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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9)화 (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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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나보다 강하군

“신 장양후(長陽侯), 숭준(崇峻)이 호국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숙인 다음 예를 올렸다. 그는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시선이 드러났다.

“공주 전하께서는 지금 가시려는 겁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손을 등 뒤에 놓고 있는 그녀는 검은색 경포를 입은 탓에 몸매가 더욱 깡마르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차갑고 싸늘한 분위기에 보기만 해도 겁이 났다.

숭준은 최근 몇 년 동안 태후의 총애를 받는 내정 제일 고수였다.

그는 무공이 강하고 용모가 준수한 데다 수차례 태후를 보호한 공을 세워 장양후로 봉해졌다.

하지만 문무백관들 중, 그가 태후의 정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태후의 총애를 받은 덕에 그는 제경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는 야홍릉과 정면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

예전에 야홍릉은 한옥금을 좋아했고 한옥금은 3황자의 사촌 동생인데다가 태후는 3황자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태후의 정인인 숭준도 당연히 야홍릉을 예우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 야홍릉은 한옥금이 사이가 틀어졌고 오늘 또 태후의 앞에서 예의 없이 굴었다. 그러니 그가 어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자안궁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둘은 말없이 서로 노려보았다. 한 명은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고 다른 한 명은 겉보기엔 유순하나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둘의 기세는 엇비슷하게 강했다.

하지만 야홍릉은 한낱 남자 노리개와 시간을 끌 기분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옆에서 지나가려고 했다.

숭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음침하게 말했다.

“호국 공주, 잠시 멈추시지요.”

야홍릉은 못 들은 척했다.

“호국 공주, 잠시 멈추시지요.”

숭준이 또 한 번 반복했다.

“안 그러면 제가 무례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야홍릉의 싸늘한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주춤했다.

그녀가 지나는 곳의 시위들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야홍릉은 숭준의 위협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태후는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안궁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야홍릉의 뒷모습을 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목국은 예로부터 효로 나라를 다스렸지. 황상도 내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는데 홍릉이 너는 참 날 실망시키는구나.”

숭준은 예를 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노여움을 푸십시오.”

“숭준아, 호국 공주가 이렇게 무례하게 구니 네가 날 대신해 효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거라. 다치게는 하지 말고.”

태후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숭준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공주 전하의 고귀한 옥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야홍릉의 깡마른 몸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시선에 매서운 한기가 흘렀다.

그는 나는 듯이 뛰어가며 야홍릉의 등에 일 장을 날렸다.

이 장풍은 매섭고 무시무시했다. 강력한 장풍에 야홍릉의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야홍릉이 정말 그의 장풍에 맞는다면 죽지 않아도 최소한 중상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은 위험이 등 뒤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때, 옆에서 한 사람이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창백한 손으로 숭준의 목을 덮쳤다.

무방비상태이던 숭준은 깜짝 놀라 안색이 확 바뀌었다. 당황한 그는 다급히 손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맞붙어 겨루기 시작했다. 곧이어 신음과 함께 숭준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너무 빨리 벌어진 일이라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기 전에 이미 상황은 끝나고 말았다.

숭준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극심한 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돋으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안궁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숭준!”

태후는 안색이 변한 채, 야홍릉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홍릉! 네가 어찌 감히! 정녕 반역이라도 하려는 게냐?!”

야홍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자안궁 궁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등 뒤의 장풍이 사라지자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시 등에 가라앉은 뒤, 햇살 속에서 반짝이며 윤기를 자랑했다.

숭준은 쫓아가려고 했다. 그는 방금 그와 겨루었던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그러나 시선을 들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호국 공주의 깡마른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내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야홍릉의 모습이 궁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숭준의 매혹적인 얼굴이 순식간에 음울해졌다.

태후는 화가 나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야홍릉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서부터 항상 제멋대로이고 말을 안 듣는 손녀를 어떻게 다루어야 고분고분해질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숭준조차 그녀의 상대가 아니라니……. 아니, 아니지.’

태후는 고개를 숙이고 숭준을 바라보았다.

“방금 너와 겨루었던 사람은 누구냐?”

그녀는 번개 같은 검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숭준을 때려눕힌 뒤, 눈앞에서 사라진 것밖에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의 얼굴을 아예 볼 기회도 없었다.

