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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5)화 (1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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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한경백의 말이 끝나자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순간 하늘과 땅도 조용해진 듯했다.

사람들은 한경백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런 말이 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7척에 육박하는 남자가 태연하게 ‘여인을 잘 만나 하루아침에 입지가 달라졌다’는 말을 하다니?

낯 뜨겁지도 않다는 말인가?

심연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옅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이 참 변했구려. 이제는 여인 덕을 보며 사는 것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정말 감탄스럽군.”

“심 공자가 한 공자를 새 노리개로 표현했으니 천뢰에 들어간 한옥금이 헌 노리개임을 입증한 게 아니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접선을 흔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준수한 그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역력했다.

“한옥금은 한씨 가문의 적자이나 예전에 역시 호국 공주의 덕을 보았지. 그래서 여인의 덕을 보며 사는 걸 얘기하려면…… 한옥금이 먼저인 것 같소만.”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병부 상서의 차남 한기(韓祈)였다. 연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이제 막 스무 살 된 청년으로, 그는 예전부터 심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韓)씨 가문의 적자인 그가 사람들 앞에서 한경백을 두둔하는 행동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경 귀족들 사이에서는 예로부터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적자는 적자끼리 왕래하고 서자는 서자끼리 왕래한다.

엄격하게 정한 적이 없는 규칙이지만 모든 사람이 따르는 신분 등급 제도였다.

서자가 적자의 무리에 끼는 것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한기가 평소 심연과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으나, 누구도 그가 한경백을 두둔하며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3공자는 권세가 없는 서자일 뿐인데 비호를 받았다고 문인의 오기라도 부려야 하는 거요?”

한기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좋은 교육을 받은 티가 다분히 느껴졌다.

“3공자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소.”

권세에 빌붙을 거면 실력이 강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발밑에 두고 자근자근 밟아줄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유효한 기간 동안 최대한 즐기는 게 우선이다.

하늘이 준 기회를 잘 잡지 않는다면 나중에 높은 자리에서 떨어져 죽게 될 수도 있었다.

한경백은 미소를 지었다.

“한 공자의 말씀이 맞소. 고맙다는 인사를…….”

“고마워할 것 없소.”

한기가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호국 공주는 차가운 분이시지. 그런데 아끼는 정인을 하옥시키고 이렇게 바로 새 정인을 만든 것을 보면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소. 3공자도 그녀의 짧은 총애를 진심으로 여기지 마시오.”

그는 느릿하게 한옥금의 노리개 신분을 한 번 더 확실하게 못 박았다.

심연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한경백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나는 내 신분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소. 난 호국 공주를 찌를 용기도 없고 공주의 총애를 진심으로 여길 수도 없지.”

그 말을 들은 한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면 3공자와 함께 도화림을 좀 걷고 싶은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한경백은 웃으며 말했다.

“영광이오.”

한기는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더니 한경백과 함께 도화림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뒤에서 미묘한 시선으로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독 심연의 안색만 굳어 있었다. 그는 이런 무안을 당한 적이 별로 없었다.

위걸은 경멸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쟨 뭐야? 정말 자신이 잘난 줄 아는 건가?”

한편, 먼 곳에 있던 야홍릉은 조용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옆에서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 전하의 이번 정인은 만만치 않은 사람인 것 같군.”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번 연회의 주인이자 목국에서 유일하게 성이 다른 왕 진양왕 육연지(陸衍之)였다.

그의 아버지 육헌(陸軒)은 생전에 무장이었다.

선제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어 군왕으로 봉했고, 그 작위는 3대나 전승될 수 있었다. 육헌은 십만 병의 정예 부대를 남기고 죽었는데 그 병권은 지금 젊은 육연지에게 돌아갔다.

오늘 초대장을 받고 많은 사람이 왔지만, 그 중에서 이 누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모두 육연지의 사람이었다.

야홍릉만 제외하면 그러했다.

향긋한 차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차 접시를 들고 걸어왔다.

“공주 전하, 제 솜씨를 맛보시겠어요?”

바로 아까 야홍릉에게 손을 젓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2년 전에 진양왕부에 시집온 그녀는 지금 왕부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진설군으로, 이름에서도 그녀의 용모에서 느껴지는 온화하고 대범한 기운이 흘렀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다차 접시에서 찻잔을 가져와 입가에 대고 호로록 마셨다. 그녀의 무덤덤한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진설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호국 공주는 차가운 사람이라던데 그 말이 맞네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차에 독이 들었을까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진양왕도 드셔보세요.”

