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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1)화 (3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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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무슨 죄를 지은 거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이지?’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을 배에서 위로 옮겼다.

“여기가 아픈 것이냐?”

능묵의 목에서 고통을 애써 참는 듯한 급박한 신음이 들리며 몸이 더 웅크렸다.

야홍릉은 위에서 문제가 난 것임을 눈치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따뜻한 진기(眞氣)를 손끝으로 그의 위에 불어넣으며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그는 통증이 조금씩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하, 의원이 왔습니다.”

야홍릉은 덤덤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택의 도(陶) 의원은 약상자를 든 채, 다급히 뛰어왔다.

그는 탑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소년을 본 순간, 당황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살펴보거라.”

야홍릉의 말투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담담했다.

도 의원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소년을 살펴보았다.

곧 소년이 아픈 위치를 찾아내고는 진맥하며 물었다.

“방금 뭘 드셨소?”

“쌀밥과 야채를 조금 먹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도 의원은 살펴보는 동안 소년이 아주 조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위가 아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의원은 소년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소년은 아주 심각한 위병을 앓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차가운 음식과 먹고 생식을 한 탓에 위가 극도로 예민해져 약간의 자극도 받을 수 없는 거지요.”

‘차가운 음식?’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시선을 탑 위의 소년에게 돌렸다.

방금 전에 그녀가 진기로 그의 위를 따뜻하게 덥혀준 덕인지 소년 얼굴의 고통스러운 기색은 전보다 훨씬 옅어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탑 위에 누워 도 의원에게 팔을 내주고 있었다.

아직 식은땀이 남아 있는 준수한 얼굴은 곤경에 처한 새끼 표범을 떠올리게 했다.

진찰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도 의원은 능묵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마치 대답해도 되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평온한 말투로 도 의원의 질문에 일일이 답했다.

마흔이 넘은 도 의원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이 소년은 위병이 심해 얼른 약으로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분간 따뜻한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되고 차가운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도 의원은 소년의 신분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호국 공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미가 차갑지만 남을 괴롭히는 악취미는 없었다.

그러니 이 소년의 위병과 공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이다.

공주의 성미가 차가운 것도 사실이었다. 신분이 고귀하고 오랫동안 밖에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일반 여인들처럼 세심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자다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도 의원은 공주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자세하게 설명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 의원은 그가 조심해야 할 것과 먹어도 되는 것을 일일이 말한 뒤, 또 약 처방을 떼서 시녀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이때, 공주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직접 사 오거라.”

도 의원은 깜짝 놀랐다.

“직접 약재를 사 오고 달이는 것도 직접 하거라.”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절대 다른 사람의 손을 타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일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도 의원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허리를 굽혀 약상자를 연 다음, 약병에서 동그란 하얀색 약을 꺼내 능묵의 입가에 가져갔다.

“이걸 먼저 먹으시오. 당분간 통증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이오. 먼저 따뜻한 음식을 먹지 말고 한 시진 뒤, 약을 다 먹은 다음 먹으면 되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야홍릉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전 약을 달이러 가보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 의원은 약상자를 정리한 뒤, 빠른 속도로 대전을 떠났다.

능묵은 손에 약을 든 채,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먹어라.”

야홍릉이 말했다.

“네.”

능묵은 그제야 약을 삼켰다.

약은 투명하고 입에 넣자마자 녹았다. 그와 동시에 상쾌한 향기가 입안에서 퍼졌다.

위에서 들끓는 고통이 지속 되었지만 소년은 그것을 무시하고 탑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의 식사를 방해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

능묵은 일어나서 말없이 서 있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예전에 뭘 먹었던 것이냐?”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독이 없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독이 없는 음식?’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탑 앞에 앉으며 물었다.

“예를 들면?”

능묵은 또 망설였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다 먹었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눈앞의 준수한 얼굴의 소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소년의 오관은 아주 예쁘게 생겼다. 일반 세가에서 태어났다면 곱게 클 나이였다. 그렇게 컸다면 만인의 사랑을 받는 귀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읊거나 글공부를 하며 가끔씩 문인들의 모임에 나갔을 것이다. 무술을 배웠다면 그저 그런 흔히 보는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년은……

“내 저택에 온 뒤로는 뭘 먹었느냐?”