숭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태후에게 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공을 봐서는 영위 같습니다.”

“영위라고? 고작 영위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말이냐?”

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 영위가 아닌 듯합니다.”

숭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일어서며 궁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신은전 출신의 영위인 듯합니다.”

“신은전?”

태후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 목소리도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야홍릉의 옆에 어떻게 신은전의 영위가 있다는 말이냐?”

숭준도 이 점이 궁금했다.

가슴팍의 심한 통장에 고개를 숙인 숭준은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다쳤나?’

그러나 방금 상대가 보여준 내력(內力)은 아주 깊고 강해 전혀 다친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속도도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런 그를 누가 다치게 한 거란 말이지?’

“태후마마.”

자안궁 밖에 있던 시녀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서 오셨어요.”

태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오늘 내가 몸이 좋지 않으니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고.”

말을 마친 그녀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는 돌아가서 보고했다.

숭준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영위에 대한 생각을 접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야홍릉을 떠올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꽉 악물었다.

‘목국의 차가운 호국 공주는 역시 괜히 소문난 게 아니군.’

그러나 그는 병권을 내놓고 또 한씨 가문과 틀어진 공주가 못 하는 게 없고 약점을 잡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 *

야홍릉은 궁에서 지체하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황제와 황후는 그녀가 태후에게 불려 궁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다들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황후는 직접 나서서 그녀를 잡으려고 했고 황제는 손평을 보냈다.

그러나 모두 호국 공주를 보지 못했다.

황후가 자안궁에 도착하고 손평도 급히 이쪽으로 걸어왔을 때, 야홍릉은 이미 궁을 떠나 공주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지시를 내렸다.

“난 몸이 좋지 않아 일주일은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고 집사는 바로 지시를 실행에 옮겼다.

호국 공주부는 다시 문이 닫히게 되었다.

야홍릉은 침전으로 돌아가 잠깐 휴식을 취했다. 첨향이 다가와 점심 식사가 마련되었다고 얘기하자 그녀는 눈을 떴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능묵.”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전 안은 조용했다.

야홍릉은 일어나 서각으로 향했다.

준수하고 앳된 얼굴의 소년은 아직도 책상에 마주 서서 눈을 내리깐 채, 글 쓰는 데 집중했다. 그의 이마에 맺힌 옅은 땀과 창백한 안색을 무시한다면 지금 그의 모습은 기분이 흐뭇해지는 광경일 것이다.

야홍릉은 말없이 서각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야홍릉이 들어온 것을 보더니 재빨리 붓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러나 야홍릉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소년은 행동을 멈추고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야홍릉은 걸어가 책상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손.”

짧은 한 글자였지만 소년의 몸은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쓴 글을 힐끗 돌아보았다. 또 잘못 쓴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이 짧게 ‘손’이라고 말할 때마다 그의 손은 늘 봉변을 당했다.

소년은 겁에 질려 떨리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손바닥을 펼쳤다. 눈을 한껏 내리깐 그의 모습은 유순하기만 했다.

야홍릉의 시선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오른손은 충혈되어 잔뜩 부어올랐다. 생채기의 색깔은 자주색으로 변해 무시무시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왼손의 생채기는 파열되어 피가 났다.

핏줄이 손바닥을 뚫고 나온 모습은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했다.

“왼손잡이냐?”

야홍릉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능묵은 멈칫했다. 이 말의 뜻을 짐작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잠시 뒤, 그가 대답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왼손잡이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왼손잡이가 아니라면서 왜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왼손을 사용한 것이냐?”

왼손잡이의 생채기가 파열된 것은 숭준과 싸울 때, 강력하게 반격하며 생긴 상처였다.

숭준은 무공이 약하지 않았다. 내력으로 비하면 능묵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능묵의 손은 충혈되어 잔뜩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강력한 외력에 피부가 까지며 피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능묵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손바닥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두 손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면서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서각으로 들어와 글 연습을 했다.

오직 그녀가 내준 숙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 소년은…….’

야홍릉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그는 능묵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이미 지나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왼손으로도 그를 충분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숙인 뒤, 잠깐 망설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오른손으로는 글을 써야 하니까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각의 공기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녀는 말없이 공손하고 유순한 소년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무공은 나보다 강하더구나.”

이건 질문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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