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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0)화 (3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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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능묵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높이 내밀었다. 그의 말투에는 황송함이 담겨 있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감히 주인님과 비무를 할 수 없습니다.”

야홍릉은 당연히 그와 무공을 겨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지?”

“주인님은 제 주인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야홍릉이 또 싸늘하게 물었다.

“그게 왜?”

능묵은 여전히 대답했다.

“주인님은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드려야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깊은 눈매에 옅은 감정이 일렁였다.

잠시 뒤, 그녀는 몸을 돌려 책장으로 걸어가며 맨 위의 층에서 약병을 꺼냈다.

“약을 바르거라.”

그러고 바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왼손에만 바르거라.”

‘오른손은 글을 써야 하니 조금 더 아파도 되겠지. 통증은 기억력을 향상하는 데 좋으니.’

능묵은 약병을 받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야홍릉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약을 바른 뒤 서원으로 와서 식사 시중을 들거라.”

이 말을 들은 능묵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받았다.

야홍릉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소년은 한참이나 주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두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약병에 돌렸다.

마음속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 들었다.

주인은 항상 그가 다친 뒤에 잊지 않고 약을 바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는 어영위였다. 예전에 이것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입고도 홀로 이 악물고 버텨왔었다.

신은전에는 형벌이 많았다. 손바닥을 맞는 벌은 가장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바닥을 맞아서 생긴 상처는 심하게 아팠지만 뼈나 인대가 다치는 게 아니라서 약을 바를 필요가 없었다.

능묵은 멍하니 서서 주인이 왜 자신을 이렇게 잘해 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위는 도구일 뿐이다.

어영위는 도구들 중에서도 가장 말을 잘 듣는 도구일 뿐이었다. 도구는 주인의 관심이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부드러움은 사람의 마음을 부식시키는 독약이기도 하다.

‘주인님께 날 이렇게 잘해 주시지 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어영위는 감정이 있으면 안 되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이런 느낌은…….’

능묵은 입을 꾹 다물고 손에 든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의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여전히 약병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이것이 마치 가치가 엄청난 보물이 되는 것처럼.

한참 뒤, 그는 천천히 마음을 다잡고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약병에서 연고를 꺼내 손바닥에 펴 바르고 다시 약병을 닫았다.

그는 그 약병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오른손을 다 씻은 그는 서각을 떠나 서원의 선청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고기 요리 두 가지와 채소 요리 두 가지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국 한 가지와 밥 두 그릇도 함께 있었다.

야홍릉은 홀로 식탁에 마주 앉아 천천히 국을 먹고 있었다. 담담한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주인님.”

능묵은 앞으로 걸어오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태후궁에서 마주쳤던 사람은 내정 제일의 고수입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었다.

“그자를 아느냐?”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덤덤하게 물었다.

“어떻게 아는 것이냐?”

“그자가 태후의 침궁을 자주 드나들기 때문입니다. 그를 제외하고도 또 다른 사람 한 명도 자주 드나듭니다.”

능묵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장양후의 무공은 네가 보기에 어떠하냐?”

“약해 빠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이냐?”

“태후궁에 있으니 죽이면 아주 시끄러웠을 겁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

“주인님께서 시끄러워지실 겁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들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끄럽다고?’

호국 공주가 자안궁에서 태후에게 무례하게 굴고 또 부하가 태후의 심복인 내정 제일 고수 장양후를 죽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시끄러워질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능묵은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남겨 중상에 그치게 한 것이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장양후는 내가 제거하고 싶은 사람이다.”

능묵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오늘 밤에 그놈의 목을 따 오겠습니다.”

“급할 것 없다.”

야홍릉이 말했다.

“먼저 밥을 먹고 그다음에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꾸나.”

‘밥을 먹는다고?’

능묵은 시선을 돌려 식탁 위의 음식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께서 뭘 드시겠습니까? 제가 집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식사 시중을 드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배울 수 있었다.

마치 글을 익히는 것처럼.

“앉거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중들 필요가 없으니 네 밥이나 먹어라.”

능묵은 그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먹으라고?’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그의 신분으로 어떻게 주인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서서 글을 쓰는 것만 해도 규칙을 어긴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의 옆에서 밥을 먹으라고 하다니.

