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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6)화 (2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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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색다른 따스함

손에 매를 맞는 바람에 깨끗하던 종이에 먹이 튀어 얼룩이 가고 말았다.

그러나 야홍릉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능묵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으나 이런 대답으로 주인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말을 바꿨다.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습니다. 주인님께서 벌하여 주십시오.”

“왜 집중력이 흐트러졌지?”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전…… 주인님께서 저한테 직접 글을 가르쳐 주실 줄 몰랐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한 대답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능묵을 일어서서 흰 종이에 튄 먹을 보고 전혀 망설임 없이 종이를 꺼내 한쪽에 놓은 뒤, 다시 깨끗한 종이를 폈다.

하얀 손등에는 붉은 생채기가 올라왔지만, 그는 고통을 전혀 못 느끼는 얼굴로 열심히 서첩을 베끼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붓을 잡는 그의 자세는 아주 정확했다. 글 한 획, 한 획에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어제의 벌이 효과를 본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가 글을 쓰게 내버려 둔 뒤, 돌아서서 책장으로 갔다. 그녀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병풍 앞의 미인탑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각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향기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서각 안은 아주 조용했다.

창밖에서 햇살이 들어와 여인의 차가운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은 햇살 속에서 더욱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시간이 빠른 속도로 흘렀다.

능묵은 두 손으로 자신이 쓴 서첩을 가져와 야홍릉에게 보여주었다.

글씨체는 정연했으나 여전히 딱딱하여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틀린 곳 없이 정확했다.

야홍릉은 손을 뻗어 하얀색 종이에 세 글자를 썼다.

“이건 내 이름, 야홍릉이다.”

그녀가 말했다. 능묵의 시선은 세 글자에 닿았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 세 글자를 말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았다.

‘능(綾)’은 자신의 이름의 글자와 같았기에 알 수 있었다.

다른 두 글자를 묵묵히 마음속으로 외웠다.

‘이것이 바로 주인님의 이름이구나. 야, 홍, 릉.’

“이 글자는 호국 공주라 읽는다. 내 봉호지.”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은 그 글자를 속으로 기억했다.

“마지막 세 글자는 어영위, 네 신분이다.”

야홍릉은 이 서첩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지금부터 이 글자들을 서른 번씩 쓰며 외우거라.”

능묵은 붓을 내려놓고 서첩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호국 공주, 야홍릉. 어영위, 능묵.’

소년 영위는 신은전으로 들어가서 훈련을 받으며 갖은 고생을 하고 모진 벌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글을 어떻게 익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의 기억 속에는 오직 끊임없이 무술을 연마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강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신은전에서 나온 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없는 임무와 엄벌이 아니라 글을 익힐 기회일 줄 몰랐다.

이런 기분은 아주 낯설었다. 낯설어서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차가운 주인이 그에게 가져다준 느낌은 무정함이 아니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스함이었다.

그래, 따스함이다.

차가운 살기만 있는 신은전과 비교했을 때, 싸늘하나 살기가 없고 호통과 엄벌이 없는 대화방식은 그에게 색다른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들은 하루의 반을 서각에서 보냈다.

야홍릉은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다. 서각에는 책과 먹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책을 한참 본 그녀는 눈이 피로하여 손으로 비빈 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때, 밖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고 집사의 공손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진양왕비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은 눈을 뜨고 담담하게 말했다.

“침향사(沈香榭)에 데려가 차를 올리라.”

“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글을 쓰고 능묵을 바라보며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나가 볼 테니 넌 따라올 것 없이 여기서 글을 쓰고 있거라.”

능묵은 붓을 내려놓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야홍릉이 나가자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의 글씨는 세 살 어린애와 다른 점이 없었다. 써야 할 글은 많지 않았지만 글자 쓰는 속도가 아주 느렸다. 그래서 몇 글자 아닌 단어에도 서른 번을 쓰려면 시간이 꽤 필요했다.

그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 그런지 붓을 잡는 힘을 잘 통제할 수 있어 글씨가 예쁘지 않았지만 힘찬 기운을 풍겼다.

야홍릉은 떠나면서 서각의 약간 남은 한기를 다 가져갔다.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소년은 홀로 책상 앞에 남아 자신이 쓴 글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야 붓을 들었다.

호국 공주부는 아주 조용하고 곳곳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저녁노을이 저택 전체를 감싸자 차가운 마당에 온기가 더해졌다.

침향사 화청(花廳)에 진양왕비가 홀로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시녀가 그녀에게 차를 따라 주자 그녀는 예의 바르게 고맙다고 하고는 다시 시선을 물속에서 노니는 잉어에게 돌렸다.

