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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7)화 (2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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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무엇보다 어려운 일

그 뒤로 며칠 동안 야홍릉은 저택을 나선 적도 없고 누군가 찾아온 적도 없었다.

병권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제경에서 권세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2황자나 4황자, 심지어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간 3황자, 또는 황위에 조금이라도 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도화산행에서 여러 곳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자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호국 공주부의 기척을 살폈다.

얼마 전에는 황제가 대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8공주가 감금당하고, 6황자가 호되게 꾸짖음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건의 이유인 ‘호국 공주가 황위를 노린다’는 소문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궁의 사람들은 쉬쉬거리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바빴다.

조정의 문무백관들과 황자들은 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황제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 이 민감한 시기에 호국 공주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궁의 첩자들이 시시각각 호국 공주부를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제가 야자릉의 말로 야홍릉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처럼 위험한 순간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나았다.

게다가 야홍릉은 이미 병권을 내놓았기에 야홍릉을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야홍릉은 며칠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택을 나가지 않아도 바깥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황후가 여러 번이나 폐하를 찾아갔지만 모두 만남을 거절당했습니다. 매일 세 번 자안궁에 찾아가 태후께 문안을 올렸습니다.”

“폐하는 이미 닷새나 자안궁에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태후가 사람을 보내도 폐하는 정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후궁에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비빈들은 모두 한씨 가문이 끝장났고 황후와 3황자도 폐하의 총애를 잃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흘 전부터 정왕은 심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심탁이 뒷돈을 챙긴 증거가 모두 폐하에게 전해졌습니다. 증거가 확실하여 발뺌할 수 없을 겁니다.”

그와 동시에 황성에는 또 놀라운 추문이 일어났다.

심씨 가문의 차남 심천(沈泉)이 저택에서 시녀 여러 명을 겁탈하고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청천거(淸泉居) 우물 아래에서 여인의 시체 여러 구를 발견했는데 모두 심천의 시중을 들던 아리따운 시녀들이었다.

이 사건에 대리시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사한 결과, 심천에게 예쁜 시녀를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년간 그의 손에서 목숨을 잃은 젊고 아리따운 시녀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청천거는 심씨 가문에서 시녀들이 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저택의 하인으로 팔려 온 이상, 그들은 위에서 하라는 대로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죽더라도 그들의 목숨은 한없이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죄악이 드러나며 제경 전체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심씨 가문에서 사건이 연속해서 터지자 황제는 더욱 화가 났다. 그는 문무백관들 앞에서 크게 화를 내며 대리시경더러 이 사건을 낱낱이 조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심씨 가문의 운명은 위기에 이르고 말았다. 한씨 가문을 등에 업고 오랫동안 으스대던 심씨 가문이 이렇게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지게 될 줄 몰랐다.

아비는 뇌물을 받았고 아들은 사람을 죽였다.

황제가 심씨 가문을 멸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약 정말 심씨 가문을 멸한다면 한씨 가문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위기에 놓인 한씨 가문의 오른팔마저 자르는 셈이 아닌가?

3황자의 처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태후와 황후, 한씨 가문의 부자, 그리고 조정의 문무백관들 중 누구도 짧은 한 달 동안에 조정의 상황이 이렇게 확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던 황후의 적자는 이제 막 전쟁터에 가서 공을 세우기도 전에 뒷배의 힘이 다 사라진 것이다.

야홍릉은 이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연속 며칠 동안 홍릉원의 서각에 있으면서 그녀는 능묵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만 몰두했다.

능묵은 서첩을 몇 번 베낀 다음 “삼자경(三字經)”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글을 익히는 필독서였다.

야홍릉은 처음에는 능묵에게 뭘 깨우치게 하거나 그를 수재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저 글만 가르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때로 실행으로 옮겼을 때, 처음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능묵이 이틀의 시간을 들이고도 “삼자경”의 앞 열 구절을 정확하게 외우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무공과 글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야홍릉은 신속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싸늘함이 아니라 기분이 언짢은 표현이었다.

눈치가 아주 빠른 능묵은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제가 아둔하여 주인님의 기분을 잡쳤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한참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계척(戒尺, 손바닥을 때리는 자)을 가져오너라.”