야홍릉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여전히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육연지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속으로 아내의 성격이 이렇게 차갑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도 이런 성격이었다면 난 진작 얼어 죽었겠지.’

“지금 조정의 상황이 좀 긴합니다. 전하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의 말투는 진지해졌다.

“천뢰에 갇힌 한옥금 말입니다.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이 한마디 질문에 야홍릉의 자세와 한씨 가문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야홍릉이 황위의 경쟁에서 3황자를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의중도 알 수 있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육연지의 질문이 좀 놀랍게 느껴졌다.

“진양왕이 가장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육연지는 턱을 괴고 껄껄 웃었다.

“전하께서는 병권을 가진 사람이 황위 쟁탈권에서 진정으로 중립 위치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도 황자들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으나 제 열풍기(烈風騎)를 탐내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의 춘일연은 안사람이 준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뜻이 담겼지요.”

야홍릉은 묵묵히 차를 마실 뿐,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3황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간 뒤로 다른 황자들은 가만 있지 못 하더군요.”

육연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안사람이 전에 2황자에게 작은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 춘일연은 그 은혜를 갚는 셈이지요. 춘일연의 주요 목적은 전하께 있습니다. 황자들은 지금 전하를 뵙고 싶어 난리가 났습니다만 전하께서 줄곧 기회를 주지 않으셨지요.”

호국 공주는 그동안 저택에서 손님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자들은 그녀의 생각을 떠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이 좋은 기회이겠군.”

육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이 바로 그 기회이지요. 잠시 뒤, 2황자, 4황자, 6황자와 8공주가 오실 겁니다.”

야홍릉이 춘일연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진양왕은 의자를 앞으로 끌어갔다.

잠시 뒤,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옥금의 생사는 앞으로의 국면에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내가 왜 그걸 얘기해 줘야 하지?”

야홍릉의 말투는 호수처럼 담백하고 평온했다.

육연지가 말했다.

“저와 전하가 손에 쥔 병권은 모두 사람들의 경계를 사니까요. 또 우리를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도 있고요.”

‘끌어들인다고?’

야홍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진양왕은 누구를 지지하고 싶으신가?”

육연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 누구도 지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의 뜻을 봐야죠.”

야홍릉은 코웃음을 쳤다.

육연지가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조정의 황자들은 다들 뛰어난 분이지만 밀어주고 싶은 분은 없습니다. 황위에 오르기 전에는 다들 조정의 문관과 무장들을 끌어들이기 바쁘지만 일단 황위에 오르고 나면 또 토사구팽할 것이 아닙니까?”

병권은 좋은 것이었다. 황자들이 다들 원하니 말이다.

그래서 다들 병권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진심이었다.

그러나 황제로 등극한 뒤, 병권을 가지고 있는 무장은 황제의 큰 골칫거리도 된다. 그래서 후환을 없애려고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육연지는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병권을 가지고 있고 열풍기도 육헌 부자만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만, 그는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힘들게 전쟁에서 공을 세울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가한 왕이 되어 인생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국면을 보니 그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황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토사구팽…….’

이 네 글자에 야홍릉은 옛일이 떠올라 표정이 굳었고 시선에 차가운 서리가 담겼다.

찻잔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토사구팽이라고? 이번 생에서는 누가 토끼가 될 것이고 누가 사냥개가 될 것인가?’

“왜 제 뜻이 궁금한 거지요?”

그녀가 차분하게 물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육연지는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보며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전쟁터에 3년 동안 계시면서 눈부신 공을 쌓으셨고 제경이 모두 인정하는 불패 장군이 되셨지요.”

먼 곳의 초지에서 공자와 소저들이 신나게 벌주놀이를 하고 있었다. 심씨 가문의 적자는 은근히 도화림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수림 밖에서 서성이기만 할 뿐,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육연지는 그쪽을 보지 않고 야홍릉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이렇게 말해도 전하께서는 안 믿을 수 있겠지만 병권을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은 황위 계승 싸움에서 이미 도박에 빠진 겁니다. 죽거나 평생 부귀를 누리거나 둘 중 하나죠.”

중립?

경력을 오래 쌓은 늙은 여우나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만이 황위 계승 싸움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야홍릉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평소의 침착하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옥금은 다시 나오지 못할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차는 식어서 씁쓸함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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