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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3)화 (2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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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죄를 묻다

야홍릉은 마차에 오른 뒤, 말없이 비단 탑에 기대앉았다.

그녀의 표정은 늘 그렇듯 싸늘하고 무덤덤했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이 냇가에서 화를 낼 때의 살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일은 6황자와 8공주가 전하를 해치려고 한 겁니까?”

한경백은 야홍릉에게 차를 건네며 물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한경백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가는 내내 침묵했다.

* * *

야자릉은 순조롭게 태의원에 가지 못했다. 심지어 공주전에 갈 기회조차 없었다.

마차가 선성문(宣成門) 앞에 도착했을 때, 손평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6황자가 직접 마차를 운전하는 것을 보고 손평은 깜짝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6황자를 뵙습니다.”

“손 총관.”

야경함은 마차에서 내린 뒤,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덟째가 다쳐서 봉양전(鳳陽殿)으로 데려가 태의를 부를까 한다네.”

“6황자께 아룁니다. 그건 안될 듯합니다.”

손평은 웃으며 말했지만 말투가 아주 단호하였다.

“폐하께서는 물을 말이 있으니 모든 황자와 공주들은 반드시 치원전(致遠殿)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야경함은 속으로 흠칫 놀랐으나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여덟째가 다쳐서 지금 쓰러진 상태인데…….”

“폐하께서 8공주의 마차는 바로 궁 문까지 들어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치원전 바깥 계단 앞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손평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6황자께서는 지시를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폐하의 말씀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야경함은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부황께서 그리 말씀하셨는데 자식으로서 따라야지. 지금 바로 여덟째를 데리고 부황을 뵈러 가겠네.”

손평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치원전으로 향했다.

마차의 비단 탑에 기대어 있던 야자릉은 마차 밖에서 들리는 말을 듣고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잠겼다.

꽃이 피는 따스한 봄이라 공기 중에는 옅은 꽃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치원전 밖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황제의 안색이 너무 어두워 치원전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때, 손평이 치원전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보고했다.

“폐하, 6황자와 8공주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오라고 하거라.”

6황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전하, 폐하께서 6황자와 8공주께서 지금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손평이 말을 전했다.

6황자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마차의 문발을 젖힌 뒤, 짐짓 야자릉을 깨우는 척했다.

“자릉아, 일어나거라.”

손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야자릉은 눈을 뜨고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자릉아, 부황께서 지금 우리더러 들어오라고 하셨어.”

야자릉은 시선을 들고 초조한 눈빛으로 야경함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죠? 먼저 태후마마나 어마마마께 알릴 방법은 없나요?’

야경함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모두 부황의 사람인데 누가 감히 몰래 나가서 말을 전하겠어?’

야자릉은 이를 악물고 아픈 몸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정말로 아팠다. 야홍릉의 손이 얼마나 매운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탑에서 일어나다가 상처에 힘이 실리자 공주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을 거야. 적어도 지금 화가 잔뜩 난 폐하께는 통하지 않겠지.’

손평이 생각했다.

야자릉이 마차에서 내려왔을 때, 다른 두 황자와 호국 공주, 진양왕 부부도 궁에 도착했다.

손평이 다시 들어가 보고를 올렸다.

“모두 들어오라고 하거라.”

“네.”

손평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온 뒤, 황제의 뜻을 전했다.

“모두 들어오십시오.”

야자릉은 부축을 받으며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를 한 그녀는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빨개지며 큰 서러움이라도 겪은 듯, 입을 열었다.

“부황…….”

“무릎 꿇지 못하겠느냐!”

황제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야자릉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서 겁먹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부황…….”

그녀가 고개를 드는 바람에 목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 그리고 퍼렇게 멍든 다섯 개의 손가락 흔적도 보였다. 그녀의 목을 조인 사람이 전혀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정말 살심을 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야자릉이 아니었다면 진작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독한 흔적이었다.

황제는 흠칫 놀랐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야홍릉을 힐끗 보았으나, 곧 다시 화난 눈으로 야자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3황자와 진양왕 부부는 모두 큰절을 올렸다.

오직 야홍릉만이 옆에서 가만히 선 채, 차가운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서럽고 울분이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

“손평, 다들 내보내거라.”

