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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6)화 (1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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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스스로의 능력에 맡겨야죠

“나올 기회가 없다는 겁니까?”

육연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

“3황자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란 말씀이시죠?”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위에 오르지 못할 겁니다.”

육연지는 침묵에 잠겼다.

지금 황제에게는 자녀가 아홉 명 있었다.

대황자 야천란(夜天瀾)은 봉호가 예왕(睿王)으로, 나이는 서른이었다. 사비(四妃) 중 한 명인 매비(梅妃)의 아들로 성격이 온화하고 듬직하여 대신들의 옹호를 받았다.

지금 호부를 관리하고 있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2황자 야모침(夜慕琛)은 봉호가 선왕(宣王)이며, 소숙비(肖淑妃)의 아들로 대황자보다 몇 개월밖에 어리지 않았다. 성격이 난폭하고 방탕하며 여인을 좋아하는 데다가 야심이 컸다.

3황자 야소숙은 황후가 낳은 자식으로 봉호는 숙왕이었다. 본래라면 황위 계승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황후인 어머니가 있는 데다 태부(太傅)인 외삼촌, 어림군 통령인 사촌 형, 그리고 친척인 한옥금을 사랑하는 호국 공주까지 있어 어떻게 보아도 가장 승산이 큰 황자였다.

하지만 지금 형세가 급변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4황자 야정연은 사현비(謝賢妃)의 아들이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며 누구에게든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격은 온화해 보이나 항상 거리감이 느껴졌다. 

5공주인 야영락(夜瓔珞)은 잠시 무시할 수 있었다. 이미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었다.

6황자 야경함은 왕소의(王昭儀)의 아들로 3황자와 사이가 좋았다. 3황자의 조력자 겸 졸병이었다.

7공주 야홍릉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다.

8공주 야자릉은 3황자와 마찬가지로 황후의 자식이었다.

9황자 야명화(夜明華)는 봉호가 명왕(明王)이고 올해 열다섯 살이었다. 모친인 양비(良妃)도 사비 중 한 명이라 성인이 되기 전에 왕으로 봉했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성인이 된 형들과 다투기에는 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진정으로 황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황자는 대황자 야천란, 2황자 야모침, 3황자 야소숙과 4황자 야정연, 이 네 명이었다.

방금 야홍릉은 3황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할 거라고 했다. 병권을 쥔 그녀의 말이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호국 공주인 야홍릉은 여인이었지만 육연지는 그녀를 진짜 여인으로 보지 않았다. 황자를 지지하는 일에서 그녀의 능력과 영향력은 그 어떤 원로급의 대신보다도 더 컸다.

그러니 3황자 야소숙을 제외하면 세 명이 남는 것이었다.

그는 야홍릉이 누구를 밀어주려고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육연지가 입을 열었다.

“만약 대황자, 2황자와 4황자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누구를 지지하시겠습니까?”

“전 누구도 지지하지 않아요. 그 자리를 원한다면 스스로의 능력에 맡겨야죠.”

야홍릉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육연지는 깜짝 놀랐다.

‘스스로의 능력에 맡기라고?’

이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 속에 담긴 미묘한 뜻을 읽을 수 있으나 육연지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이 말을 자세히 되새기기도 전에 누각 맞은편이 떠들썩해졌기 때문이었다.

흩어져 있던 공자와 소저들이 다시 모여들어 예를 올리고 있었다.

4황자 야정연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스물셋인 그는 아주 잘생겼다. 늠름한 풍채와 뛰어난 기세를 가진 그는 황자 중에서도 외모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오늘 온 수많은 규수와 소저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고정되었다.

얌전하고 점잖은 여인이거나 직설적인 여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연모의 눈빛을 보내왔다.

야정연은 다른 사람들의 인사에 대꾸를 해 준 뒤, 고개를 돌리고 누각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시선이 살짝 멈칫하더니 곧이어 그는 이곳으로 걸어왔다.

야홍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진양왕부의 시위는 야정연을 모시고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안내했다.

진양왕비는 예를 올리고 시녀더러 차를 내오게 한 뒤 다른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육연지도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정왕 전하.”

야정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와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괜찮아? 그동안 가 보고 싶었는데 호국 공주부의 시위들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인 내가 들어가지 못했잖니. 항상 걱정했단다.”

육연지는 눈을 내리깔고 코웃음을 쳤다.

‘상대를 가려가면서 아부를 떨어야지.’

