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전생과는 다르다
침전에서는 한참동안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야홍릉은 두 통의 서신을 다 본 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한씨 가문 서자가 박학다식하다던데 그냥 하는 칭찬은 아닌가 보군.”
한경백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칭찬을 해도 한씨 가문 2공자에게 하지, 서자인 저를 칭찬하겠습니까?”
한경백은 학식이 넘쳤으나 오랫동안 적형의 빛에 가려져 그늘에서만 살다 보니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게 익숙했다.
그것이 그가 사는 길이었다.
한경백은 야홍릉의 입에서 나온 ‘듣자 하니’라는 말에 놀란 기분이 들었으나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호국 공주가 그의 뒷조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짧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다음 달 말은 태후의 생신이니 나와 함께 입궁하여 연회에 참석하자꾸나.”
한경백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측부로 들이게 되었으니 야홍릉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도 언젠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다. 공주의 측부라는 신분으로.
그 뒤로 그는 한참이나 야홍릉의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야홍릉은 더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한경백은 물러가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전하, 외전에 있는 공자의 글을 쓰는 자세가 틀렸습니다. 저렇게 해서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어 그를 힐끗 보았다. 한경백은 예를 올리고 공손하게 물러갔다.
한참 침묵을 지킨 뒤, 야홍릉은 일어나서 외전으로 향했다.
능묵은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런데 야홍릉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쓰거라.”
“네.”
능묵은 붓을 든 채, 꿇어앉아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야홍릉은 서서 한참 살펴보았다. 그가 쓴 글이 비뚤비뚤한 것은 물론이고 젓가락을 잡는 듯한 자세로 붓을 잡는 것만 봐도 야홍릉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역시 글을 모르는구나.’
그녀는 다가가 그에게 붓을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붓을 들고 내가 쓴 글을 오늘 밤에 백 번 쓰거라.”
“네.”
능묵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야홍릉은 손을 거둔 채, 잠깐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전하.”
대집사 고원(顧原)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꽃이 붙은 초대장을 꺼냈다.
“진양왕비(晉陽王妃)께서 내일 교외 도화산(桃花山)에서 춘일연회를 연다고 사람을 보내 초대장을 보내오셨습니다. 전하와 한 공자께서 참석하시라면서요.”
야홍릉은 원래는 이런 연회에 잘 나가지 않았다. 천성이 차가운 그녀는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긴 시간을 변방에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가끔 돌아와 있을 때도 이런 귀족들이 여는 꽃구경 연회가 잘 없었다. 그래서 매번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한옥금은 그녀를 위해 환송회 같은 연회를 열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연회에 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궁의 연회에는 적잖게 참가했었다.
매번 돌아올 때마다 황제는 궁에서 그녀를 반겨주는 연회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최근에 한옥금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 고 집사는 그녀가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리고 말았다.
말없이 그의 손에서 초대장을 받은 야홍릉은 무덤덤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뒤에 말했다.
“가서 한경백에게 말해주거라. 그리고 내일 입을 옷과 장신구도 준비해 주고.”
“네, 전하.”
야홍릉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용히 서 있다가 돌아서서 외전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소년을 보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춘일연(春日宴), 그리고 눈앞의 영위.
이것들은 그녀의 전생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야홍릉은 이처럼 앞으로도 많은 일이 전생과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비수를 자신의 가슴에 박아 넣고 한옥금을 천뢰에 보낸 일부터 그것 때문에 3황자 야소숙이 전쟁에 참가한 일까지.
이번 생의 많은 일이 전생과 달라질 것이다.
이날 밤 야홍릉은 홍릉원에서 나가지 않았다. 밖에서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녀는 여전히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날이 저물 무렵에 첨향이 저녁 식사에 대해 물어 보러 왔다가 흑의 소년이 책상 앞에 꿇어앉은 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공주의 지시를 받은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선청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전에 돌아왔을 때도 능묵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
야홍릉은 서서 그를 한참 지켜보았다. 그가 어느새 또 젓가락을 잡는 자세로 붓을 잡는 것을 보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까 어찌 가르쳤더냐?”
소년은 멈칫하다가 하얀 종이에 먹물을 떨구었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야홍릉은 신은전의 규칙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툭하면 무릎을 꿇고 벌 받을 준비를 하는 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책상 위의 나무 자를 들었다.
“손.”
‘손?’
소년은 당황했다가 눈치를 보며 두 손을 내밀었다.
“손을 펴고 높이 들어.”
소년은 그녀의 말대로 두 손을 펴서 제사품을 바치는 자세로 내밀었다.
