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널 건드린다면 참지 말거라
한경백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한씨 가문과 심씨 가문을 함께 18층 지옥으로 보낼 기회가 있다면 가차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한기는 놀란 눈으로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난 서자라 출신이 비천하고 권력도 없소. 원한이 있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지. 원한을 품고 있지만 복수할 수도 없었고. 한씨 저택에서 매일 적모와 두 적형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소. 이십 년 동안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소.”
말을 하던 한경백은 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나에게 다른 길이 주어졌는데, 왜 권세에 빌붙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소?”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한기가 번뜩였다.
한기는 입을 꼭 닫았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잘 모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충성과 효도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면 그들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한옥금은 호국 공주와 3년간이나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비수로 공주의 가슴을 찌른 것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서자 출신인 한경백은 호국 공주에 의해 강제로 공주부에 들어갔다.
그가 진심으로 권세에 빌붙은 것이든, 감히 반항하지 못한 것이든.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원한이 가득하다면 권세에 빌붙는 것은 물론이고 사내로서, 심지어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존엄도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송구하오.”
한기가 입을 열었다.
“난…….”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한 공자가 미안해할 것은 없소.”
한기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정중하게 말했다.
“오늘 3공자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오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소. 3공자만 괜찮다면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소. 앞으로 도울 일이 있으면 말만 하시오.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오.”
‘친구로 지내자고?’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난 한 공자와 친구로 지낼 자격이 없소.”
“이렇게 뜻이 맞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데 무슨 자격이고 말고 할 게 있겠소?”
한기가 말했다.
“가문 배경을 보고 사귀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오. 혹여 누군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사라질 것이오.”
진정한 친구는 품행을 봐야 했다. 또 뜻이 같은지, 인연이 있는지도 중요했다.
깊게 사귀는 친구는 금보다도 소중하다.
한기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3공자는 내가 아까 한 말 때문에 화가 나서 나와 친구 하기 싫은 것이오?”
“한 공자, 그게 아니오.”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저 한 공자가 나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오. 이런 일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소?”
한경백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뭐가 그리 어려운가? 내가 하늘에 부끄럼이 없으면 되지, 남 시선이 왜 중요하겠소?”
한경백이 한기의 말에 대꾸하려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기 공자는 귀공자들과 벗 삼지 않고 유독 한씨 가문의 이 서자에게만 관심을 보이는군. 자네도 혹시 호국 공주의 정부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 소리를 들은 한기와 한경백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맞은편 오솔길에서 걸어오는 심연을 바라보았다.
“호국 공주께서는 안목이 높으셔서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소.”
한기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심 공자가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떠오? 심 공자가 웃는 얼굴에 칼을 숨기는 걸 잘하니 악독한 말을 달콤한 말에 숨겨서 호국 공주에게 들려준다면 공주께서 틀림없이 아주 좋아하실 거요.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지 않겠소?”
심연은 안색이 굳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한 공자, 자중하시오.”
‘자중?’
한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작년에 과거 시험을 본 뒤로 사이가 나빠졌다.
한기는 심연을 퉁명스럽게 대했다.
“내가 사촌 동생과 할 말이 있으니 한기 공자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오.”
“사촌 동생이라고?”
한기는 깜짝 놀라며 돌아서서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둘이 사촌지간이었소?”
‘당연한 거잖아? 제경에서 한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친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 부인과 이미 죽은 한경백의 어머니는 친자매로 모두 심씨 가문 사람이었다.
한기는 돌아서서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3공자, 내가 자리를 비켜드릴까?”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기는 오솔길을 따라 맞은편 냇가로 걸어갔다.
“심 공자,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오.”
심연은 그를 한참이나 주시하다가 말했다.
“공주 앞에서 말을 잘해 옥금이를 풀어준다면 고모가 널 잘 대해 주실 것이다.”
한경백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심연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한씨 가문이야말로 네 뿌리라는 걸 알지? 공주께서는 귀하신 몸이라 널 부마로 삼을 리가 없어. 네가 지금은 사랑받는다고 해도 너도 언젠가는 나이가 들고 못생겨지지 않겠어?”