“내 명령이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능묵은 뻣뻣하게 서 있다 공손하게 대답한 뒤, 의자를 잡아당기고 목석처럼 야홍릉의 하석의 하석에 앉았다.

정란은 시녀들을 데리고 네 개의 요리를 더 올린 뒤 물러났다.

첨향은 능묵에게 흰 쌀밥과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야홍릉의 미간이 저도 살짝 찌푸려졌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능묵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불안함을 느끼다 저도 모르게 밥그릇과 젓가락을 한쪽 옆에 밀어 두었다.

이때, 야홍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첨향아, 넌 능묵의 신분을 아느냐?”

이 말을 들은 첨향과 능묵은 모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첨향은 잘못을 저지른 줄 알고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능묵도 일어나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난 너한테 능묵의 신분을 아냐고 물었을 뿐이다.”

첨향은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모……, 모릅니다.”

야홍릉은 바닥에 꿇어앉은 표정을 보더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첨향에게 네 신분을 아냐고 물었는데 무릎은 왜 꿇은 것이냐?”

능묵은 입을 꽉 다문 채, 말없이 있었다.

첨향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주는 그저 별 뜻 없이 그녀에게 능묵의 신분을 아냐고 물었을 뿐, 그녀가 젓가락과 밥그릇을 가져왔다고 꾸짖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 공손하게 말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능묵 공자의 신분은 저도 모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앉아서 밥을 먹거라.”

이 말은 능묵에게 한 것이었다.

소년은 일어나서 다시 의자로 걸어간 뒤 앉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공주부의 일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능묵의 신분과 그가 저택에서 한 말과 행동까지도.”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의 어영위 신분은 공주부에서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내시가 그를 데리고 왔을 때, 야홍릉은 하인들을 물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부를 떠난 뒤에는 능묵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호국 공주부는 규칙이 엄격했기에 하인들도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그래도 능묵의 신분을 신경 쓴 그녀는 특별히 일깨워 주었다.

‘모르는 게 좋을 거야.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해.’

첨향은 그제야 야홍릉이 질문한 의도를 이해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저택의 사람들은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손을 뻗어 젓가락을 잡은 뒤, 음식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을 먹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공기 중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능묵이 멍하니 앉아서 가만히 있자 또 미간을 찌푸렸다.

능묵은 조건반사적으로 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다시 한번 무릎을 꿇는다면 오늘 안에는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말거라.”

야홍릉은 인정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무릎 꿇는 것이 좋으냐?”

능묵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의자에 기댄 채,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밥 먹을 줄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네 입맛에 맞는 음식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냐?”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능묵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두운 시선을 이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그럼 왜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냐?’

능묵은 그녀의 시선에서 풍기는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젓가락을 든 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야채를 집어 밥그릇에 올려놓고 밥과 함께 먹었다.

야홍릉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첨향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공주 쪽은 그녀의 시중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손을 들어 다른 시녀들을 내보낸 뒤, 차를 타러 갔다.

선청은 아주 조용했다. 둘이 밥을 먹으면서 나는 미세한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능묵의 안색은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가 최대한 꾹 참고서 소리 없이 밥을 먹느라고 애썼지만 야홍릉은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쳐들고 능묵을 바라보았다. 능묵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꾹 참고서 밥을 먹었던 것이다. 아픔을 참느라 주인이 그를 바라보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말았다.

“왜 그러는 것이냐?”

야홍릉이 물었다.

능묵은 야홍릉의 살짝 찌푸린 미간과 의아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었고 이마에서는 콩알만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안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첨향아.”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저택 의원을 불러오거라.”

이 잠깐 사이에도 소년의 몸은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린 채,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야홍릉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안은 채, 편전으로 뛰어갔다.

능묵은 이미 너무 아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홍릉은 그를 탑에 올려놓은 뒤, 한 손으로 그의 맥박을 짚었다.

중독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소년의 배를 만졌다.

“여기가 아픈 것이냐?”

능묵의 이가 떨리는 몸과 함께 딱딱 소리를 냈다. 극심한 고통에 그는 온몸의 감각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야홍릉의 질문을 들은 그는 어렵게 고개를 저었다.

“주…… 주인님, 죽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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