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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화 (2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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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취중 진담

야홍릉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월경을 핑계로 술을 거절했으니 그녀는 반박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야홍릉이 이미 몸이 안 좋다고 했으니 같은 핑계를 댈 수는 없지 않은가?

“왜 그래?”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과일 술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 말에 다른 사람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야자릉을 바라보았다.

‘그래, 과일 술일 뿐이잖아.’

이번에는 원래의 규칙을 적용하기 애매한 상황이 발생했다.

야자릉이 야홍릉을 끌어당겨 같이 앉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술잔이 마침 둘 사이에 멈춰 섰으니 자매가 함께 공조해서 완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한 사람은 시를 짓고.

그런데 7공주는 몸이 좋지 않아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호국 공주가 과일 술 한 잔 때문에 거짓말로 핑계를 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술을 마시거나 시를 짓는 역할을 바꾸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끈다는 말인가?”

“아, 아니요.”

야자릉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손을 뻗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엎지르려고 손을 떨었다.

“조심해.”

야홍릉이 담담한 얼굴로 일깨우며 술잔을 받쳐 주었다.

“쏟지 말고.”

야자릉은 입술을 깨문 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일깨워 주셔서 고마워요.”

야경함은 불안한 눈빛으로 야자릉이 든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많아 입을 열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술 한 잔 때문에 의심을 살 수는 없지 않나?

사실 야자릉의 유난을 떠는 바람에 예민한 사람들은 이미 뭔가를 눈치챘다.

정자의 진양왕 부부, 2황자 야모침, 4황자 야정연과 한기, 한경백은 모두 8공주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일 술 한 잔일 뿐인데 왜 저리 유난을 떨까?’

“마시기 힘들어?”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렸다.

야자릉은 심장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급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간 뒤, 뻣뻣한 모습으로 마셨다.

그녀는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괜찮아, 독이 든 것도 아니고. 취중진담을 한다고 해도…… 난 남이 알면 안 되는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는걸.’

이렇게 생각하니 야자릉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여덟째가 술을 마셨으니 일곱째가 시를 지어 보렴.”

야모침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여태까지 살면서 일곱째가 시를 짓는 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그 영광을 누리게 되네.”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제 측부는 문인이니 그더러 저를 대신해 지으라고 할게요.”

그러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한경백이 대신한다고? 그래도 되나?’

‘호국 공주가 그렇게 하라는데 안될 거야 없지. 얻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정부라 사람들 앞에서 사랑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가 봐. 아무리 성미가 차갑기로 소문난 호국 공주라도 다를 게 없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예전에 한옥금이 호국 공주에게서 받았던 대우를 떠올렸다.

호국 공주는 그를 아주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살뜰히 대했다. 애지중지 대한다는 말이 꼭 맞았다.

하지만 한옥금은 결국 그것을 누릴 복이 없었다.

한옥금이 은혜를 저버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경백이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잠깐 생각을 한 그는 입을 열었다.

“봄이 되어 꽃이 피었으니 전 이걸로 시를 짓겠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정자 안의 진양왕비는 세 번째 술잔을 준비하고 있었다.

야경함은 사고라도 생길까 야자릉의 상태를 주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경백이 시를 읊고 나자 몇몇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찬사와 감탄의 빛이 역력했다.

한씨 가문 서자는 정말 재주가 있었다.

일부러 실력을 감춘 듯했지만 한씨 가문의 적자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야자릉은 한경백의 온화한 얼굴을 본 순간, 뭔가에 자극받은 것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언니, 옥금 오라버니는 언니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 일은 언니가 옥금 오라버니를 모함하려고 계획한 거죠?”

그녀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냇가에 있는 수많은 시선이 모두 야자릉의 얼굴에 향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놀라움, 충격, 그리고 의심이 서려 있었다.

“여덟째야,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야경함은 안색이 변하더니 급히 그녀를 혼냈다.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고요?”

야자릉은 코웃음을 치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야홍릉을 노려보았다.

“옥금 오라버니가 직접 말해준 거예요. 일곱째 언니가 자신을 모함하려고 스스로 비수를 가슴에 찔러 넣었다고요. 그것뿐만 아니라 언니는 황위를 강탈하고 싶은 야심을……!”

“야자릉!”

야모침과 야정연이 동시에 외쳤다.

“조용히 해!”

야홍릉은 여전히 포단 위에 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기가 감돌고 있어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사나운 살기마저 느껴졌다.

“뭘 조용히 하라는 거예요? 제 말이 틀렸어요?”

야자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야홍릉을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렸다.

