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한가지만은 말할 수 있소
차를 끓이는 것부터 따르는 것까지 그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하고 느긋했다.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귀함이 느껴졌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탁자에 놓인 여섯 잔의 차를 바라보다가 가장 가까이에 놓인 찻잔에 손을 뻗었다.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은 뒤,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왜 날 찾은 것이오?”
싸늘한 말투, 직설적인 화법에서 그녀는 한담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는 시선을 들었다. 어깨에 드리워 있던 검은색 머리카락이 고개를 드는 그의 행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찰랑거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더없이 고귀하고 준수한 얼굴이 나타났다.
하늘이 일부러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얼굴이었다.
전혀 흠집을 잡을 수 없었다.
귀티가 나고 준수하며 기세가 강한 낯선 남자였다.
“공주 전하는 참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남자는 담담한 말투로 물었으나 눈빛은 아주 깊었다.
“이 차의 맛이 어떠합니까?”
“난 거친 사람이라 차의 맛을 잘 모르오.”
남자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런 대답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야홍릉을 한참 바라보았다.
요염하고 어여쁜 얼굴에서는 그녀가 거친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공주 전하는 묘한 사람이시군요.”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듯한 눈치였다.
그녀는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소녀가 아닌 데다 다른 사람들과 서로 칭찬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정도로 한가한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장난으로 한 말이든, 아니면 칭찬으로 한 말이든 야홍릉에게는 쓸데없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남자도 이것을 의식한 것인지 곧바로 주제로 들어갔다.
“오늘 공주 전하를 뵈려고 한 건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마셨다.
“신은전의 대교습은 전하의 사람입니다. 그는 전하와 만나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도움을 드릴 겁니다.”
남자는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했다. 그의 행동은 아주 우아했다.
“그가 전하께 드린 어영위는 마음 놓고 편히 사용하셔도 됩니다. 절대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누구냐?”
목국 황족의 신은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으며 대교습, 능묵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또 뭘 알고 있는 거지? 목국 황족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거라면 이 사람은…….’
“공주 전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야홍릉의 속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신분은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정말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면 직접 전하께 이런 얘기를 드리지 않았겠지요.”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 어은위의 얼굴을 본 사람은 대교습과 그를 데리고 공주부에 들어간 내시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시는 이미 죽었지요.”
야홍릉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대교습과 그 내시밖에 없다고?’
“전하께서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그자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전에 신은전에서 훈련할 때, 은위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답니다. 신은전을 나선 뒤에야 비로소 가면을 벗을 수 있지요.”
야홍릉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신은전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남자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알아보는 데 애를 좀 먹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차를 마셨다. 싸늘한 그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남자는 호국 공주가 아주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분위기를 띄우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도 그녀의 앞에서는 전혀 자신의 장점을 펼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듣고는 경계심 때문에라도 이것저것 캐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홍릉은 호기심도 전혀 없는 듯했다.
아까 그의 신분에 대해 물었을 때도 전체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듯한 기세를 내뿜었다.
말하면 듣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마치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을 수도 있었다.
차를 마신 야홍릉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가 보겠네.”
남자는 당황하며 탁자 위의 차를 가리켰다.
“차도 아직 다 못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가 열심히 끓이고 여섯 잔이나 따른 차였다.
“혼자 두고 마시든지.”
야홍릉은 싸늘하게 한 마디 남기고 홱 돌아서서 떠났다.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전하, 잠시만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의 진지한 모습과는 달리 싱거운 표정이었다.
“전 한옥금을 좋아하지 않고 한씨 가문 3공자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한옥금의 대체품으로 쓰인다는 것은 한경백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야홍릉을 흔들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자가 이 말로 뭘 떠보고 싶었든, 또는 뭘 표현하고 싶었든 야홍릉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곧 자리를 떴다.
이 남자는 날씬하나 남자보다도 더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야홍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호국 공주…… 란 말인가?’
도화림 안은 조용했다. 오솔길은 평탄하나 구불구불했고 공기 중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다.
한경백과 한기는 나란히 서서 길을 걸었다.
“한씨 가문의 서자가 이렇게 명문가 적자 자제와 나란히 길을 걸을 수 있다니.”
