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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5)화 (2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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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손평은 직접 8공주를 봉양전에 데려가서 황제의 뜻을 전했다.

야자릉이 감금당한 소식은 순식간에 후궁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황후는 깜짝 놀랐다. 후궁의 다른 비빈들도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곧이어 각 궁에서 심복 궁녀를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낸 탓에 소식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궁의 분위기가 아주 엄숙했기 때문이었다. 비빈들은 알아본 정보를 이리저리 붙여 대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순식간에 조정과 민간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궁에 어떤 피바람이 불든 야홍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는 싸늘함만이 남아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홀로 창문 앞에 서서 밖의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는 그녀의 꼿꼿하고 마른 몸집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전하.”

영영은 방으로 들어와 무릎 한쪽을 꿇은 뒤, 들은 소식을 보고했다.

“폐하께서 방금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8공주는 봉양전에 감금하고 누구도 만나지 말라고 하셨고 한 어사와 장남 한령은 파직당했습니다. 더불어 형부에게 한옥금이 공주 전하를 찌른 일에 대해 심문하라고 하셨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후 쪽의 움직임은 어떻더냐?”

“8공주가 감금당한 뒤, 황후는 화를 내며 폐하를 찾아갔으나 거절당했고 지금은 태후의 궁에 있습니다.”

영영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도화산에서 일어난 일은 6황자의 소행이었습니다. 황후가 그에게 ‘술과 함께 먹으면 진심을 얘기하는’ 약을 줬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도화연에서 한옥금을 모함한 일을 자백하라는 의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술을 8공주가 마신 거지요. 6황자는 또 다른 약도 준비했습니다. 측군(側君, 공주의 측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 사람들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하려는 의도인 듯했으나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영영은 보고를 마친 뒤,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야홍릉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고 다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영은 조용히 물러났다.

“전하.”

첨향이 차를 타서 가져오며 보고했다.

“한 측군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들라 하라.”

“네.”

한경백이 들어왔다. 너른 소매가 달린 옷을 입은 그는 우아한 기품을 풍겼다.

“전하.”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리는 자세마저도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야홍릉은 돌아서서 느긋하게 옆에 있는 탑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찻잔을 든 뒤,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마셨다.

“앉지.”

그녀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한경백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어난 일들은 전하께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됩니까?”

‘영향이라고?’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담담한 시선으로 물었다.

“뭘 말하는 것이냐? 병부(兵符)를 뜻하느냐?”

“병부와 한옥금 심문에 대한 일입니다.”

“병부는 아무 의미 없는 죽은 물건이다. 내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은 병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은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른단다.”

야홍릉의 말투는 아주 담담하여 자부심이나 거만한 자세를 읽을 수 없었다.

마치 평범한 일들을 얘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한옥금은…….”

그녀의 입가에 조롱 어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고귀한 공주고 그는 세력이 약해진 가문의 적자에 불과하다. 네가 보기에는 심문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한경백은 침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실이 무엇인지 이미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가 뭘 믿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형부상서 정창(丁昌)에게는 여식이 있었다. 올해 열다섯 살로 혼담이 오갈 나이가 되었다.

정창은 한씨 가문의 장남 한령이 마음에 들어 중매꾼을 보내 혼인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한령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 혼사를 거절했었다.

이 일로 정씨 가문과 한씨 가문은 사이가 껄끄러워졌었다.

정창은 원래도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한씨 가문의 소행에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한씨 가문은 황족의 친척이라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씨 가문의 세력이 약해지고 한옥금이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온갖 형벌을 다 사용해 모질게 고문할 계획이었다.

고문에 못 이긴 한옥금은 곧 실토하지 않고 못 버틸 것이 뻔했다.

그래서 최후의 심문 결과는 야홍릉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한옥금의 사건을 뒤집을 거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한씨 가문의 편을 드는 것은 호국 공주와 맞서는 것인데 문관과 무장들 중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한옥금의 편을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또 누군들 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오늘 도화산에서 있을 일을 전하께서는 미리 아셨습니까?”

한경백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6황자와 8공주가 전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것 말입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날 함정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둘뿐만이 아니다. 누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 봐야지.”

“8공주가…….”

한경백은 잠깐 망설였다.

“사람들 앞에서 한 얘기들은 전하께 모두 아주 불리한 것들입니다. 오늘 폐하께서 화가 나셨기에 8공주를 벌하시긴 했지만 나중에 흥분이 가라앉으시면 의심이 들 겁니다.”

“한경백.”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깊고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자릉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한 거지?”

