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까막눈이라니
“어젯밤에 8공주가 천뢰로 가서 한옥금을 만난 뒤, 봉의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조례가 끝난 뒤, 황후는 황제를 만나 전하께서 측부를 들인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영일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공손하게 말했다.
“황후가 봉의궁으로 돌아간 뒤, 6황자가 문안 인사를 하러 황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봉의궁에서 황후와 반 시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홍릉원 침전에서 야홍릉은 말없이 연탑(軟榻)에 기댄 채, 영일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얼굴은 불빛 아래로 더욱 고귀하고 싸늘해 보였다. 마치 설산 꼭대기에서 오랫동안 녹지 않는 눈과 같았다.
바깥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조용히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영일의 보고를 다 들은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가 보거라.”
“네.”
영일은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떴다.
침전은 다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조용히 연탑에 앉아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잠시 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능묵.”
대들보에서 한 사람이 내려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책상 위의 서신을 뜯어 읽으려무나.”
‘서신?’
소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책상 앞을 보니 아직 뜯지 않은 서신 두 통이 놓여 있었다. 순간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야홍릉은 소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자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냐?”
“송구합니다.”
소년은 고개를 조아렸다.
“알아들었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의 목소리는 한층 작아졌다.
“송구하나, 전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글을 모른다고?’
야홍릉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글을 모른다고?”
능묵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너만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신은전(神隱殿)의 영위들이 다 모르는 것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저만 모르는 겁니다.”
능묵이 고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녀는 차가운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항상 주변에 한기를 내뿜었다. 특히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더욱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등에 힘을 주었다.
그는 한참이나 야홍릉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자 입을 열었다.
“주인님, 계편을 드릴까요?”
‘계편?’
야홍릉은 미간을 꿈틀거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왜 계편이 필요하지?”
“제가 주인님을 불쾌하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야홍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내 기분이 나쁜 게 네 잘못이냐?”
“네.”
소년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내 기분을 나쁘게 한 것이라면?”
소년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지시만 내리신다면 전 바로 그 사람의 목을 베어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누구도 그녀가 능묵의 말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그녀가 물었다.
“신은전에는 지금 영위가 몇 명이나 있느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천자(天字)급 여덟 명, 지자(地字)급 스물네 명, 현자(玄字)급 서른여섯 명, 황자(黃字)급 일흔두 명입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급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못한 사람은 이천 명이 안 됩니다.”
신은전에는 수시로 새로운 인원을 보충하고 또 많은 사람이 죽어가기에 구체적인 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야홍릉은 연탑에 기댄 채 침묵했다.
신은전에서 키우는 것은 모두 황족들의 영위였다. 천, 지, 현, 황의 등급은 실력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오직 황제의 명령만 따랐다. 그들의 임무는 암살, 정보 수집, 다른 나라 황족에 대한 간첩 활동 등 다양했다.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신은전의 존재는 황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담담하게 물었다.
“넌 무슨 급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전 어자(禦字)급입니다.”
‘어자?’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소년의 검은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삼 년에 한 명씩 나타난다는 어자급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그렇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폐하의 명이 아닌, 주인님의 지시만 따릅니다.”
이 말은 변명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어제 야홍릉이 했던 말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자신의 충성을 보여줘 하루빨리 주인의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신은전의 규칙인 ‘주인의 뜻을 짐작해서 미리 말하지 말라’에 어긋났다.
주인이 이 일로 기분이 나빠진다면 당장에서 그를 죽여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큰 죄였다.
야홍릉은 이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능묵이 어자급이라는 데 놀란 듯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신은전의 최강자 어영위(禦影衛)라……. 폐하께서 왜 널 보내셨을까?”
“주인님께 아룁니다. 대교습(大敎習)의 결정이었습니다.”
“대교습?”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대교습이 뭐라고 시키더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대교습께서 주인님을 주인으로 모시라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그녀를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은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지시를 내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은위는 주인을 모신 뒤, 주인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 했다. 대교습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시가 없었다는 말은 대교습이 능묵더러 야홍릉을 주인으로 모시라고 한 게 진짜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야홍릉은 부황이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의로 영위를 보내 그녀를 감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교습더러 영위를 골라서 나에게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대교습이 삼 년에 한 명 나타나는 어은위를 그녀에게 주었을 줄이야.
‘대교습의 이 결정은…… 우연일까? 의도적인 걸까?’
