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말을 잘 듣다
한경백과 첨향은 곧 야홍릉의 앞에 도착했다. 한경백은 느긋한 얼굴로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야홍릉은 담담한 말투로 말한 뒤, 서각으로 들어갔다.
“날 따라오거라.”
“네.”
한경백은 공주가 무슨 일로 그를 찾는지 알지 못해 묵묵히 뒤를 따라 서각에 들어왔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책상 앞에 선 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경백은 그만 깜짝 놀랐다.
서재는 원래 저택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수많은 대가문에서도 서재는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호국 공주부의 서재는 더욱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이 소년은 어떤 사람이지? 공주 전하와 어떤 사이이지?’
한경백은 의아했다.
이때, 소년은 야홍릉이 서각에 들어온 것을 보고 다급히 붓을 내려놓은 뒤,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계속하거라.”
소년은 무릎을 꿇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네’라고 대답한 뒤, 다시 서재 앞으로 돌아와 붓을 잡았다.
한경백은 소년의 손바닥에서 무시무시한 상처를 보았다. 아름다운 손이 퉁퉁 부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한경백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야홍릉의 성미가 차가운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옥금과 연애를 한 삼 년 동안 그녀의 주변에는 한옥금을 제외한 다른 남자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한옥금에게 배신당한 뒤, 그녀의 성격은 더욱 차갑고 괴팍해져 황자들도 그녀의 앞에서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는데 도대체 공주 전하의 어떤 사람인 거지?’
“능묵이라고 한다.”
야홍릉의 담담한 목소리에 한경백은 정신을 차렸다.
“오늘부터 네가 저 아이의 스승이 되거라.”
‘스승?’
한경백은 흠칫 놀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렸다.
“전하의 뜻은…….”
“저 아이는 글을 모르니 글을 가르치거라.”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경백은 놀란 눈빛으로 책상에서 글을 쓰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마음을 진정했다.
사실 놀라울 것이 없었다.
열일곱 살이 되어도 글을 모르는 소년은 보기 드무나 한경백은 이 소년을 본 순간부터 그의 신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자세가 엉성하고 붓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소년이니 글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소년에게는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한경백은 곧 마음을 다잡고 허리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가르치면 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난 간섭하지 않겠으니 알아서 하거라.”
야홍릉이 말했다.
한경백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하께서 간섭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소년이 어느 정도까지 글을 익히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단순히 글을 알아볼 정도면 됩니까? 아니면 사서오경을 능히 읽을 정도로 가르치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눌려 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단순히 글을 알아볼 정도로 가르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야홍릉이 능묵을 조정의 과거시험에 내보낼 생각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하.”
첨향이 서각 밖에서 공손하게 그녀를 불렀다.
“도 의원이 약을 다 달였다고 합니다.”
‘약이라고?’
한경백은 깜짝 놀랐다.
‘누가 약을 먹는다는 말이지?’
야홍릉은 서각을 나서서 접시에 약사발을 받친 채, 서 있는 도 의원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저녁에 다시 와서 보거라.”
도 의원은 그러겠다고 했다.
야홍릉은 접시를 든 채, 서각에 들어와서 책상에 놓았다.
“약을 먹고 계속하거라.”
능묵은 조용히 붓을 내려놓고 두 손을 약사발에 가져다 댄 채, 조금씩 마셨다.
쓴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위가 너무 뜨거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약을 달인 뒤, 도 의원은 일부러 식게 기다렸다가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식은 약은 뜨거울 때보다 더욱 써서 먹기 힘들었다.
능묵은 미각이 없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약을 다 마신 뒤, 붓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능묵은 아주 부지런한 학생 같았다.
그를 유심히 살펴본 한경백은 조금 안심되었다. 이렇게 착실한 학생이면 가르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능묵은 약을 먹든, 글을 쓰든 말이 안 될 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
“여기서 지켜보거라.”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숙였다.
“전하께서 믿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꼭 저 아이를 잘 가르치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뭘 보든 서각을 나가는 순간 잊어라. 난 이 서각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서각 밖의 사람들이 알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한경백은 다급히 눈을 내리깔며 공손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날 밤, 능묵은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가 되어서야 서각에서 야홍릉이 내준 숙제를 마칠 수 있었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 종일 고생한 그의 오른손은 퉁퉁 부어올랐다.
그리고 한경백도 야홍릉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영위, 능묵.