한씨 가문은 상황이 변했고 3황자는 변방으로 갔다. 다른 황자들은 주의력을 모두 7공주에게 돌리고 있었다.

강하고 권력이 있는 동생을 뒷배로 세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야홍릉의 말투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럼 다행이네.”

야정연은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화를 내지 않고 난간 쪽으로 걸어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씨 가문의 3공자는 한옥금의 대체품으로 들인 거냐?”

그는 이것을 꼭 확인해야 했다.

이는 야홍릉이 한옥금에게 미련이 남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있다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저 잠자리 시중을 드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이 말을 들은 야정연과 육연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도 약간 야릇해지는 것 같았다.

“흠.”

육연지는 입을 막고 목을 가다듬었다.

‘역시 7공주시군. 여인 중에서 ‘잠자리 시중’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야정연은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완월이가 며칠째 네 말만 하더구나. 시간이 나면 정왕부에 놀러 오지 그러냐? 세상에 좋은 남자가 많으니 한 명 때문에 슬퍼하지 말거라. 또 자신을 망치지도 말고.”

계완월(季婉月)은 정왕의 비였는데, 그녀는 줄곧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성격의 여인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저택 문을 나서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고, 특히 이런 남녀유별이 없는 연회에는 더욱 잘 나오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정왕이 질투심이 강하고 소유욕이 강하여 아내가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꼭 필요한 황실 가족의 모임을 제외하고 정왕비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그리고 이 말에서도 여인에 대한 그의 자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을 망친다고요?”

야홍릉은 싸늘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측부를 들인 것뿐이에요. 스스로를 망친 것까지는 아니죠.”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가 첩실을 들이는 것은 들어봤어도 여인이 측부를 들이는 것은 처음…….”

“지금 태후께서는 잠자리 노리개도 있으시지요. 넷째 황형께서는 태후의 앞에서도 그리 말씀하실 건가요?”

야홍릉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형께서는 저택의 일이나 잘 관리하시죠. 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이 굳이 저에 대해서 얘기해 줄 필요는 없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길고 마른 뒷모습에서 날카로운 단호함이 엿보였다. 엄동설한 같은 차가움에 보는 사람마저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야정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지금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어렵게 잡은 기회인데 그의 말실수 때문에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원래 이 얘기를 꺼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일곱째 동생은 성격이 왜 이렇게 세지?’

육연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야홍릉과 얘기를 나눌 때 절대 윗사람이거나 사내의 신분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국 공주는 대다수 남자보다 훨씬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야홍릉이 누각의 화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니 도화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버니 먼 곳의 산기슭에 세워진 마차 십여 대가 보였다.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홍릉은 발걸음을 살짝 멈췄다. 2황자 야모침과 그의 시위가 돌계단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7공주 전하.”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어두운 곳에서 나와 야홍릉의 앞길을 막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용모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저희 주인님이 전하와 드릴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싸늘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주인은 누구냐?”

“전하께서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3층에 계십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차갑게 말했다.

“길을 안내하거라.”

“네.”

남자는 돌아서서 누각의 빨간 문으로 들어가 안의 계단으로 3층에 올라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온갖 사람들이 모두 연회에 나왔다.

대다수는 야홍릉을 보려고 온 거지만.

야홍릉은 야모침과 야정연에게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검은 옷의 남자를 따라 3층으로 걸어갔다.

3층과 2층은 구조부터 완전히 달랐다.

작은 창청(敞廳)의 네 면은 모두 창문으로 되어 있어 도화산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는 이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계단의 옆에는 지키고 있는 시위가 있어 아무나 쉽게 올라올 수 없었다.

창청의 네 구석에는 모두 흑의를 입은 시위가 서서 각 방향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야홍릉은 마지막 돌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3층 전체의 구조가 들어왔다.

창청 중심에 짙은 빨간색 담요가 있었는데 아주 비싸 보였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홍목 탁자가 담요 중심에 놓여 있었다. 소박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차를 끓이고 있었다.

차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잠깐 지켜보았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일부러 살펴보지 않았으나 못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끓이고 있는 행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야홍릉은 자신을 만나겠다고 한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 담요 위 상석에 앉았다.

야홍릉은 입을 열지 않고 남자가 차를 끓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향긋한 차향에 모든 짜증이 날아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은 푸르고 맑았으며 얇은 안개 같은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넓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역시 호국 공주시군요.”

남자는 찻잔 여섯 개를 꺼내며 몸을 살짝 구부리고 우아하게 찻잔에 모두 차를 따랐다.

“차 맛 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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