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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8)화 (2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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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궁에서 사람이 오다

궁에서 사람이 왔다.

황제의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태후의 의지(懿旨, 왕대비, 왕비, 왕세손의 명령)를 전하러 온 사람이었다.

야홍릉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고 집사가 서각 밖에 서 있었다.

“전하, 내정의 계(季) 총감이 오셨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디 있느냐?”

“전청(前廳)에서 차를 들고 계십니다.”

야홍릉은 전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 총감은 태후 옆에서 삼십 년이나 시중을 든 사람이었다.

그는 태후의 총애를 듬뿍 받기에 황제도 그의 체면을 어느 정도 봐주었다.

그동안 조정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옥금은 아직도 심문받고 있고 한씨 부자는 파직되었으며 심씨 가문에 연속으로 사고가 생겼다.

황제는 기분이 엉망이라 야홍릉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덕분에 야홍릉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견디지 못하고 나선 사람이 태후일 줄이야.

야홍릉은 앞뜰로 들어가자 멀리서 머리가 희끗해진 중년 내관이 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공주 전하 납셨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자 황급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서서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들어가서 상석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녀가 올려온 차를 마셨다.

“무슨 일인가?”

그녀는 항상 이런 태도였다. 그 누구를 대하든 항상 이랬다.

계 총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태후마마의 옆에 다과를 잘하는 궁녀가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셨다고 하셨습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최근에 많은 일이 벌어져 저택에 계시는 공주 전하도 기분이 울적할 거라 생각하셔서 전하더러 궁에 들어오셔서 다과를 드시며 얘기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궁에서 다과를 먹자고? 내 저택에는 다과가 없더냐? 얘기를 나누자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태후가 무슨 속마음으로 그녀를 불렀는지 야홍릉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 총감이 말을 마친 뒤에도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을 때는 주변의 공기마저도 쌀쌀했다.

계 총감은 소름이 돋아 팔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호국 공주와 얘기할 때면 황제와 있는 것보다 더 긴장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호국 공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네.”

계 총감은 그 말을 듣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지요. 전 이곳에서 공주 전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야홍릉이 궁에 들어가겠다고만 한다면 그는 반 시진을 기다려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야홍릉은 말없이 일어나 전청을 나갔다.

홍릉원에 간 그녀는 서각으로 들어가 담담하게 말했다.

“궁에 다녀올 테니 넌 저택에 남아 있거라.”

능묵은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제 직책은 주인님의 곁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것입니다.”

궁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이 아예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주인의 곁을 따라야 했다.

야홍릉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손은 괜찮으냐?”

능묵은 멈칫하다가 곧바로 대답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괜찮습니다.”

그에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야홍릉을 보호하는 데 지장이 전혀 없을 것이다.

“마음대로 하거라.”

야홍릉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돌아서서 침전으로 향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어영위의 직책이라고 하니 그녀도 받아들였다.

글을 익히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능묵의 주요한 신분은 어영위였다.

침전을 나온 야홍릉은 허리가 조이고 팔소매가 좁은 검은색 경포를 입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자 그녀의 몸매는 더욱 말라 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에 보는 사람은 괜히 소름이 끼쳤다.

“전하, 점심 식사는 돌아오신 뒤에 하실 겁니까?”

첨향이 소매를 정리해 주며 공손하게 물었다.

조금만 지나면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태후가 그녀더러 궁에서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 주방더러 준비를 하라고 하겠습니다.”

첨향이 대답했다.

야홍릉은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일주일이나 저택을 나서지 않은 호국 공주가 문을 나서자 그 소식은 순식간에 제경의 왕부와 귀족 가문들에게 쫙 퍼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호국 공주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야홍릉은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그저 저택 밖에서 기다리기나 할 뿐, 감히 공주부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누군가 몰래 호국 공주부에 발을 들인다면 야홍릉은 그의 시체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 * *

자안궁 안.

태후는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찻잔을 든 채, 고개를 기웃거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궁녀 남수(藍秀)도 수시로 밖을 내다보며 조금만 기척이 있어도 전해 주었다.

계 총감이 공주부에 간 지 반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태후는 하루의 반을 보낸 것보다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태후마마, 차를 따라 드릴게요.”

청순한 용모의 시녀가 다가오더니 태후의 찻잔에 뜨거운 차를 붓고 위로를 건넸다.

“태후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께서 곧 오실 겁니다.”

그러나 태후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야홍릉은 지금 태후보다도 더 도도하고 황제보다도 초대하기 더 힘들었다.

아니, 최근에는 황제도 초대하기 힘들었다.

도화산의 일이 일어난 뒤, 황제를 만나는 것도 태후에게는 더없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황후는 매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황후가 하루에 세 번이나 그녀를 찾아와 하소연하니 그녀마저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짧은 며칠 동안 그녀는 적어도 십 년은 늙은 기분이 들었다.