“주방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야채, 오이, 마당의 복숭아…….”

능묵이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모두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고 깨끗하며 독이 없는 것이었다.

“생으로 먹었단 말이냐?”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의 싸늘한 표정을 보자 흠칫 놀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네, 그러합니다.”

“따뜻한 음식은 먹은 적이 없느냐?”

야홍릉이 물었다.

이 문제는 좀 어려운 듯, 능묵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전 따뜻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왜?”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신은전의 규정이냐?”

능묵은 고개를 저으려고 하다가 다시 끄덕였다.

야홍릉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말에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우매한 왕이 아니었다. 또 고귀하게 자랐다고 해서 남들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는 철없는 아가씨도 아니었다. 어떤 일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위가 따뜻한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편리했기 때문이다.

윗사람들의 눈에는 영위의 목숨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거액의 자금을 들여 키운 어영위도 고귀하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이 사용하기 편한 도구이자 사람을 죽이기 좋은 무기일 뿐이었다.

영위가 태어난 용도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해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지 복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과 복을 누리는 것은 한참 다르지만 말이다.

생식을 한다면 곳곳에서 음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먹을 수 있고 죽지만 않는다면 나뭇잎이라도 영위에게는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따뜻한 음식은 그에 비해 훨씬 번거로웠다. 특히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영위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언제 죽는지, 이런 의문은 상급자의 사고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영위의 가치는 시간과 나이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전성기는 열여섯 살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였다.

이 나이를 넘기면 영위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며 훈련 도중 입었던 부상, 당했던 독등의 후유증이 서서히 나타나며 몸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 되기 때문이었다.

싸움 실력이 떨어진 영위는 결국 죽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식하면서 생긴 건강 이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원래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편전 안은 아주 조용했다.

열일고여덟 살 정도인 소년은 지금이 전성기였다.

그들의 전성기는 소녀의 미혼 시절처럼 눈부시나 매우 짧았다.

“주인님.”

능묵은 야홍릉의 눈길에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야홍릉이 내뿜는 위압감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글 연습을 하러 가도 됩니까?”

야홍릉은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능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그의 모습이 편전에서 사라지자 야홍릉은 비단 탑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지시를 내렸다.

“첨향아, 한경백더러 동원의 서각에 가라고 이르거라.”

“네.”

야홍릉은 일어나서 동원으로 향했다.

능묵은 책상에 마주 선 채, 오른손에 붓을 들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지금도 몸이 아주 불편했으나 도 의원이 준 약을 먹자 많이 호전되어 참을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을 참는 것은 영위에게 더없이 흔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아픔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린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글을 연속 세 장 썼다. 한 획, 한 획에 그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능묵은 글을 쓰면서 이 글의 발음을 묵념했다. 또 속으로 야홍릉이 오늘 밤 언제쯤에야 잠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오늘 궁에 들어가서 위병까지 도져 여러 번 시간을 낭비한 그는 주인이 내준 숙제를 완성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여기까지 생각한 능묵은 등줄기에 힘이 가해지며 저도 모르게 처참한 오른손을 바라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야홍릉이 또 벌을 준다면 상처투성이인 손이 계척의 매를 몇 번이나 받아낼 수 있을지 계산해 보았다.

아픔을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붓을 잡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야홍릉은 서각 앞에 서서 말없이 창문으로 고민에 잠긴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영위.

이 세 글자는 그전까지 그녀에게 그저 하나의 단어에 불과했다.

황족 소유이며 제왕의 명령에만 따르는 살인 도구.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어영위와 가까이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짧은 며칠 사이에 그녀는 원래의 원칙을 깨고 어영위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성품을 생각해 볼 때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얼굴의 표정을 지우자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화랑에 한경백과 첨향이 앞뒤로 선 채,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경백에게서는 책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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