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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4)화 (2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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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더 할 말이 있는가?

“부황.”

야경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덟째는 그동안 줄곧 한씨 가문의 2공자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술을 마셔서 충동적으로 그런…….”

“그 입 다물어라!”

쾅!

황제는 책상을 호되게 내려쳤다. 황제의 분노에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한옥금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옥금이 홍릉이를 죽이려고 한 일도 아직 벌을 주지 않았거늘, 그래도 불만인 것이냐? 내가 그를 죽인다면 너희들은 이 아비조차 죽일 수 있겠구나!”

그의 말에 야경함은 겁에 질린 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부황,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황제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의 울화를 가라앉혔다.

“둘째야.”

황제는 야모침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야모침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진양왕의 말이 사실입니다. 전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야정연을 바라보았다.

“넷째야, 너는 없느냐?”

“부황께 아룁니다. 저도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야정연의 말투는 평온했다.

“진양왕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릉이가…… 오늘 좀 이상했습니다.”

이상한 게 맞았다.

황제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어두웠다.

야자릉은 황제와 황후의 적공주로 평소에는 항상 품위를 지켰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적공주의 우아한 기품을 잃은 적이 없었다.

오늘 도화산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경백을 보고 한옥금이 떠올랐다고 해도 갑자기 망언을 퍼붓고 야홍릉에게 온갖 죄명을 뒤집어씌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내뱉었다.

수많은 사람이 직접 들은 일이니,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이번 일은 야홍릉에게 반드시 해명해야 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능멸, 그것도 황위를 노린다고 하는 죄명은 절대 쉽게 내뱉어서 되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야자릉은 야홍릉이 바람기가 있다고 해도 되고 한옥금을 해쳤다고 해도 큰일은 아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녀가 한옥금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이라고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위를 노린다고 한 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야홍릉은 황자가 아닌 공주였다. 병권을 가지고 있고 무공이 뛰어나며 차가운 성격으로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으나 여태까지 그녀가 황위를 노리고 있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적공주인 야자릉은 이렇게 근거 없이 언니를 모함해서는 안 되었다.

‘자릉이가 이성을 잃은 이유가 뭘까?’

“홍릉아.”

황제는 고개를 돌리고 옆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짐은 네 의중이 궁금하구나.”

이 말이 나오자 대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했다.

“어떻게 하실지는 부황의 일이니 전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자릉이의 발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황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냐? 해보거라.”

“한옥금이 절 죽이려고 한 이유입니다.”

야홍릉의 시선은 그 누구도 아닌 대전 안의 병풍에 고정되었다.

예쁜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한옥금이 좋아하는 사람은 제가 아닌 야자릉이었습니다. 그가 저한테 접근한 건 제가 가지고 있는 병권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뭐라고?’

황제는 경악했다.

야자릉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언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넌 조용히 하거라!”

황제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가 너더러 말을 하라고 했느냐?”

야자릉은 흠칫 놀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황제의 반응에 겁을 먹었다.

“저는 그를 위해 전쟁터로 나갔고 전쟁을 치르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제가 셋째 황형을 도울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혼사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비수로 제 가슴을 찌른 것 같습니다.”

야홍릉의 평온한 말투에 사람들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를 찌르기 전에 3황자가 제 병권을 손에 넣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3황자가 전쟁터에 나가 직접 병권을 손에 넣을 기회를 주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야자릉이 입을 열었다.

“부황, 언니가 말한 건 사실이 아니에요. 부황께서 부디 현명한 판단을…….”

황제는 책상 위의 찻잔을 들고 그녀의 앞에 던졌다.

“조용하라고 했던 말을 못 들었느냐!”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귀를 찌르는 소리가 울렸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야자릉은 겁에 질린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여쁜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고 두려움이 발끝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부황께서는 믿으셔도 되고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을 한 뒤,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제가 방금 공주부에 가서 가져온 호부(虎符)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호부를 황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현갑군의 병부입니다. 부황께서 도로 가져가십시오. 전 여인의 몸이니 전쟁터에 나가거나 조정에 서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황위를 노린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만약 부황께서 그런 말들을 믿으신다면 절 죽여 주시고 믿지 않으신다면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덤덤한 목소리에 예도 정식으로 올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앞에 있는 황제를 딱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황송한 모습도 공손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족의 7공주 야홍릉이 천성적으로 차가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을 시작하고 걸음마를 떼기 시작해서 그녀는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일부러 사람들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천성적인 성격이 그랬다.