“삼자경”의 앞 열 구절을 스무 번씩 베껴 쓴 것을 제외한 종이에 적힌 글이 그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공주는 다른 사람에게 능묵의 신분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경백에게 숨기지 않은 것은 한경백은 이젠 공주부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나 그녀의 편으로 인식된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신임을 주었다. 물론, 누군가 이 신임을 저버린다면 결말은 아주 처참할 것이다.
한경백은 소년의 퉁퉁 부은 손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거렸다.
소년의 실력이 어떤지 알지 못 했지만 고통을 참는 능력만큼은 아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능묵은 한경백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야홍릉의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야홍릉의 취침 시간이 늦춰질까 걱정되어 베끼기를 다한 뒤, 바로 야홍릉의 침전에 가져가 그녀에게 공손하게 바쳤다.
야홍릉은 목욕을 마친 뒤, 하얀색 침의를 입고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여쁜 얼굴이 불빛에 물들자 평소의 싸늘함이 한결 줄어든 듯했다.
소년은 침대 앞의 담요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서첩을 바쳤다.
그 행동에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소년의 퉁퉁 부은 손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글을 보았다. 종이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한 글자를 짚고 물었다.
“이 글은 어떻게 읽느냐?”
능묵은 시선을 들고 보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
“귀입니다.”
야홍릉이 또 다른 글을 짚었다.
능묵이 대답했다.
“저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장 한 장 검사를 마쳤다. 글씨가 어설퍼서 여전히 예쁘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의 글씨체는 힘이 좀 강한 것 말고는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애의 글씨체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정연한 것이 열심히 썼다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간이 늦었다고 급히 얼버무리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은 채, 열심히 이 글들을 썼다.
야홍릉은 이 글들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더는 벌하지 않았다.
능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 손은 이제 더 이상 매를 받아낼 수 없었다.
물론, 야홍릉이 매를 든다면 그는 기꺼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유가 단순히 벌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는 신은전에서 훈련을 받고 싸울 때, 여러 번이나 목숨이 위험한 적이 있었고 중상을 입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심지어 신은전의 잔혹한 형벌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서첩을 받아 든 능묵은 야홍릉의 담담한 말소리를 들었다.
“약을 바르거라. 씻기 어렵다면 홍릉원의 하인을 지목해 시중을 들라 하고. 그리고 주방에 가서 음식을 찾아 먹거라. 저녁의 약은 먹었느냐?”
능묵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먹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생식을 하지 말거라. 주방에 조리한 음식이 있다. 넌 뜨거운 것을 먹으면 안 되니 식혔다가 먹거라.”
“네, 알겠습니다.”
능묵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야홍릉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주인이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 *
5월의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더니 이젠 제법 여름 분위기를 풍겼다.
일주일 동안 조용히 보내게 될 줄 알았던 호국 공주부는 예상치 못하게 떠들썩해졌다.
황제가 지시를 내려 5월의 초엿샛날, 어화원에서 꽃구경 연회를 연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국 공주에게 측군과 시군(侍君, 잠자리 시중을 드는 남자) 몇 명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무백관과 제경의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호국 공주가 한씨 가문의 서자를 들인 것보다 황제의 결정이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다.
자고로 여인은 대놓고 남편을 여러 명 들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금지옥엽인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는 황족의 핏줄이기에 부마 역시 공주에게 예의를 갖춰야 했다.
첩을 들이는 것은 항상 남자의 권리였다. 여인은 신분이 아무리 고귀해도 ‘참한 여인은 남편을 둘 이상 모시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켜왔다.
그러나 호국 공주는 예외였다.
그녀는 신분이 고귀한 것을 제외하고도 남자에게 지지 않는 강한 실력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차갑고 무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한씨 가문의 서자를 측군으로 들였을 때도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슬픔에 그런다고 이해하기도 했지만 그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일에 간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측군을 들이는 것과 황제가 그녀에게 측군과 시군을 고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이것은 법률에 ‘황자가 법을 어기면 서민들과 똑같은 벌을 받는다’라고 제정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글로 정해진 규정과 실제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황자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더없이 흔한 일이었다.
심지어 귀족 저택에서도 툭하면 시녀가 죽어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누구 한 명 책임을 물은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고 황제가 법률에 황자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고 써넣을 수 없었다.
역대 황제들도 공주는 남편을 한 명 이상 들여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이것은 그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