야홍릉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호국 공주는 더욱 어여쁘게 돋보였다.

진양왕비는 일어서며 몸을 살짝 굽혔다.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올리지 않으셔도 되네.”

야홍릉은 앞으로 다가가 앉고는 시녀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 그리고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진양왕비인 진설군은 또 무릎을 굽히고 예를 올렸다.

“제가 저희 대인을 대신해 공주 전하께 사죄하러 왔어요. 공주 전하께서 오늘 도화산에서 억울함을 당하신 일로 사죄드립니다.”

‘억울함을 당했다고?’

야홍릉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네, 이건 진양왕과 상관이 없는 일이니, 그대가 사죄할 필요가 없어.”

“대인은 오늘 일로 공주 전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실까 걱정하세요…….”

야홍릉은 호수를 바라보며 여전히 잔잔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쁠 건 없네.”

진양왕비는 말문이 막혔다.

호국 공주의 선 긋는 말에 온화하고 붙임성 좋은 진설군도 말을 잇기 힘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대인이 공주 전하께 여쭈라고 한 게 있어요.”

“뭔가?”

진양왕비는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화청에 있던 여덟 명의 시녀들이 동시에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진양왕비는 앞으로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약 앞으로 폐하께서 저희 대인을 쓰겠다고 부르신다면 응해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 여쭈라 하셨어요.”

‘그를 쓴다고?’

야홍릉은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곧바로 진양왕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지금 3황자 야소숙은 전쟁터에 있었다. 아직 전쟁터에서 소식이 전해온 건 없지만 변방의 전쟁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야소숙의 능력으로 절대 야홍릉처럼 눈부신 성적을 따낼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 만이족과의 전쟁에서도 누가 이길 것인지 당분간 알 수 없었다.

3황자가 만이족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면 황제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지금 쓸 만한 무장은 야홍릉을 제외하면 진양왕 육연지가 가장 적합했다.

육연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황제가 그를 전쟁터로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병권은 당장이야 위협이 되지 않긴 했지만 황제는 자신과 성이 다른 진양왕이 계속 지금의 지위를 이어가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다면 겨우 조용해진 진양왕부가 다시 강해질 것이다. 이는 황제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래서 야홍릉이 칼에 찔린 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바로 3황자를 추천한 것이다.

대신들은 모두 황제의 그런 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오늘 야홍릉은 병부까지 바쳤지 않던가.

진양왕은 야홍릉이 병부를 바친 의도를 잘 알고 있었으나 호국 공주의 다음 계획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병권을 바치고 조용히 지내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갈 것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만약 그녀가 도로 병권을 가져갈 생각이 있다면 진양왕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도록 핑계를 마련해야 했다.

그렇다면 변방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 무장의 지원이 필요할 때, 호국 공주는 둘도 없는 후보로 거론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병권도 자연스럽게 다시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진양왕은 지금 나한테 호의를 보인 건가?”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평온한 시선으로 진양왕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물어보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진양왕비는 당황했다.

“그…….”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네. 야소숙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만이족과 붙었을 때 패패하지는 않을 것이네. 물론, 이긴다고 해도 실력이 월등히 강한 것은 아닐 걸세.”

잠깐 말을 멈췄던 야홍릉은 이었다.

“내가 병부를 바친 것은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게.”

진양왕비는 여인이라 조정과 전쟁에 관해 잘 알지 못했다.

말 속에 담긴 복잡한 이해관계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국 공주의 마지막 말을 들은 그녀는 야홍릉이 처음부터 그들을 비꼬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질문은 질문일 뿐이었다. 그저 아주 평온하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깊은 의도를 숨기고 있지 않았다.

진양왕비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육연지가 왜 그녀를 야홍릉에게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호국 공주는 성미가 차갑고 말도 직설적으로 하지만 교활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하려고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빙빙 돌리거나 의도적으로 뭔가를 숨기지 않았고, 하고 싶지 않은 얘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날 대하실 때도…….’

진양왕비는 야홍릉이 여인을 대할 때는 좀 너그럽다는 착각이 들었다.

오늘 오전 도화산에서 4황자를 대하던 야홍릉의 태도는 이처럼 온화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미움받을 짓을 한 게 없거나 말할 때 공주 전하의 화를 돋운 적이 없어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진설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처음 호국 공주부에 들어온 것이고 또 처음으로 야홍릉과 단둘이 대화를 나눈 것이라 아직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육연지가 물어보라고 한 질문을 했고 야홍릉의 직접적인 대답에 가까운 말을 들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화청은 곧 조용함을 회복했다. 야홍릉은 홀로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생각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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