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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6)화 (3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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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게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개미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경멸이 담겨 있었다.

숭준은 이런 시선이 가장 싫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공주 전하, 지금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는 이런 시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내정 제일 고수가 되어 궁에 들어왔다.

그런데도 이 여인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그녀의 시선에서 싸늘함과 무정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항상 무시하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숭준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인은 너무 도도하군. 모든 것을 가소롭게 보는 눈빛이야. 황족 출신이라 남보다 고귀하다고 해서 이렇게 모든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거야?’

그는 야홍릉에게 항상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높은 곳에 이르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태후의 환심을 사려고 몸을 불살랐다.

천성적으로 잘생긴 외모를 가진 데다 무공 실력이 강한 그는 태후의 총애를 얻는 게 어렵지 않았다. 태후의 안전을 지켜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나중에 높은 위치에 이르게 되면 야홍릉도 자신을 존중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숭준은 야홍릉의 성격 자체가 남자보다 차갑고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씨 가문의 2공자와 함께 있을 때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한씨 가문의 2공자를 위해 여인의 몸으로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기까지 했다.

야홍릉은 3년간 수많은 공을 세워 영예를 받아 안았음에도 그녀의 성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터에 오랫동안 있던 탓에 성격이 더 차가워졌다. 그는 한씨 가문의 유약한 공자와 성미가 차가운 공주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둘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연인 사이가 깨졌을 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었다.

그동안 야홍릉은 한옥금을 좋아하기에 숭준은 그녀에 대한 분노와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오랫동안 지속되면 버릇이 되는 법이다.

그는 겉으로는 태후에게 순종하며 모든 것을 바쳐 3황자와 한씨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야홍릉과 한옥금이 사이가 나빠지기를 바랐다.

때로는 그가 직접 나서서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왔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았다.

지금의 그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장양후였다. 태후의 총애를 듬뿍 받고 내정 대권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외모도 한씨 가문의 2공자 못지않았다.

하지만 호국 공주는 여전히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숭준은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나신을 떠올렸고, 야홍릉을 보는 그의 눈빛도 뜨거워졌다.

본래 나신의 입에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잡아 온 것이었지만 야홍릉까지 불러오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호국 공주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오늘 밤에야 숭준은 그녀에게도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갑군의 장군은 그녀가 신경 쓰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숭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마음속에서 억누르기 힘든 충동이 자꾸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걸어가,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서 제 저택을 무너뜨리는 일은 어렵겠지만, 나신을 죽이는 것은 저한테 더없이 쉬운 일입니다.”

야홍릉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숭준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의 분노를 눌렀다. 그는 손을 뻗어 야홍릉의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새하얀 손가락이 야홍릉의 머리카락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강한 힘에 잡히고 말았다.

“네 상처, 아직 낫지 않았을 텐데.”

야홍릉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의 힘은 그의 손목을 부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네가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숭준은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느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절 죽이시지는 못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여전히 싸늘했다.

“감히 절 죽. 이. 시. 지. 는 못할 것입니다.”

숭준은 야홍릉이 듣지 못했을까 걱정되어 단호한 어조로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제 저택에는 고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절 죽이신다면 공주 전하께서도 태후마마께 드릴 말씀이 없을 것 아닙니까? 7공주께서는 똑똑한 사람이시니 그리 멍청한 일은…….”

빠각.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손목을 부러뜨렸다.

숭준은 그만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채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렸다.

야홍릉의 손에 잡힌 그의 손목은 축 늘어져 있었다. 숭준은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야홍릉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가 덜덜 떨리는 입으로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감히… 어떻게 이렇게…….”

“난 널 바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야홍릉의 목소리는 얼음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숭준은 밖으로 홱 내뺐다.

‘감히 도망치려고?’

야홍릉은 채찍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채찍은 뱀처럼 뒤에서 숭준의 목을 휘감고 뒤로 잡아당겼다.

콰당!

위엄 가득한 내정 제일 고수가 볼품없이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부러진 손목이 딱딱한 바닥에 닿자 극심한 고통에 그는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는 목구멍으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야홍릉의 발걸음 소리가 귀를 울리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야홍릉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덤덤하나 소름 끼치게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널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시도해 보아도 좋아.”