‘나이가 들고 못생겨진다고?’
한경백은 활짝 웃었다.
“심 공자는 정말 내가 몸으로 공주 전하의 시중을 드는 남자 노리개라고 생각하시오?”
심연은 말을 하지 않았다.
‘몸으로 시중을 든다’처럼 저속한 화제는 문인으로서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경백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심 공자도 알다시피 몸으로 시중이나 드는 비천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공주 전하 앞에서 말을 하겠소?”
“한옥금은 네 형이다. 이렇게 죽는 걸 보고만 있을 거냐?”
심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나도 억울하오.”
한경백이 입꼬리를 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럴 능력이 없소.”
심연은 표정이 차가워졌다.
“물론, 나에게 결과를 바꿀 능력이 있다면…….”
한경백은 시선을 들고 평온하게 심연을 바라보았다.
“그럼 난 한옥금이 더 빨리 죽게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리고 절대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오. 심 공자, 믿어주시오.”
심연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뭐라고?”
“내 말을 다 들었지 않소? 굳이 반복할 건 없겠지? 그 이유가 뭔지 심 공자도 알고 나도 아니 더 이상 해명하지 않겠소.”
말을 마친 그는 느긋하게 예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 공자, 그럼 난 이만 가겠소.”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거기 서!”
심연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한경백, 네 신분을 잊지…….”
그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심연은 굳어진 몸으로 점점 다가오는 여인을 보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
“무슨 신분을 말하는 것이냐?”
야홍릉이 천천히 다가오며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내 측부에게 공주부의 규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 건가?”
심연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이 사람은 내 측부다.”
야홍릉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네가 해야 하는 것은 예를 올리는 것이지 협박이나 하면서 뭘 하라고 윽박지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예를 올리라고?’
심연은 시선을 들고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께서는 지금 저더러 서자에게 예를 올리라는 것입니까?”
“난 이 사람이 적자든 서자든 관심이 없다. 그가 내 사람이라는 것밖에 관심이 없으니.”
야홍릉이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아니면, 나와 다투기라도 할 것인가?”
심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다시 퍼레진 안색으로 고개를 돌려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난 눈으로 강하게 눈치를 주었다.
‘예전에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던 놈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니? 네놈이 감히 내 예를 받을 수 있겠어?’
그러나 한경백은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예를 올리는 것은 이렇게 논쟁할 일이 아니었다.
명문가 공자 중에 왕의 첩실을 안중에 두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한경백이 공주부에서의 지위는 첩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신분이 비천한 서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홍릉이 지금 그에게 예를 올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심연은 한경백에게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심연은 한경백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바로 황당한 요구를 무시한 채, 고개를 홱 돌리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다른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지위는 친왕들보다도 더 높았다.
떠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심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투도 어느새 원래의 느긋한 말투로 돌아왔다.
“네, 제가 방금 깜박했습니다. 전하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3공자를 뵙습니다.”
심연은 한경백에게 고개를 돌린 뒤, 몸을 살짝 굽혔다.
“아까는 제가 3공자께 결례를 범했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한경백은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가자.”
야홍릉은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한경백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홍릉을 따라갔다.
심연은 서서 둘이 떠나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언니!”
도화림을 벗어나자마자 멀리서 한 여인이 새하얀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곡수유상(曲水流觴, 문인들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시작한대요. 언니도 얼른 와요.”
한경백은 시선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졸졸 흐르는 냇가 옆에 귀공자와 여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까 왔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또 2황자, 4황자, 6황자와 8공주가 있었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야홍릉을 부른 사람은 야자릉이었다. 방금 외친 목소리가 작지 않아 냇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오늘 연회에는 자주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다수는 야홍릉을 만나려고 온 것이었다. 야홍릉이 아니었다면 야정연과 야모침은 귀족 여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나올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홍릉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한경백.”
야홍릉은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경백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했다.
“네가 가서 저들과 얘기하거라. 서로 얼굴도 익힐 겸.”
한경백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널 먼저 건드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참지 않아도 된다.”
한경백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