한경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우아한 그의 모습에서 서자의 비굴함이나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열등감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공주의 덕분이지요.”
한기는 부채를 흔들었다. 그에게서는 고상한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적자와 서자의 경계가 분명하다고 하나 적자나 서자나 자신의 출신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오? 아버지뻘의 어른들이 자신의 욕망과 풍기를 다스릴 줄 알았다면 제경의 공자들은 모두 적자가 아니었겠소?”
한경백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한 공자는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사람들은 서자가 적자보다 비천하다고 하고 첩실이 정실보다 신분이 낮다고 했다. 누구도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지 못했다고 꾸짖지 않았다.
존귀한 적자든 비천한 서자는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도가 그러했다. 남자에게는 첩실을 들일 권리가 있으니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멋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그들은 강제적으로 신분이 나뉘어 있었다. 적자는 존중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서자는 묵묵히 설움을 견뎌야 했다.
그것이 공평하든, 공평하지 않든 다들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는 그런 골치 아픈 일들이 없소.”
한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만약 첩실을 들이거나 배다른 동생을 낳아 왔다면 어머니는 첩실과 서자를 괴롭히지 않고 바로 아버지를 내쳤을 것이니.”
“한 상서가 아내를 두려워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나 보오.”
한경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한 공자가 부럽소. 부부가 화목하면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아 너그럽고 정직한 사람이 된다고 하오.”
“3공자는 지금 나를 칭찬하는 것이오?”
한기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한기 가문에는 형제가 두 명 있었다.
장남은 듬직하고 과묵했으며 금군의 부지휘사였다.
차남 한기는 낙관적이고 장난기가 많았는데, 작년 말에 급제한 뒤, 아직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는 조정에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참가하라는 형의 말을 어길 수 없었기에 시험을 본 것이었다.
“난 한옥금을 좋아하지 않소. 그가 겉보기처럼 그렇게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한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한씨 가문의 사람인데 이렇게 호국 공주부에 있는 건 좀…… 명성이 손상될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중에 호국 공주와 한씨 가문 사이에서 난감해지지 않겠소?”
한경백은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서자라 공주 전하 앞에서는 거절할 여지가 없었소.”
“거절할 여지가 없다고?”
한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호국 공주가 강요했다는 거요?”
한경백은 고개를 처음 미소를 지었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소.”
한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웃는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겉으로는 호국 공주가 억지로 그를 측부로 들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 한경백도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난감할 일은…….’
한기는 미소를 지었다.
‘난감할 일이 뭐가 있겠어?’
호국 공주가 정말로 그를 강요했는지는 사실 중요치 않았다.
결국 한경백은 호국 공주의 사람이 되었다.
한씨 가문과 호국 공주가 원수 사이가 되었을 때, 한경백은 ‘어쩔 수 없이’ 공주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지켜보는 방관자로 될 수도 있었다.
황실에 들어간 사람은 첩이라도 가족의 일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황족의 비호를 받는다는 전제하에서.
한기는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이 세상 사람들이 참 재미없게 느껴지는군. 다들 앞에서는 고귀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돌아서면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한 공자, 나한테 실망한 것이오?”
한경백은 그의 표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도 한옥금처럼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하나 속으로는 가식적이고 권세에 빌붙으며 심지어 부귀영화를 위해 가족까지 버린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오?”
한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예의가 있는 사람이기에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맞소. 난 확실히 권세에 빌붙는 사람이지. 그렇게 고결한 품성을 가진 건 아니오.”
한경백은 고개를 돌리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 공자는 가풍이 엄하고 화목하며 형제간 사이가 좋으니 어떤 집에서는 이런 게 사치라는 것을 모를 것이오. 일부 가족과 사람들은 밖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르오…… 사실 나한테는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이야기가 있었소. 누구에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혼자서만 삭이고 있었을 뿐이지.”
‘이야기라?’
한기는 깜짝 놀랐으나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 연회는 중요한 일이 없이 자유 활동이오. 3공자가 할 얘기가 있다면 하시오. 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오.”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요. 난 아직 한 공자와 비밀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 하지 않겠소.”
한기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한 공자에게 말해 줄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