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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3)화 (3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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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칼 두 자루

호국 공주부에 있던 야홍릉은 이 소식을 받고도 아주 평온한 얼굴로 알겠다고 한 뒤, 궁에서 나온 내시를 돌려보냈다.

“측군과 시군을 고르라고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한경백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폐하께서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걸까요?”

‘공주 전하께서 잠자리 상대가 아주 필요한 사람으로 보이나?’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왕의 마음일 뿐이니 깊이 고민하지 말거라.”

이 말을 들은 한경백은 바로 그 뜻을 알아들었다.

황제는 측군과 시군을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호국 공주부에 첩자를 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지?’

“폐하께서 전하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믿는다고?’

야홍릉은 덤덤하게 말했다.

“제왕 가문에서 믿음이라는 게 존재하더냐?”

한경백은 입을 다물었다.

야홍릉은 뜨거운 차를 든 채, 창문 앞의 비단 탑에 기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한옥금과 야자릉의 입에서 퍼진 소문을 이용해 야자릉을 혼내주는 것 말고도 야홍릉은 이번 기회에 황제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전생에서 죽기 직전에 들었던 성지 때문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내린 성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이 가짜 성지를 전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그녀가 아무리 여인이고, 황제를 위해 큰 공을 세웠음에도,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꺼리고 있었다.

‘그래서 꺼리는 마음이 점점 강해져 나중에는 아예 죽이기로 한 건가?’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한경백이 물었다.

“정말 사람을 저택에 들이실 생각입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저택은 오랫동안 조용했으니 좀 떠들썩한 것도 나쁠 건 없지.”

‘좀 떠들썩해도 된다고?’

한경백은 한참 침묵을 지킨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능묵의 글공부는 어떻게 되어 가느냐?”

‘글공부?’

한경백은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좀 이상한 듯합니다.”

야홍릉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설명을 기다렸다.

“능묵이 글공부를 습득하는 속도가 아주 느립니다.”

한경백은 단어에 신경을 써가며 능묵이 멍청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힐 때의 재주와 비교했을 때 아주 많이 못합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무공을 익히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글공부를 배울 때도 총명하다는 것은 아니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능묵은 의지력이 강하고 아주 열심히 배웁니다. 그러나 매일 깨우치는 양이 아주 적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그는 글공부에 재주가 없습니다.”

한경백이 말했다.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말없이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한경백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 계속 가르치거라. 익힐 수 있는 만큼 익히면 되지.”

“네.”

한경백은 대답하고 또 질문했다.

“폐하께서 측군과 시군을 고르라고 하셨는데 최종적으로 어느 가문의 자제가 발탁될 것 같습니까?”

야홍릉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족이나 관리 가문의 자제면 적자든 서자든 이런 수모를 견디지 못할 것이지. 그들이 충분히 흔들릴 만한 이익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이 말을 들은 한경백은 말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반 세가의 서자에게는 야홍릉의 측부가 되는 것은 그다지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야홍릉의 신분과 실력이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자들에게는 이것이 수모가 아니었다.

다만 서생들은 고결한 성품을 높이 떠받들었다.

세가 가문의 자제들 중 글을 익지 않은 사람은 몇 없었다.

무장 가문은 사내의 강직한 성격을 자랑으로 여겼다.

만약 야홍릉이 사적으로 측부나 시군을 들이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빌붙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내린 명령은 그 의미가 달랐다.

야홍릉더러 꽃구경 연회에서 상품을 고르듯 남자를 고르라는 게 아닌가?

이건 남자의 존엄을 발바닥에 깔아뭉개는 행위로 고결하다고 자처하는 서생이나 강직한 성격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무장이나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폐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정말로 야홍릉에게 시군을 몇 명 선물하고 싶다면 아예 저택에 들여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자가 비를 뽑는 것처럼 꽃구경 연회에서 선택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그것도 정궁 부마를 뽑는 것도 아니고.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야홍릉은 홍릉원의 동원 침전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이때, 고 집사가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전하, 진양왕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양왕이?’

“모시고 오너라.”

“네.”

야홍릉은 일어서서 대전 침전 밖으로 걸어갔다.

정오가 지난 지금은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였다. 야홍릉은 햇볕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녀는 화랑에 들어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화랑을 따라 산책을 하다 보니 밖의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산들바람에 물보라가 이는 것이 보였다.

