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난 이제 달라졌소
다음 날 아침.
야홍릉이 일어났을 때, 능묵은 이미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외전의 비단탑에는 담요 하나가 가지런히 개어져 한쪽에 놓여 있었다.
첨향과 정란은 시녀를 데리고 들어와 야홍릉의 세수와 화장 및 옷 시중을 들었다.
검은색 허리띠는 야홍릉의 몸매를 더욱 날씬하고 분위기가 더욱 날카롭게 부각시켜 주었다. 미간 사이에 있는 불꽃 모양의 빨간색 화전은 싸늘한 여인의 눈매에 요염함을 더했다.
그녀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분위기가 풍겼다.
선청으로 가려고 방에서 나온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경백을 보았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 게다가 몸에 딱 맞는 하얀색 경포에 은색 무늬가 새겨진 허리띠로 허리선을 강조한 한경백은 아주 멋있었다.
비단결 같은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드리우자 고귀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야홍릉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의 허리춤에 있는 옥패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녀는 기분을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치장하니 서자 같지 않군.”
한경백은 그녀에게 예를 올리다 이 말을 듣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아껴주신 덕분입니다.”
야홍릉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선청으로 향했다.
측부라고 하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노리개 정도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여인이 떳떳하게 측부를 들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측부든, 노리개든, 준수한 외모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못생긴 사람이었다면 어찌 야홍릉의 눈에 들 수 있겠는가?
정실은 현모양처를, 첩실은 예쁜 여인을 들인다는 말이 있었다.
측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의 얄팍한 관념과 선입견은 종종 사람을 화나게 한다.
하지만 야홍릉에게는 쓸데없는 말을 줄일 수 있는 좋은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한경백을 측부로 쉽게 삼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추측하고 떠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경백은 자연스럽게 야홍릉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그는 한 마디만 물었다.
“도화산에서 아는 얼굴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전하도 아시다시피 명문가 적자들은 항상 서자들을 업신여기지요. 만약 누군가 저에게 시비를 건다면 반격해도 됩니까?”
그는 한씨 가문 서자인 것을 제외하고 야홍릉이 갓 들인 측부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의 신분 모두 남들에게는 조롱할 수 있는 빌미가 될 법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신경전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 사이의 비교질과 모함은 절대 저택 안이나 후궁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저택을 나서지 않은 그지만 한경백은 이미 도화산으로 가면 어떤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그러나 도발하는 사람을 참아줘야 할지 아니면 반격해야 할지는 야홍릉의 뜻에 따라야 했다.
“넌 호국 공주부의 사람이다. 저택을 나서면 내 얼굴을 대표하기도 하지.”
야홍릉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참을 때와 반격해야 할 때를 알아서 가리거라.”
한경백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둘은 저택 밖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햇살이 따뜻한 것이 밖으로 소풍을 떠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마차는 일찍부터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니 하인은 마차를 두 대 준비했다.
하지만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한경백더러 같은 마차에 오르라고 눈치를 주었다.
마차에는 다과와 과일 말랭이가 있었다.
마차에 오른 한경백은 야홍릉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야홍릉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었다.
다시 살아난 뒤, 야홍릉은 책을 자주 읽었다.
그녀가 읽는 책은 다양했는데 병서, 둔갑술, 약리, 심지어 흔한 무공 비법도 있었다.
그녀의 침전 머리맡에는 자주 보는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반은 시간 때우기 용이었고 반은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둘은 길 가는 내내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마차는 천천히 교외의 도화산 방향으로 향했다.
* * *
정왕부(廷王府) 안에서 시위가 다급히 야정연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전하께 아룁니다. 7공주께서 한씨 가문 3공자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습니다.”
“저택을 나섰다고?”
야정연은 시선을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도화산으로 가는 방향이더냐?”
“그런 듯합니다.”
야정연은 지난밤에 책상에 던졌던 초대장을 들고 말했다.
“차를 준비하거라. 도화산의 연회에 참석해야겠다.”
“네.”
시위는 고개를 수그리고 물러났다.
* * *
선왕부(宣王府)에서 선왕도 시위의 보고를 받았다.
“일곱째가 교외의 도화산으로 갔느냐?”
“네.”
“새로 들인 측부를 데리고?”
“네, 그러합니다.”
“이것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선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서 구경하지.”
“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반 시진 뒤, 마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야홍릉과 한경백은 앞뒤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의 눈앞에 푸른 하늘과 맑은 강, 예쁜 정자, 그리고 산을 꽉 채운 복숭아꽃이 펼쳐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강이 산기슭까지 이어져 있었고 맑은 강 위에는 파란 연잎이 가득 떠 있었다.
공기 중에는 복숭아꽃의 상큼한 향기가 가득했다.
산 위의 공지에는 많은 탁자와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다.
시녀들은 분주히 오가며 다과와 음식, 술을 올리고 있었다.
젊은 공자와 소저들은 이미 와 있었다.
일부는 이제 막 도화림 속에서 나오는 중이었고, 어떤 이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야홍릉이 나타난 것을 보자 그녀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와서 인사를 건네는 한편, 몰래 그녀의 옆에 있는 한경백을 훑어보기도 했다.
