영위의 생각은 신은전에서 반복되는 혹독한 훈련에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뼛속에 새긴 충성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백지상태라 봐야 했다.

그는 무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에 능했지만 상황 판단과 주인의 생각을 읽는 데는 취약했다. 신은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진 영위는 너무 위험했다.

최고 경지에 이른 무인이 생각을 가지면 감정이 생길 것이고 감정이 생기면 주인에게 잠재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야홍릉도 그 이치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능묵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미간을 찌푸린 야홍릉은 마음속의 위화감을 애써 무시한 채, 편전으로 들어갔다.

“전하.”

나신은 침대 머리에 기댄 채, 자려고 하다가 발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그냥 제집으로 가겠습니다.”

“밖의 일은 신경 쓸 것 없다. 자네는 그저 여기서 편히 지내면 된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지시를 내렸다.

“영일, 나신을 서원으로 데려가라.”

편전은 잠을 자는 곳이 아니기에 서원에서 묵는 것이 더 나았다.

밖에 숨어 있던 영일은 편전으로 들어오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침대로 다가가 나신을 안아 들었다.

그 또한 무인이기에 사람의 몸 어디가 가장 약한지 알고 있었다. 또 어떻게 급소를 피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일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해도 상처를 안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서원의 객실에 누운 나신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야홍릉은 곧바로 따라오며 담담하게 말했다.

“조만간 난 제경을 떠날 생각이다.”

‘떠난다고?’

나신은 놀라서 얼굴이 굳었다.

“전하,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건 자네 알 바가 아니지.”

야홍릉이 말했다.

“그동안 여기서 묵도록 해라. 상처가 좀 나아지면 다시 장군부로 돌아가고. 내가 떠난 뒤에도 믿을 만한 심복을 남겨 두어 자네를 보살필 테니 자네는 봉우와 함께 현갑군만 잘 관리하면 된다.”

나신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전하께서 왜 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오늘 밤에 일어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나신은 궁금했지만 야홍릉이 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묻지 않았다.

“전하, 부디 어디를 가시든 꼭 안전에 조심하십시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두운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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