야홍릉은 아무런 표정이 없이 자를 들어 그의 손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소년은 아파서 움찔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었다.
그러다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께서 엄벌을 내려주십시오!”
‘벌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야홍릉은 변함없는 얼굴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두려운 마음을 참으며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바닥을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일곱 번 내리쳤다.
손바닥이 자주색을 띠며 부어올랐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능묵은 꼼짝하지 못했다. 몸을 떠는 것도 최대한 자제했다.
손에 든 자를 내려놓고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계속 쓰거라. 내가 가르쳐 줬던 붓 잡는 방법을 잘 떠올리며 쓰거라. 이번에도 잘 쓰지 못하면 손을 잘라버리겠다.”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으며 능묵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이 정도로 끝인 건가?’
그는 방금 주인이 내리는 벌을 거역했다. 신은전의 규칙에 의하면 주인의 벌을 거역하면 적어도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큰 죄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주인은 손바닥 몇 대만 친 게 다였다.
손바닥이 아팠지만 소년은 지금 머릿속이 복잡했다.
“뭣 하고 있는 것이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서야 그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올린 뒤, 책상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퉁퉁 부어 열이 나는 손으로 붓을 잡기 힘들었으나 그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정확하게 붓 잡는 자세를 애써 떠올리며 다른 한 손으로 먹물이 묻은 종이를 옆에 내려놓은 뒤, 새 종이로 갈아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썼다.
처음 글을 배우는 그의 글씨는 예쁘지 않았다. 게다가 손이 아파서 붓을 제대로 쥘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 글을 잘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한 획, 한 획 열심히 썼다.
심지어 무의식간에 야홍릉의 글씨체를 따라 하기도 했다.
글을 배운 적 없는 그에게는 주인의 날카로운 글씨체가 기준이었다.
야홍릉은 서서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소년은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붓을 잡는 정확한 자세를 깨우치게 되었다. 소년은 최대한 아픔을 참고 있었지만 야홍릉은 그의 미간에 맺힌 식은땀과 창백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능묵이 강한 자제력으로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은 미세하고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첨향과 정란을 불렀다.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네, 전하.”
첨향은 야홍릉의 침의를 가지러 갔고 시녀더러 향료 같은 목욕 용품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야홍릉을 따라 후전(後殿)으로 들어갔다.
능묵은 아직도 글을 쓰고 있었다.
야홍릉이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하얀색 침의를 걸친 채, 침대에 누워 반 시진 넘게 책을 읽은 뒤에야 능묵은 백 번 쓰기를 마쳤다.
붓을 내려놓은 능묵의 몸은 뻣뻣했다.
사지를 살짝 움직여 본 그는 두 손이 아직도 심하게 아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몸은 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그는 다 쓴 글을 말린 뒤, 조심스럽게 정리해서 들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야홍릉에게 내밀었다.
야홍릉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살펴본 뒤, 마지막에 말했다.
“내일부터 정식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거라. 내가 준 숙제를 제 때에 완성하지 못하거나 잘 완성하지 못하면 네 두 손은 또 이렇게 벌을 받을 것이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더러 물러가라고 하려다 갑자기 지난번에 능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인님께서 약을 바르라고 허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잠깐 말없이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반 시진을 줄 테니 목욕하고 약을 바른 뒤, 밥을 먹거라.”
재빠른 영위들에게 이 세 가지 일을 반 시진 안에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능묵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물러갔다.
야홍릉은 그가 쓴 종이들을 옆에 두고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영위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야홍릉은 앞으로 그에게 시킬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까막눈 영위는 영 쓰기가 불편했다.
문무가 모두 뛰어나기는 어렵지만 간단한 서신 정도는 쓸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녀들이 모두 물러간 대전은 아주 조용했다.
야홍릉은 침대에 누워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떨치려고 했다.
깨어난 그녀는 항상 전생의 사람들과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생에 해야 할 일과 대적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했다.
반 시진 뒤, 익숙한 냄새가 전해졌다.
그녀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내려오거라.”
검은 그림자가 휙 하고 내려오더니 이제 막 대들보에 몸을 숨긴 능묵이 또 그녀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일 나와 함께 도화산으로 간다. 너에게 맡길 일이 있다.”
능묵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분부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되 절대 단서를 남기지 말거라.”
“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대들보에서 잘 필요 없다. 외전의 탑 위에서 자도록 하거라.”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은 깜짝 놀랐다.
그는 이건 영위의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야홍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령이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엎드리며 명령을 받았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