한경백은 눈빛이 흔들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난 상처가 다 낫기 전에 천뢰에 한 번 다녀왔었지. 그곳에서 난 한옥금에게 장차 대권을 손에 넣겠다고 말했어.”

야홍릉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야자릉도 천뢰에 다녀왔어.”

한경백은 깜짝 놀랐다가 서서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야자릉은 자신이 알게 된 걸 분명 황후에게 전했을 테고.”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야소숙과 틀어졌으니 황후도 날 적으로 돌렸겠지. 황후가 한옥금을 빼내는 게 목적이었든, 야소숙의 황위를 걱정한 것이든 막론하고 어떻게든 나를 해치려고 함정을 팠겠지.”

그래서 오늘 도화산에서 일어난 일은 야홍릉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황후의 수를 이용해 황후에 대적한 것이다.

황후는 돌을 들어 제 발을 내리친 격이었다.

이번 일은 야홍릉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면 장애물 중에서 가장 쉽게 대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황후와 그녀의 아들딸이었다.

그들은 야홍릉의 직접적인 원수이기에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했다.

‘한씨 가문이 파멸한 뒤에는……’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생각을 숨겼다.

그녀는 초록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찻잔을 입가에 대고 천천히 들이켰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급할 필요가 없었다.

한 걸음씩 천천히 가면 되었다.

“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한경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기 전에 폐하에서 이미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고자질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다. 나가 보아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경백은 자리를 떴다.

침전은 다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묵.”

흑의 소년이 순식간에 나타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야홍릉은 그를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한, 툭하면 무릎을 꿇는 버릇부터 고쳐라.”

능묵이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꼼짝하지도 않고 있었다.

“신은전의 대교습을 본 적이 있느냐?”

능묵이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그에 대해 잘 아느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대교습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저 무공이 강하다는 것만 압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모릅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공손하고 평온할 뿐,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았다.

“대교습은 무공을 전수하고, 영위를 훈련시켰습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만약 그가 지금 너에게 뭔가를 하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그리 할 것이냐?”

“대교습은 제게 뭔가를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영위는 신은전을 나간 뒤, 주인을 만나게 되면 오직 주인 한 사람의 말만 따를 뿐이다.

다른 주인은 모시지 않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연탑에 기대어 앉아 도화산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표정은 저도 모르게 차가워졌다.

그녀는 짐짓 신비한 척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호기심 때문에 뭔가를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네 이름을 써보거라.”

갑작스러운 명령은 능묵은 흠칫 놀랐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말을 마친 그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 붓을 들고 먹을 묻혔다. 그리고 깨끗한 종이에 ‘능묵’ 두 글자를 썼다.

글씨체가 아직도 어색했으나 최대한 깨끗하고 또박또박 쓰려고 애쓴 티가 났다.

그의 글자를 본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통과한 셈이었다.

“나와 같이 서각(書閣)으로 가자꾸나.”

야홍릉은 일어서서 분부한 뒤, 침전 밖으로 걸어갔다.

능묵도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서각에 들어서자 종이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 야홍릉의 차가운 성격과 아주 어울리는 곳이었다.

일 열로 쫙 세워진 홍목 책장에는 각종 서적이 가득 꽂혀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분류를 잘한 것이었다.

야홍릉은 책장 앞으로 걸어가 그다지 새것 같지 않지만 온전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걸어오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임무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글을 익히거라.”

능묵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글을 익히라고?’

“이리 오너라.”

야홍릉은 책상 앞에 선 채,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책상 끝에서 자첩(字帖, 습자본)을 가져오더니 말했다.

“먼저 이 서첩을 한 번 베끼거라. 그리고 글을 가르쳐 주겠다.”

소년의 앳된 얼굴에 당황함이 나타났다. 그는 공주가 영위에게 직접 글을 가르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줄 몰랐다.

주인의 뜻을 따라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는 공주의 지시대로 종이를 꺼내 책상에 폈다.

그리고 진척(鎭尺, 문진)으로 누른 뒤, 붓을 들고 먹을 묻혀 서첩의 글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능묵은 복잡한 마음으로 어정쩡하게 야홍릉의 곁에 서 있었다.

영위의 규칙은 주인과 평등하게 지내면 아니 되었다. 대다수 경우에 그들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주인의 옆에 가까이 붙어 서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들의 거리는 야홍릉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향기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능묵은 당황스러웠다.

규칙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난 행위에 그는 저도 모르게 다른 생각이 들었다.

팍!

손에서 극심한 고통이 전해지자 그는 어지러운 마음을 단번에 다잡을 수 있었다.

능묵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의 손에 들린 진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키운 반응은 이성보다 빨랐다. 능묵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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