야홍릉은 긴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늘 그렇듯 깊은 호수처럼 잠잠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몸집이 커다랗고 청색 장포를 입은 육연지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공주의 앞까지 다가와 몸을 살짝 굽혔다.

“공주 전하.”

야홍릉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육연지의 뒤로 한 소년이 따르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육연지는 웃으며 야홍릉의 앞의 의자에 앉았다.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제 옆에 서 있는 소년은 어떻습니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그녀는 시선을 육연지가 데려온 소년에게 돌렸다.

소년은 입술이 빨갛고 이가 하얀 게 곱상하게 생겼다.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슨 뜻이죠? 제게 미인이라도 선물하려는 겁니까?”

그녀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육연지는 고개를 젓고는 소년에게 손짓했다.

“먼저 내려가 보거라.”

“네.”

소년은 화랑을 나갔다.

“제 호위무사입니다. 앳되게 생겼으나 이미 성인이 되었지요.”

육연지가 말했다.

“오늘 전 미인을 선물하는 목적으로 온 게 맞습니다. 그게 아니면 제가 왜 낮에 왔겠습니까? 그러나 미인을 선물하면 전하께서 거절하실 게 분명하니 폐하께서 아시게 된다고 해도 제가 그저 전하와 친해지려고 호의를 보였다고만 생각하지, 다른 영향은 없을 것이 아닙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연지는 품에서 초상화를 꺼내 야홍릉의 앞에 펼쳤다.

“이 두 소년이야말로 전하께서 진짜로 저택에 들이실 사람입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그의 손에 들린 그림에 옮겼다

준수한 두 소년이 마주 보는 장면이었다. 나이대가 열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두 소년 중 한 명은 흰옷을, 다른 한 명은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같은 나이,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두 소년은 얼핏 보면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전하더러 측군과 시군을 고르라고 하신 건 공주부에 첩자를 꽂을 생각이신 겁니다.”

육연지는 그림을 거두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역모를 꾀한다는 죄명이 야자릉의 입에서 나왔는지라 폐하께서는 겉으로는 안 믿으시는 척하시면서 사실 속으로 걱정하고 있지요.”

호수를 바라보는 야홍릉의 시선은 아주 싸늘했다.

황제가 걱정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소년은 꽃구경 연회 날, 명단에 나타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둘을 저택에 들이십시오. 이들은 절대 전하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전하의 옆에 유용한 칼 두 자루가 될 것입니다.”

‘칼 두 자루?’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능묵을 떠올랐다. 그녀에게는 이미 좋은 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지?”

“이들의 신분은 전하께서 직접 물으십시오. 그들이 직접 말할 것입니다.”

육연지는 말을 마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전하께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육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목적이 무엇이냐?”

오랫동안 조용히 지낸 진양왕부는 이미 권세 있는 신하의 무리에서 빠져 있었다. 비록 아직도 젊은 세대의 귀족 자제들과 왕래하고 지내며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기도 했으나 실권을 움켜쥐고 있는 귀족들에게 진양왕부는 더 이상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바로 황제가 원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진양왕은 병권을 가지고 있으나 전쟁터에 나갈 기회를 찾지 못했다.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 무장은 서서히 녹이 스는 검처럼 언젠가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양왕은 최근 들어 자주 야홍릉에게 호의를 보였다.

육연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누군가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입니다.”

‘또 신세군.’

야홍릉은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전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육연지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저도 그냥 제안을 드린 겁니다. 꽃구경 날에 전하께서 직접 이 둘에 대해 알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신분을 아는 사람을 들여야 그나마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수시로 전하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전하께서 만족스럽지 않으시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셔도 됩니다. 저는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요하고 싶어도 강요하지 못할 것이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뭔가를 할지 말지는 그녀의 기분과 이 일에 대한 그녀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말을 마친 육연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야홍릉은 홀로 화랑에 앉아서 잔잔한 호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 싸늘하고 담담한 표정이 담겼다.

저녁 무렵.

형부에서 호국 공주를 모시러 왔다. 공주와 확인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야홍릉은 형부의 사람이 한옥금의 사건으로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한옥금이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쉽게 공주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명을 인정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사람보다 더 중요했다. 굴복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한씨 가문마저 몰락하여 죄를 줄이는 게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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