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야홍릉의 행동에 놀라 입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가 일어서던 데서 멈춰 있었다.
야홍릉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 휘둘렀기 때문이다. 검은색 물체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야자릉은 하던 말을 멈추고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사람들은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야홍릉이 또 한 번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채찍은 뱀처럼 야자릉의 얇은 목을 감싸 그녀를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한 쌍의 손이 야자릉의 목에 닿았다.
“7공주 전하!”
“전하, 안 됩니다!”
“일곱째야!”
“홍릉아, 하지 말거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거의 동시에 입을 열어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고 했다.
현재 야자릉은 말을 아예 할 수 없게 되었다.
야홍릉의 채찍은 야자릉의 목을 감싸고 있었고 손 역시 야자릉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야자릉을 죽일 듯이 손에 힘을 주었다.
“읍…… 놔, 놔……!”
야자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일그러진 얼굴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방금 야홍릉이 휘두른 채찍에 야자릉은 옷이 찢어졌다. 옷에 가려진 피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목이 조여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진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처로 인한 고통도 밀려왔다.
“7공주!”
진양왕이 조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절대 충동적으로 굴면 안 됩니다.”
“7공주, 진정하십시오. 말로 합시다.”
야정연은 야홍릉의 앞으로 걸어가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일곱째야, 여덟째가 무슨 충격을 받았나 본데 그냥 넘어가자꾸나. 정 화가 나면 부황께 말씀드려서 처리하라고 하고.”
“그래, 홍릉아.”
야모침도 입을 열었다.
“자릉이가 한 말을 우리도 모두 들었다. 이번 일은 모두 여덟째가 잘못한 것이니 부황 앞에서도 할 얘기가 없을 거다. 하지만 오늘 여덟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너도 할 말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야홍릉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야자릉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야자릉, 죽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마.”
야자릉의 얼굴은 회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떼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놔…… 놔……!”
“홍릉아!”
야정연이 손을 뻗어 야홍릉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말투는 음침하고 차가웠다.
“이 정도면 됐다. 정말 자릉이를 죽이게 되면 황후께는 뭐라고 할 거냐?”
‘황후’라는 말에 야경함은 흠칫 놀랐다. 그는 야홍릉의 손을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홍릉아, 자릉이가 방금 술을 좀 먹은 데다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 것 같으니 너무 화내지 말자꾸나.”
야자릉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황후는 아경함을 죽여버릴 것이다.
술을 좀 먹어서?
이 핑계는 도저히 통하지 못할 것이다.
과일 술 한 잔으로 사람이 헛소리할 정도로 취한다는 말인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자릉의 목을 조이는 그녀의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3공자.”
한기는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7공주를 좀 타일러 보시게. 정말 사람이 죽는다면 아주 큰 일이 날 것이니.”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한경백의 얼굴에 닿았다.
‘그래, 왜 저 사람을 잊고 있었지?’
“한경백.”
야정연은 고개를 돌리고 조용한 한씨 가문의 서자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홍릉이를 설득해라.”
이 말은 명령 같았으나 말투가 명령보다는 좀 약했다.
한경백의 체면을 충분히 헤아린 듯했다.
물론, 그도 야홍릉의 체면을 감안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경백에게 향했다.
한경백은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을 등에 업은 채, 야홍릉의 앞으로 걸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곧바로 이어서 했다.
“8공주께서는 이렇게 전하를 능멸해서도, 말도 안 되는 말로 모함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8공주는 신분이 존귀하여 잘못을 저질러도 폐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겁니다. 전하께서 이 일로 8공주께 해를 끼치게 된다면 폐하 앞에서도 하실 말씀이 없을 것 아닙니까?”
야자릉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로 버둥거렸다.
야홍릉의 힘은 딱 적정선을 지켰다. 야자릉이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하면서도 약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확보해 주었다.
그래서 야자릉이 바로 질식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경백의 말이 끝나자 주변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고통에 찬 야자릉의 신음만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결국 야홍릉은 손을 내려놓고 야자릉의 목을 감쌌던 채찍을 풀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네가 한 말들!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겨우 자유를 되찾은 야자릉은 심하게 기침을 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는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고 있느라 야홍릉이 뭐라고 말하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똑똑히 듣고 말았다.
야홍릉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이번 일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장 야자릉의 목숨을 살려준다 해서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야홍릉은 처음부터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한경백의 말에 설득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 일로 자리에 있던 모든 공자와 소저들은 흥이 깨져 더 이상 곡수유상을 계속하지 못했다.
