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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5)화 (3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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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소식이 참 빠릅니다

‘가을에 참형한다고?’

야홍릉은 홍목으로 조각한 귀비탑에 기대어 앉아 창밖으로 보슬비를 내다보았다.

예쁜 눈에 날카로운 기세가 감돌았다.

심씨 가문이 끝장났으니 한씨 가문은 팔 한쪽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심탁과 심연 부자의 자리가 빌 텐데 누가 그 자리를 채우지?’

한참 뒤, 그녀의 귓가에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한경백이 우산을 들고 빗속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얀 옷을 입은 그 남자는 고결하고 우아해 보였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경백이 걸어와 우산을 접고 소매의 물기를 턴 뒤, 발을 들고 문턱을 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전하.”

한경백은 소매에서 물건을 꺼냈다. 거기에는 한씨 가문의 표식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내일 아버님의 생신이라고 한령이 저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고 집사가 그에게 건네준 초대장이었다.

한경백은 초대장을 대충 본 뒤,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야홍릉을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의 쉰 살 생일이 곧이니 한령은 그더러 아버지 생일 연회에 오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한씨 가문의 현재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형 한령은 모두 파직당하고 집에 있었다. 한옥금이 공주를 살해하려고 했다던 죄명은 술을 마신 뒤 행한 과실 상해로 바뀌어서 곤장 오십 대를 맞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창은 한씨 가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오십 대의 곤장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곤장을 맞은 한옥금은 반 주검이 된 채로 집에 끌려갔는데 아직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뼈를 다쳤으니 적어도 2, 3개월이 지나야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한씨 부인의 친정인 심씨 가문은 일가 모두 천뢰에 들어갔다.

한씨 가문은 지금 먹구름이 잔뜩 낀 분위기일 것이 분명했다.

짧은 이삼 개월 사이에 황제도 예우해 주던 한씨 가문이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시기에 아버님이 생신 연회를 벌일 기분이 있으실까?’

한경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일 연회를 치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가족끼리 밥을 먹자고 자리를 마련하는 거라도 다들 그럴 기분이 없을 것이다.

한경백은 입을 꾹 다문 채, 초대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홍문연(鴻門宴, 초청객을 음해할 목적으로 차린 연회)인 것 같았다.

그러나 홍문연인 걸 뻔히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다.

“목국은 줄곧 효로 나라를 다스렸지. 한령이 초대장을 보내왔으니 너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창밖으로 축축하게 젖은 풀밭을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부탁할 일이 있나 보지.”

한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현재 상황은 설상가상이었다.

한 어사든, 한 부인이든, 지금 사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경백 밖에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할지는 알아서 결정하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야홍릉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

그러나 일부러 그렇게 낸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온기 없는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한경백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한경백은 문 앞까지 걸어간 뒤, 말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준수한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겼다.

‘대단하던 아버지와 도도하던 적모, 형들이 드디어 이런 결말을 맞이한 건가? 그래서 나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 것인가? 비굴하게 지내던 서자가 드디어……. 지위가 달라진 것인가?’

한경백은 피식 웃고 빗속으로 걸어갔다.

5월의 밤은 여전히 싸늘했다.

보슬비가 멈추고 미풍이 창틀 사이에서 불어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선뜩한 찬바람에 오한이 들었다.

침전은 향기가 났다.

야홍릉은 홀로 앉아 있었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전하.”

영영이 비를 맞으며 들어와 창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2각 전에 나 장군이 군영 밖에서 중상을 입은 채, 끌려갔습니다.”

야홍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저지른 짓이냐?”

“내정 제일 고수 숭준입니다.”

영영이 대답했다.

“그가 직접 움직인 것은 아니나 움직인 사람은 그의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알게 된 바로는 나 장군은 중상을 입어 기절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사사가 그를 끌고 간 방향도 장양후부이고요.”

야홍릉의 시선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아직 없습니다.”

영영이 대답했다.

“서쪽 교외의 군영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않는 곳입니다. 장양후부의 두 사사는 아주 빠르고 소리 없이 나 장군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장군을 다치게 한 무기는 장양후부의 사사 전용 칼인 듯합니다. 칼에는 미약이 발라져 있고요.”

“봉우는 어떠하냐?”

“봉 장군 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영영이 대답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걱정에 사람을 보내 그를 보호하게 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오늘 밤 봉우 쪽에 가서 지켜보거라. 그마저도 당하지 않게 말이다.”

“네.”

영영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빗속에서 사라졌다.

이제 막 멈췄던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등불이 아른거리자 나무 그림자도 따라서 흐늘흐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뒷짐을 진 채,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어여쁜 얼굴에 뼈를 엘 것 같은 한기가 감돌았다.

잠시 뒤,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묵.”

대들보 위에서 한 사람이 휙 내려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돌아서서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말투는 무정할 정도로 담담했다.