황제 또한 그런 그녀의 성격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이 하면 무례한 행동을 그녀가 했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늘 그녀는 오랜만에 말을 길게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싸늘하고 차가운 말투였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짙은 피곤함과 서글픔을 느꼈다.

‘차가운 사람이 저런 말을 할 때면 어떤 기분일까?’

3년간 쏟아부은 사랑이 이런 잔혹한 진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직접 비수를 가슴에 박아 넣기까지 했다. 단지 3황자에게 전쟁터에 나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녀는 이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진실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듯했다.

자신이 했던 사랑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의 상처를 헤집고 소금까지 뿌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황위를 노린다는 죄명까지 뒤집어씌우며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대전에 있는 다른 이들은 야홍릉의 기분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것이 바로 황족에서 태어난 자의 슬픔이라고.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사랑한 자의 슬픔이라고.

대전은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은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밖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자존심과 자부심을 애써 지키려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말없이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황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전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야자릉은 멍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핏기가 없었다. 문득 자신이 끝장났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부황이 그녀더러 말을 하라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야홍릉의 이번 수는 아주 독했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야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이 기회에 저런 말을 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한옥금의 매정함을 탓하며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사실 원인을 3황자에게 돌렸다.

마지막에는 일부러 병권까지 내놓아 황제의 의심을 완벽하게 없앴다.

야자릉이 도화산에서 한 말이 황제의 마음속에 의심의 종자를 심은 것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고 호부를 내놓은 그녀의 행위는 아직 싹을 피우지 않은 종자를 완벽하게 제거한 셈이었다.

그와 동시에 한씨 가문과 3황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야자릉은 이를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야홍릉, 아주 무시무시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구나. 정말 너무너무 지독해. 다른 사람에게도 독하더니 자신에게는 더 독하잖아!’

야자릉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야정연과 육연지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국 공주의 꿍꿍이는 아주 무시무시하군, 방법도 독하고.’

야자릉이 오늘 한 말은 이성을 잃고 한 말이지만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한옥금이 정말로 야홍릉을 찔렀는지 아닌지를 먼저 내버려 두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한옥금은 천뢰에 들어갔고 야홍릉은 침대에서 한 달간 요양했다.

상처가 치유된 다음 야홍릉은 천뢰에 갔다.

그때 한옥금과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녀만 알 것이다.

야자릉도 천뢰에 간 뒤, 한옥금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마찬가지로 그들만 알 것이다.

오늘 도화산에서 야홍릉은 월경이 왔다는 이유로 과일 술을 거절했다.

그 이유가 아마도 야자릉이 이성을 잃은 원인이 될 것이다.

화가 난 야홍릉은 채찍으로 야자릉을 때렸고 그 일이 황제가 알게 되기까지 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야홍릉은 변명하지도 않고, 억울함을 토로하지도 않고 오직 한옥금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만 말했다.

그리고 무덤덤한 몇 마디로 한옥금과 3황자를 함께 사지로 몰아넣었다.

황제가 그녀를 의심하기 전에 야홍릉은 망설이지 않고 호부를 내놓아 의심이 종자가 싹을 피우기 전에 자르고 말았다.

8공주가 오늘 한 행동이 7공주를 해치려고 일부러 한 것이든, 아니면 일시적인 충동을 못 이기고 한 행동이든, 그녀의 실수 때문에 한씨 가문과 3황자는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다.

한 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끝까지 잘못되는 법이다.

일이 잘못된 뒤에 상황을 뒤집는 것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려운 법이었다.

이제 한씨 가문은 끝장나게 되었다.

“손평!”

황제가 높은 소리로 외쳤다.

손평은 급히 몸을 돌리고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말을 전하라. 오늘부터 8공주를 봉양전에 감금하고 내 허락이 없는 한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야자릉은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며 절규했다.

“부황!”

황제는 못 들은 척,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한옥금은 호국 공주를 살해하려고 한 죄가 있으니, 형부의 심문을 받게 하라. 더하여 한 어사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죄가 있으니 관직을 파하고 오늘부터 집에서 반성하게 하거라!”

황제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또한 한령의 금군 통령직을 파하고, 좌부통령인 한묵(韓墨)을 정통령으로 승진시키거라.”

황제의 말을 들은 야자릉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끝났어. 다 끝났어!’

손평은 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황후께서 8공주를 뵙고 싶어 하신다면…….”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냐?”

황제가 화를 냈다.

“누구도 만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황후도 당연히 포함이다!”

손평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 사건과 무관한 인간들은 모두 나가거라!”

황제는 책상 위의 상주서를 들고 밖으로 내던졌다.

“다 썩 나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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