“네, 알겠습니다.”

손평은 대답한 뒤, 손을 들고서 궁인들을 내보냈다.

대전 내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황제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도화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누가 해명하겠느냐?”

“폐하께 아룁니다.”

진양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도화산의 연회를 개최하였으니, 제가 모든 일을 책임지겠습니다.”

“제대로 고하라!”

“8공주께서 말 실수를 하시어 호국 공주께서 설움을 당하셨습니다.”

육연지는 아주 완곡하게 상황을 고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분명 자초지종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밀고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황제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면 이렇게 화를 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야홍릉의 역성을 들 필요가 없었다. 완곡하게 표현할수록 황제의 화를 돋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황제가 불같이 화를 냈다.

“설움을 좀 당했다고? 그게 그저 조금 당한 정도더냐? 역모를 꾀하고 황위를 노린다는 죄명이 아무렇게나 뒤집어써도 되는 일이냔 말이다! 조금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가는 억울함이 어찌 설움을 조금 당했다 할 수 있느냐? 세상에 이런 설움이 어디 있다고!”

야경함은 흠칫 놀랐다. 그는 황제의 호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야자릉도 겁먹은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황제의 반응을 본 사람들은 황제가 야홍릉을 감싸며 8공주에게 죄를 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육연지는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도 8공주께서 과일 술 한 잔에 이성을 잃으실 줄 몰랐습니다. 8공주가 술을 마실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조심했을 것인데 제 실수입니다.”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곡수유상에 쓴 술은 어떤 술이냐? 독한 술이냐?”

“전하께 아룁니다. 곡수유상에 쓴 술은 제 안사람이 매실로 빚은 술인데 독하지 않습니다. 고씨 가문의 낭자도 마셨습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고 낭자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황제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은전의 대교습이 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한 뒤였다.

잠깐 침묵한 황제는 의자에 앉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진양왕, 곡수유상에서 벌어진 일을 낱낱이 고하라. 한 글자도 빠짐없이.”

육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7공주가 산에서 내려갔으나 그가 다시 사람을 보내 불러온 일부터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7공주를 초대했는데 7공주가 언짢은 기분으로 떠나게 할 수는 없어 시위를 보내 7공주와 2황자를 다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2황자?”

황제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야모침의 머리 위에 닿았다.

“7공주와 함께 산에서 내려간 것이냐?”

야모침은 입을 다문 채, 어두운 눈빛을 했다.

“네.”

육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전하께서 돌아오신 뒤, 저와 안사람은 곡수유상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8공주께서 먼저 7공주께 같이 앉자고 하셨고 7공주께서도 거절하지 않으셔서 두 분이 같이 앉게 되셨습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야자릉을 바라보았다.

육연지는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곡수유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시간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곡수유상을 두 번밖에 진행하지 않았는데 사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육연지가 한 마디 덧붙였다.

“곡수유상의 술은 제가 준비한 것입니다. 제 목숨에 맹세코, 술에 그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육연지의 말은 대교습이 그에게 보고한 것과 같았다. 덧붙인 것도 없고 일부러 누구의 역성을 들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객관적으로 이번 일을 서술한 것이다.

황제는 야자릉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노기가 담겨 있었다.

“자릉아, 도화산에서 했던 말들은 어떻게 된 거냐? 말하거라!”

“저는…… 저는…….”

야자릉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원래도 고통으로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저,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그때 머리 속이 복잡해서…….”

“복잡해?”

황제는 책상을 내리치며 시퍼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았다면 네 언니에게 단죄라도 했겠더구나. 도대체 누가 네 앞에서 이런 허튼소리를 하였기에 없는 죄명을 홍릉이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냐?”

야자릉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지금 바로 기절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난 몰라, 아무것도 몰라.’

지금까지도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꿈.

머릿속으로 산에서 했던 말이 또렷이 기억났다. 또 그 말을 들은 둘째 황형, 넷째 황형과 여섯째 황형 및 다른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그런 말들을 쏟아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그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이 어떻게 입 밖으로 나온 거지?’

술을 먹으면 진심을 얘기한다는 말이 있어도 이것은 너무 심했다.

그녀는 지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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