“절절하게 사랑하는 척하다가 옥금 오라버니를 가지고 놀더니 이제는 질리니까 모함해서 천뢰에 보내버리고.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한씨 가문의 서자를 공주부에 들여앉혀 방탕한 욕망을 채우다니. 야홍릉, 내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어?”

공기 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명문가 공자와 소저들은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겁에 질린 얼굴로 갑자기 추태를 벌이는 8공주를 바라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위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발이 천근만근이 되어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8공주, 자중하시오.”

진양왕 육연지가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의 말투는 점잖고 힘이 있었다.

“8공주께서 한씨 가문의 2공자 일로 7공주께 불만이 있다면 폐하께 가서 말씀을 드리십시오. 폐하께 이번 일을 완벽하게 조사해 달라 청을 드리시라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7공주께 이 무슨 결례입니까? 공주 전하를 모함한 것은 그렇다 쳐도 7공주가 한씨 가문 2공자를 모함하고 황위를 노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일입니다. 여기서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모함했다는 거예요? 제가 한 말은 사실이라고요!”

야자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옥금 오라버니가 직접 말했어요. 호국 공주가 황위를 노리고 있다고요!”

“허튼소리!”

“자릉아, 말하지 마.”

“자릉, 입 다물어!”

“한옥금이 직접 말했다고요?”

진양왕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그자는 7공주를 죽이려다 실패하여 황위를 노린다는 누명을 7공주께 씌우려고 했군요. 왜 7공주를 사지로 몰아넣는 겁니까? 7공주께서 3년 동안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기에 한옥금은 7공주를 이렇게 미워하며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까?”

육연지는 차갑게 냉소하며 말했다.

“혹시 7공주께서 누군가의 길을 막았기에 이렇게 7공주를 제거하지 못해서 안달인 겁니까?”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길을 막았다고? 누구의 길을 막았다는 거지?’

7공주가 칼에 찔린 사건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3황자가 전쟁터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3황자 야소숙은 황후의 적자이고 뒤로는 한씨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황위 계승 싸움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병권이었다.

야홍릉이 정말 한옥금과 혼인한다면 호국 공주가 그의 뒷배로 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절대 야홍릉과 한옥금이 혼인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까 8공주의 말끝마다 나온 ‘옥금 오라버니’라는 단어.

그리고 한사코 한옥금을 두둔하느라 7공주에게 바락바락 대든 8공주의 모습을 보니 둘은 평범한 사촌지간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한옥금이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야자릉이 아닐까? 7공주에게 잘해준 것은 7공주가 손에 쥔 병권이 탐나서였을 거야. 그런데 3년을 지내다 보니 폐하가 절대 둘을 허락하지 않을 걸 알게 된 거지. 그래서 아예 7공주를 죽이고 3황자가 전쟁터에 갈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한 거라면?’

사람들은 생각할수록 이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래서 곧바로 한옥금이 야자릉을 좋아하고, 그래서 야자릉과 3황자가 야홍릉에게 접근한 것이며, 결국 배신자 한옥금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 호국 공주를 찔렀다는 파란만장한 사랑 이야기와 권력 다툼 이야기를 상상했다.

병권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7공주가 황위를 노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사람들은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여인이 황제가 된 선례는 한 번도 없었다. 8공주가 다른 황자를 이렇게 모함했다면 파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7공주를 겨냥한 것은 그저 없는 구실을 만들어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구의 길을 막았는데요?”

야자릉이 코웃음을 쳤다.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옥금 오라버니가 너를 진심으로 대했는데 이런 식으로…….”

“야자릉!”

야모침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네가 계속 허튼소리를 한다면 부황께 고할 것이다!”

“허튼소리가 아니라고요!”

야자릉이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둘째 황형은 왜 이렇게 야홍릉 편만 드는 거예요? 야홍릉이 가진 병권이 탐나서 그래요? 꿈 깨요! 야홍릉은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인간인데 왜 오라버니를 지지하겠어요? 야홍릉은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거예요. 하하…… 당신들은 헛된 꿈을 꾸고 있어요! 다들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요! 셋째 황형만이 진정한 적자이고, 오직 그만이 황제가 될 자격이 있지! 당신들은 가당키나 해요?”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냇가에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던 소저들도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야자릉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품위 넘치고 말을 잘하던 공자들도 숨을 죽였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만 싶었다.

야경함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왕과 정왕, 진양왕 셋은 서리가 낀 듯 차가운 얼굴로 야자릉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가운데 야홍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여쁘나 싸늘한 얼굴에서는 늘 그렇듯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다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야자릉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비꼬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왜? 민망해서 화가…….”

팍!

“앗!”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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