야모침과 야정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야정연은 화가 나 씩씩거렸다.
그는 원래도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홍릉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껏 시간을 내서 와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야자릉이 순간적으로 추태를 부리면서 한 말이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
야자릉의 말을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본 그는 그 말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공주가 황위를 넘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야홍릉이 공주인 것을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세력만으로는 이 야심을 뒷받침할 수 없었다. 외척의 지지가 없고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야홍릉이다.
내세울 것은 병권밖에 없는데 어떻게 황위를 쟁탈할 생각을 하겠는가?
야홍릉이 가지고 있는 병권은 계승 싸움을 벌이는 황자에게는 큰 조력이 될 수 있지만, 그녀가 황위로 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성적으로는 야자릉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야정연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확답을 찾기 전까지 그는 그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가장 급히 해야 할 것은 한옥금이 정말 야홍릉을 죽이려고 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구유(口諭, 황제의 구두 명령)를 아뢰오!”
말발굽 소리가 산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황제의 구유를 전하는 시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선왕, 정왕, 6황자, 7공주, 8공주와 진양왕 부부에게 지금 바로 황궁으로 들어와 알현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연회에 참가한 공자와 소저들은 성으로 돌아가시고, 지시를 기다리시지요!”
시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산의 공기마저 조용해졌다.
산을 내려 가던 공자와 소저, 마차 앞까지 걸어간 정왕과 선왕, 그리고 6황자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른 야자릉과 자신의 마치에 이미 앉은 야홍릉, 이제 막 발 하나를 마차에 올린 한기까지.
모두가 제자리에서 굳은 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황제의 구유를 전한 시위는 말을 마친 뒤, 말머리를 돌리고 떠나갔다.
마음이 복잡해진 사람들만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야모침은 무의식적으로 야홍릉의 마차를 돌아보았다. 야홍릉과 한경백이 그들보다 먼저 연회장을 떠나기는 했지만 이제 막 마차에 오른 상태라 아직 산을 내려가지는 않은 채였다.
‘부황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소식을 알게 된 거지?’
야정연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제가 도화산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궁으로 부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속도 또한 너무 빨랐다.
야홍릉이 아직 궁에 들어가기도 전이 아닌가?
‘누가 폐하께 산에서 일어난 일을 알린 거지?’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잠긴 채,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다들 수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들은 곧 각자의 마차에 앉아 말없이 황궁으로 들어갔다.
오늘 일이 그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황실의 일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목숨이 걸린 일이므로 누구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없었다.
“공주 전하!”
시녀의 초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8공주, 8공주 전하께서 쓰러지셨어요!”
야경함은 황제를 만났을 때,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시녀의 말을 들은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바로 입을 열었다.
“둘째, 넷째 황형, 제가 먼저 여덟째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 태의를 불러야겠습니다. 여덟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황후마마께서 얼마나 걱정이 크시겠습니까?”
야정연과 야모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가 다쳤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이번 일에 대해 추궁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황형이 반대하지 않자 야경함도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 앉은 뒤,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냇가에서 마신 술의 독성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에 야자릉은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물론, 쓰러졌다는 말은 가짜였다.
그러나 몸의 상처는 진짜였다. 그녀는 목의 상처가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까 있었던 일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이제 궁으로 들어가면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부황 쪽에는 뭐라고 해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먼저 황후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차가 멀어진 뒤에야 야경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릉아, 이따 부황을 만나면 어떡할 것이냐?”
‘어떡할 거냐고?’
야자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까 자신이 부렸던 추태를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부황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게 된 거죠?”
어쩌면 야홍릉이 진작 그 술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었고, 또는 경계심이 너무 강한 탓에 다른 사람이 건네주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버릇일 수도 있었다.
야자릉은 화가 났다. 이성을 잃은 자신에게 화가 났고 독한 야홍릉의 손길에 화가 났다.
“나도 몰라.”
야경함도 답답했다.
“야홍릉은 분명 우리 뒤에 있었어. 걔가 고자질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속도가 그렇게 빠를 리 없는데…….”
잠깐 멈췄던 야경함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부황께서 이 일로 우리를 부른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야자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차 안의 비단 탑(榻)에 몸을 기댄 채, 어두운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오늘 일은 제 실수예요.”
그녀는 음산한 얼굴로 이를 꼭 악물었다. 그리고 목에 난 상처를 살짝 만져 보았다.
순간, 그녀는 극심한 고통에 몸을 흠칫 떨었다.
“야홍릉, 난 이제 너와 절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어!”
그녀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