방에 있던 여인들은 당황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병풍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예쁜 얼굴들이 모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등불로 환한 저택에서 주인은 곤경에 빠진 야수와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바로 야홍릉을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꼼짝할 수 없었다.

평소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야, 야홍릉……!”

그는 어두운 얼굴로 이를 악문 채, 음산하게 말했다.

“오늘 일로 후회하게 될 거야. 넌 꼭 후회하게 될 거라고…….”

야홍릉은 채찍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숭준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나신은 어디 있느냐?”

평온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순간, 숭준은 야홍릉이 정말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겁이 났다.

“채찍, 채찍을 치우면 말씀…… 말씀드리지요…….”

야홍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숭준은 손을 뻗어 목을 감싼 채찍을 잡은 채, 사람을 부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늘 밤의 저택은 이상하도록 조용했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그의 저택에 있는 호원들이 이렇게 무능할 리 없었다.

이렇게 큰 기척이 날 때까지 그들이 듣지 못했단 말인가?

‘왜 아무도 오지 않지?’

“나신은 어디 있지?”

야홍릉이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남은 손목도 잘라야 말하겠다면 그래 주겠다. 난 시간이 많으니 얼마든지 함께 놀아 주지.”

가능하다면 숭준은 당장 야홍릉을 지하 감옥에 끌고 가서 괴롭히고 싶었다. 그녀를 죽기 직전까지 괴롭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항상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굽어보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비굴하게 무릎 꿇는 기분을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숭준은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황 파악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당장 이 순간만 잘 견디면 나중에 복수할 날이 틀림없이 올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나 장군은…… 지금 지하 감옥에…….”

야홍릉은 차가운 얼굴로 채찍을 휘둘러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와 함께 가보지.”

숭준은 눈을 감고 분노와 굴욕적인 기분을 억눌렀다. 그는 직접 야홍릉을 지하 감옥으로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길에서 그는 채찍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았으나 야홍릉이 든 채찍은 강철처럼 그의 목을 꽉 조여 그를 벗어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숨을 쉴 틈을 남겨 두어 질식으로 죽을 리는 없었다.

숭준은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야홍릉을 속이지 않고 그녀를 지하 감옥 입구까지 데려갔다.

조용한 지하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야홍릉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사람은 욕을 퍼붓고 있었다.

“어느 간덩이가 부은 놈이 감히 날 가둔 거야?! 재주가 된다면 나서서 나랑 붙어 보자고! 이렇게 치사한 수단을 사용하는 게 무슨 재주라고!”

야홍릉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제 막 깨어난 나신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옥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누가 꾸민 짓인지 알게 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나 씩씩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는 듯했다.

“나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나신은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는 야홍릉을 부르자마자 야홍릉이 채찍으로 끌고 있는 초라한 몰골의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얼굴이 자주색으로 부어올랐고 머리가 헝클어졌으며 입가에 덜 마른 핏자국도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살펴본 나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양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옥문을 열어라.”

야홍릉이 명령하는 어조로 숭준에게 말했다.

나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설마 장양후가 절 가둔 것입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숭준은 열쇠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야홍릉이 얼마나 모진 사람인지 깨달은 터라 거짓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야홍릉이 방금처럼 그의 다른 손목도 부러뜨릴까 무서웠다.

그의 저택은 수비가 완벽한데다 이 지하 감옥은 그의 안방 아래에 설치되어 있어 일반인은 들어올 수 없었다. 옥지기조차 필요 없이 그는 열쇠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숭준은 손을 허리에 놓은 채, 조건을 내걸었다.

“공, 공주 전하. 채찍을 먼저 풀어 주십시오.”

그러나 야홍릉은 그를 옥문에 누른 채, 그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앗아 나신에게 던져 주었다.

“알아서 열고 나오너라.”

나신은 의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열쇠를 주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옥문에 얼굴을 붙인 채 숨을 헐떡이는 장양후를 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야홍릉은 더욱더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나신에게 붙잡힌 숭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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