“나와 함께 장양후부로 가자꾸나.”

능묵이 대답했다.

* * *

장양후 숭준은 제경에서 밉보이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난 내정 고수 출신일 뿐만 아니라 준수한 얼굴로 종종 태후궁에서 일을 하다가 태후를 여러 번 지키며 공을 세웠다.

그렇게 그는 서서히 태후 옆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가 되었다.

그는 내시가 아니나 자안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가 출신 자제가 아니나 후족으로 입봉하였고, 조정의 권신들 이상으로 위엄이 넘쳤다.

문무 백관들은 뒤에서 그를 깔보나 그에게 밉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태후가 장양후를 끔찍이 아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현 황제도 생모인 태후에게 아주 효성스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한 남자에게 작위를 봉한 것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이런 사람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후로 책봉되고 후궁에서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족의 친척마저 안중에 두지 않는 그를 제경의 귀족 가문 공자들은 피하기 바빴다.

다행히 숭준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내정에만 한정됐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그와 엮일 일이 없어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 2년 동안 조용히 지내 온 편이었다.

장양후는 태후의 시중을 드는 것 말고 사사와 미인을 키우는 게 취미였다.

사사는 그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미인은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나날은 황자보다도 편하고 즐거웠다.

비가 점점 거세지자 초여름 밤에도 선뜩한 한기가 느껴졌다.

등불 여러 개가 호화로운 저택을 밝게 비추었다.

화려한 방 안에서 관현악기 소리와 향긋한 술 냄새, 그리고 미인들이 가득했다.

구석의 책상에 있는 향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났다. 술 향기와 미인 몸의 연지 냄새가 어우러져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절정의 향락은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이런 고혹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게 했다.

저택의 주인 장양후는 몸이 나른한 듯 백옥 병풍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양옆에서 미인들이 금색의 술잔을 들고 시중을 들고 있었다. 앞쪽의 넓은 융단 위에서 미모의 무녀가 가느다란 허리를 흔들며 요염한 춤을 췄다.

숭준의 눈은 살짝 풀려 있었다.

‘황제 자리가 뭐가 대수인가? 권력을 움켜쥔다고 해서 뭐가 대단한가? 부를 손에 틀어쥐고 있고 미인을 품에 안고 있는 지금 나날들이야말로 신선과 다를 게 없지.’

“대인, 술을 드세요.”

왼쪽의 빨간색 면사 치마를 입은 여인이 술잔을 들고 요염하게 말했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거지요. 대인, 참 잘 생기셨어요…….”

숭준은 고개를 돌리고 미인의 턱을 손가락을 쳐들며 물었다.

“취했어?”

미인은 나른한 목소리로 그를 유혹했다.

“네, 저 취했어요.”

“대인, 포도 드실래요?”

오른쪽의 미인이 가는 손가락으로 포도 한 알을 따서 숭준의 입가에 가져갔다.

“크고 달콤한 포도인데 드셔 보실래요?”

숭준은 입을 벌리고 받아먹고는 미인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입안의 포도를 미인의 입속에 넣었다.

“맛있어?”

미인은 흠칫 놀라더니 쑥스러운 얼굴로 그의 몸을 두드렸다.

“미워요……”

술과 사치에 젖은 긴 밤이 지속되었다.

이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며 미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밤바람의 습기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포물선을 그리고 급속도로 시야에 나타났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상이 부서지며 그 위에 있던 술잔과 다과 접시가 깨지고 말았다.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미인들은 굳은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곧이어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것은 시체였다!

숭준은 안색이 변한 채, 급히 시선을 들었다.

검은 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검은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깡마르고 꼿꼿한 몸집과 날카로운 눈매, 그림처럼 얼굴,

그리고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차가운 분위기.

그 사람은 호국 공주 야홍릉이었다.

숭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없이 그를 음울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차가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또 아프기 시작했다.

“호국 공주 전하.”

잠시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정리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시면서 왜 미리 언질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야홍릉이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소름끼치는 한기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내리는 보슬비가 땅에 떨어진 뒤, 불빛에 반사되어 금빛을 뿌렸다.

그러자 야홍릉은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선녀처럼 더욱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숭준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슬쩍 상 위에 떨어진 사람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저택에 있는 사사였다.

사사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안색이 확 변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온 목적을 알고 있겠지?”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는 평온했으나 무정했다.

“이 저택을 부수는 게 싫다면 지금 바로 사람을 내놓거라.”

그녀의 말을 들은 숭준은 바로 침착해졌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나 장군 때문에 오신 거군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병권을 내놓으셨는데도 나 장군의 안위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시고 또 이렇게 바로 소식을 알게 되셨다니…….”

그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리며 눈을 반짝였다.

“공주부의 소식이 참 빠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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