“7공주 전하!”
멀지 않은 곳의 누각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높게 퍼졌다.
그와 함께 흔들리는 손수건이 보였다.
“여기예요.”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누각을 바라보았다.
2층에 남자 몇몇과 함께 앉아서 그녀에게 손수건을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오늘 연회를 주최한 진양왕비 진설군(秦雪君)이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한경백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혼자 움직이거라. 난 저리로 가서 봐야겠어.”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고, 야홍릉은 몸을 돌려 누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한경백을 훑어보는 시선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중 청색 장삼을 입은 젊은 남자가 못마땅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옥금과 좀 닮기는 했으나 기세는 옥금에게 한참 못 미치는군. 참새가 봉황 깃털을 뒤집어쓴다고 봉황이 되겠나?”
이 말은 주제도 모르고 높은 사람에게 시집가려는 여인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한경백에게 사용했다. 그가 한경백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한경백은 고개를 돌렸다.
이 말을 꺼낸 남자는 바로 이부 상서 가문의 적자 위걸(衛傑)이었다.
그들은 모두 서자를 무시했다.
예전에도 한씨 가문에 올 때마다 위걸은 툭하면 한경백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온화하고 착하기로 소문난 한씨 가문의 2공자 한옥금은 한 번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는 위걸이 한경백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도 원수를 만난 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위 공자, 과찬이시오.”
한경백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맞받아쳤다.
“난 한 번도 형님과 고귀함을 다툰 적이 없소. 천뢰 같은 곳은 범죄를 저지른 귀족들만 가는 곳이지, 나 같은 비천한 사람은 천뢰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위걸은 안색이 대뜸 퍼레졌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한경백.”
“위 공자, 화내지 마시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화를 내서 위 공자에게 좋을 건 없지 않겠소?”
한경백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의 표정은 여유롭고 우아했다. 전혀 원수를 바라보는 증오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는 위걸이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이 보였다.
위걸은 울화가 치밀었다.
“한경백, 너……!”
“위걸, 자네의 언행을 조심하시게.”
옆에 있던 남자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한 공자는 지금 호국 공주의 사람이라 공주 전하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말이오. 지금 공주의 노리개인 한 공자의 기분을 잡치게 하면 공주 전하께서도 기분이 언짢으시지 않겠소?”
그는 위걸을 바라보며 책망하는 말투로 말했다.
“다 큰 사람이 이 정도 이치도 모르오?”
이 말을 들은 위걸은 바로 조용해졌다.
책망한 사람은 심씨 가문의 심연(沈淵)이었다.
제경에서 겉과 속이 가장 다른 사람을 뽑으라 하면 둘을 손꼽을 수 있었다.
한옥금과 함께 바로 이 사람, 심연이었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겉모습과 달리 항상 말에 칼을 숨기는 흉측한 인간이었다.
황성 귀족 명문가에서는 규벌(裙帶, 처가의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파벌 관계)이 중요했다.
한씨 가문과 황족은 인척 관계로, 황후의 적자인 야소숙과 한옥금은 사촌 형제였다.
한 부인은 성이 심씨였고, 심씨 가문과 한씨 가문 역시 인척 관계였다.
그래서 한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자연스럽게 3황자 야소숙의 사람이 된 것이다.
쓸모 있는 사촌이어야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이다.
심씨 가문의 적자 심연처럼 말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작년의 과거 급제를 따냈고 황제가 눈여겨보는 신하가 되었다.
지금은 호부에서 관직이 높지 않지만 황제는 그를 아주 중용하고 신임했다. 나중에 경력이 차고 성과도 낸다면 앞날이 구만리일 것이 뻔했다.
좋은 조건을 가진 그는 팔방미인인데다 평소 다른 사람들과 겉으로는 척을 지지도 않았다. 그가 가장 능한 것이 바로 온화한 가면 속에 독침을 숨겨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연은 겉보기에는 좋은 사람이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에는 위걸을 꾸짖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경백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그의 말에는 직접적인 비아냥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한경백은 그저 호국 공주의 남자 노리개일 뿐이고, 지금은 그가 한창 사랑을 받을 때이니 괜히 밉보이지 말라는 뜻으로 비춰졌다.
즉 한낱 서자 때문에 호국 공주의 미움을 사는 것은 가치 없는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오늘 초대를 받고 도화산에 온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들 심연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물론, 한경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옅게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심 공자의 말씀이 맞소. 난 지금 공주 전하의 새 노리개요. 헌 노리개는 이미 천뢰에 갔으니 지금 공주 전하가 얘기를 나눌 사람은 나밖에 없지. 내가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공주 전하께서도 언짢으실 게 분명하오. 그렇게 되면 위 공자는 폐하 앞에서 사정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한경백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한씨 가문의 서자로 신분이 낮아서 예전에는 괴롭힘을 당해도 참았지만, 지금은 여인을 잘 만나 하루아침에 입지가 달라졌소. 내가 이 자리에서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높은 곳의 공기를 실컷 맛보려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