능묵은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로 계척을 가져왔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척을 받아든 뒤, 능묵더러 책을 펼치고 한 번 더 읽으라고 했다.

전에 야홍릉이 가르쳐 준 있는 것이라 읽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덮고 외우려고 하니 능묵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읽었던 글들이 머릿속에서 올챙이 같은 부호로 변해 온전하게 외울 수 없었다.

“교지도(敎之道). 그다음은 무엇이냐?”

야홍릉이 화난 눈빛으로 싸늘하게 물었다.

능묵은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짜냈다.

“교지도, 귀, 귀…….”

“손.”

차가운 명령에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능묵은 두 손을 제사에 바치는 것처럼 공손히 내밀었다.

야홍릉은 인정사정없이 계편을 휘둘러 능묵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생채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통증은 사람들더러 생각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능묵은 아픔을 신경을 겨를이 없었다. 이마에 솟은 식은땀은 아파서 난 것이 아니라 야홍릉이 내뿜는 불쾌한 한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무서운 적이 없었다.

신은전에서 무공을 연마할 때도 반드시 항상 정신을 도사리고 있어야 하며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절대 약점을 적에게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심각한 상처를 입어도 반드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 깨우친 것들도 지금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귀이전(貴以專).”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귀이전.”

“계속해.”

여전히 싸늘하고 평온한 어조였다.

그러나 능묵은 이 싸늘한 명령에서 그를 긴장하게 하는 불안한 위압감과 엄숙함을 느껴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뒤에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자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잊은 것이냐?”

능묵은 또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제가 아둔하니 주인님께서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망설이지 않고 계척으로 그의 손바닥을 연속 세 번 내리쳤다. 소년은 열 손가락이 마음과 이어져 있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깨닫게 되었다.

손바닥의 극심한 통증이 마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마에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소년은 손을 숨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길고 예쁜 손이 순식간에 자주색으로 부어올랐다.

항상 차갑고 매정하던 어영위는 지금 어린아이처럼 불쌍해 보였다.

“석맹모(昔孟母).”

야홍릉이 뒷말을 덧붙였다.

능묵은 겨우 말을 따라 했다.

“석맹모, 택인처(昔孟母, 擇鄰處,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 환경을 골라서 이사하셨다). 자, 자불학(子不學), 단… 단…….”

또 계척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싸늘한 야홍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기저(斷機杼).”

“단기저.”

능묵은 다시 따라 했다.

“두, 두연산, 유의방(竇燕山, 有義方, 연산의 두우균은 훈육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없이 소년을 지켜보았다.

능묵은 계속해서 더듬거리며 삼자경을 외웠다. 가끔 막히는 데가 있긴 했지만 결국 힘들게 외우기를 마쳤다.

마지막 ‘제어장, 의선지(弟於長, 宐先知,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마당이 먼저 알아야 하는 일이다)’까지 외웠을 때, 그의 손바닥은 이미 볼품없이 부어오른 상태였다.

그는 속으로 차라리 야홍릉이 계편으로 등을 때리기를 바랐다. 그편이 손바닥을 맞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렇게 청을 올리지 못했다.

지금 준수한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반은 고통 때문이고 반은 긴장되어서였다. 그의 모습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이 열 구절을 스무 번씩 베껴 쓰거라.”

야홍릉은 다시 원래의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검사하겠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나친 아픔과 긴장감에 능묵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는 이미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시간을 짐작해 보았다.

자신이 절대 야홍릉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무 번을 베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글 쓰는 속도에 퉁퉁 부은 손까지 더하면 아무리 빨라도 방금 열 구절을 정해진 시간 안에 스무 번은 쓸 수 없었다.

그는 야홍릉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내내 자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능묵은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긴장한 탓에 떨리고 있었다.

“주, 주인님께서 언제 취침하십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소년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며 온몸의 피가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다 쓰고 난 뒤에.”

능묵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글을 쓰러 갔다.

야홍릉은 비단 탑에 기대앉은 뒤, 조용하게 책상 앞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나도 어지간히 할 일도 없나 보군. 어영위에게 이렇게 열심히 글을 가르치고 말이야. 스승을 모셔 줘도 되었을 텐데. 그런데 이 아이의 신분으로는…….’

야홍릉은 말없이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한경백이 저택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가 이 직책을 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고 집사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궁에서 사람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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