“호국 공주께서 오셨습니다.”

태후를 모시는 궁녀, 남수가 걸어 들어오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 호국 공주께서 오셨어요.”

그 말을 들은 태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이냐? 잘못 본 게 아니고?”

남수가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호국 공주의 날카로운 기세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태후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 위에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계화고(桂花糕)는 준비되었느냐?”

“네.”

남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계화고 말고도 난향(蘭香)은 매화 떡과 당증소락(糖蒸酥酪)까지 준비했어요.”

“태후마마.”

계 총감이 미소 띤 얼굴로 급히 들어왔다.

“호국 공주께서 오셨습니다.”

태후도 급히 말했다.

“얼른 안으로 모시지 않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싸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걸려 있지 않았다.

야홍릉은 태후의 앞까지 다가간 뒤,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태후마마.”

자안궁의 시녀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남수는 예를 올린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홍릉아, 드디어 왔구나. 내가 정말 눈이 빠지게 기다렸단다.”

태후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앉으렴.”

야홍릉은 말없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태후는 찻잔을 들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홍릉아, 너도 황족의 핏줄이니 이 나라의 종묘사직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니?”

태후는 야홍릉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야홍릉은 말을 돌려 하는 걸 딱 질색하기에 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자릉이는 네 동생이지 않느냐? 걔가 말실수를 한 건 잘못한 것이나 너도 매를 들었고 부황도 걔를 벌했지 않으냐? 홍릉아, 네 부황에게 찾아가 자릉이를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해보는 건 어떻겠니?”

태후의 말투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난 너와 옥금이의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더구나. 옥금이 그 아이는 그렇게 모질지 못해. 네 셋째 오라비도 널 아끼지 않았느냐…….”

“마마께서는 오늘 이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야홍릉은 태후의 말을 자르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말투로 물었다.

태후는 말문이 막혔다.

“난 네가 난향이 만든 다과를 맛보라고 부른 거지.”

그녀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씨 가문의 상황도 좋지 못하단다. 홍릉아, 네 셋째 오라비는 밖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궁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알게 된다면 전쟁터에서 마음이 어지러워 싸움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안 그러나?”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하게 앉아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적자이지 않느냐?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야씨 황족은 혼란스러워질 것이 분명해. 넌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사내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야씨 황족이 이렇게…….”

“마마께서 계속 이런 얘기를 하신다면 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

“야홍릉, 거기 서거라!”

태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넌 예의가 있는 아이냐? 내가 두어 마디 했다고 짜증이 난다는 것이냐? 얄팍한 능력을 믿고 이제는 이 할미도 무시하는 것이냐?”

야홍릉은 싸늘한 시선으로 돌아서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마마께서는 저에게 그런 말을 한 야자릉이 죽어 마땅하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태후의 안색이 확 변했다.

야홍릉은 벌을 받아 마땅하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일반 신분의 여인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공주에게 황위를 노린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면 당장 목을 쳐도 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자릉은 황후의 적녀인데다 황제의 친딸이라 이런 일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전 야자릉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야홍릉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부황께서 벌을 약하게 주셨다가 나중에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전 그녀를 죽이지 못해도 불구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태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한옥금은 태후마마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한옥금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도 저이고,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사람도 저이며 야자릉의 모함에 당한 사람도 저입니다. 태후마마와 황후마마께서 저를 한 번이라도 배려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야홍릉이 말에 태후가 다급히 말했다.

“황후도 매일같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반성하고 자책한단다. 자릉이를 때리고 싶으나 만나지 못하니…….”

“때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갇혀 지내게 놔두시지요. 전 그 애의 얼굴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태후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억지로 화를 억누르며 야홍릉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자릉이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한 거야. 하지만 넌…….”

“저 말입니까? 태후마마께서는 제가 병사를 일으켜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 뜻이 아니라…….”

태후는 안색이 변하며 다급히 부인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나도 자릉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속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부추김에 넘어갔을 수도 있지. 그러나 무슨 일이든 원인이 있는 법이다. 황후에게 이번 일의 진실에 대해 알아볼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

야홍릉이 대답했다.

“전 황후마마가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막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릉이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이냐?”

태후의 목소리는 아이를 달래듯 더 부드러워졌다.

“홍릉아, 네가 황제에게 사정을 해 보렴. 황후가 자릉이를 만날 수 있게…….”

“시간이 없습니다.”

야홍릉이 딱 잘라 대답했다.

“마마께서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과는 혼자서 드십시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미련 없이 일어나 자안궁을 떠나려고 했다.

“야홍릉!”

태후는 화가 나 얼굴이 퍼레졌다. 그녀는 찻잔을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게 섯거라! 어찌 이렇게 예의가 없는 것이냐!”

야홍릉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서른 명이 되는 시위가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짙은 빨간색 비단 장포를 입고 얼굴이 준수한 미남자가 시위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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