신은전 영위는 종종 정보를 전하는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심지어 병법과 둔갑술 등 서적도 익혀야 했으니 글을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 오직 능묵만이 글을 모른다는 거야? 왜 천부적 재질이 가장 뛰어나고 실력이 가장 강한 소년이 까막눈인 거지?’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붓과 먹을 준비하거라.”
“네.”
붓과 먹이 곧 책상 위에 올랐다.
야홍릉은 붓을 들고 먹을 묻힌 뒤, 종이에 ‘능묵’ 두 글자를 썼다.
그녀의 필체는 날카롭고 힘이 강했으며 그녀 특유의 기세가 담겨 있어 글만 봐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두 글자는 네 이름이다. 지금부터 따라 쓰거라. 바르게 쓸 때까지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기 책상에 가져가 쓰거라.”
소년은 바닥에 엎드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냐?”
야홍릉은 능묵이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매에는 서슬 푸른 한기가 맴돌았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소년은 꿈에서 깬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
“송구합니다, 지금 바로 쓰러 가겠습니다.”
* * *
자죽원에서 하루 쉰 뒤, 밤새 생각에 잠겨 잠을 설친 한경백은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홍릉원으로 찾아왔다.
날씨가 풀리고 꽃이 피는 봄이었다. 공기 중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화랑을 건너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홍릉원에 도착한 한경백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흑의 소년이 책상 앞에 꿇어앉은 채, 붓을 들고 뭔가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세가 날카로워 조용하게 앉아 있기만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경백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상한 느낌을 억누르고 소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붓을 든 소년의 자세가 엉거주춤한 것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전의 창가에 앉아 있는 공주가 보였다. 한경백은 앞으로 다가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그를 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한경백이 대답했다.
“어제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서신을 뜯으며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말하거라.”
“전하께서 다른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을 내보내?’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방 안에는 시중을 드는 첨향과 정란(靜蘭)밖에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나가 보거라.”
“네.”
한경백은 잠깐 침묵했다. 그는 방 안에 아직도 글을 쓰는 소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보니 공주전에서 글 연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제가 어제 밤새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한씨 가문의 서자로 친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한씨 가문의 적모(嫡母)와 두 적형(嫡兄)의 압박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산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경백.”
야홍릉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호국 공주로 친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지. 내 목숨은 너보다 귀중할 것이다.”
한경백은 깜짝 놀라며 다급히 시선을 내렸다.
“공주 전하께서는 친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지키시는데 당연히 저보다 천 배는 더 귀한 목숨이지요.”
잠깐 말을 멈추었던 그는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제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공주 전하처럼 고귀하신 분이 결정하신 일인데 제가 고민할 게 뭐가 있겠냐는 말입니다. 전 지금까지 아주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전 ‘언제쯤이면 이 무시무시한 저택에서 벗어날까? 언제면 이 고달픈 나날이 끝날까?’ 하며 수없이 생각해 왔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저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으니 전 이 목숨을 전하께 바치렵니다. 이 일로 큰 고통을 겪는다 해도 절대 전하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밤새 생각한 그는 드디어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씨 가문은 권세가 강한 가문이었다. 태후와 황후가 한씨 가문의 뒤를 봐주고 3황자는 지금 병사를 이끌고서 전쟁터에 나간 상태였다.
한 어사는 조정 일품 대신이고 그의 큰 형님 한령은 금군을 호령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감히 한씨 가문과 맞설 만한 가문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야홍릉이 한씨 가문을 대적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아는 것을 어찌 야홍릉이 모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조정에 있으면서 전쟁터에도 나가 보았다. 그러니 그보다 아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며 생각도 훨씬 깊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도 그가 영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일 것이 분명했다.
또 한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경백은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한 가지만 알아두면 되었다.
야홍릉의 측부가 되는 시점에서 그는 호국 공주부의 사람일 것이고 그의 생사와 운명은 호국 공주와 단단히 엮여질 것임을.
만약 야홍릉이 지금 도박을 하는 중이라 해도 두려울 건 없었다.
그의 목숨보다 훨씬 귀중한 야홍릉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마음 붙일 사람 한 명 없는 그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만약 그녀가 성공한다면 그는 적어도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호국 공주의 세력을 빌어 자신의 복수를 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처참하게 죽은 복수, 그리고 그동안 설움을 참고 지낸 데 대한 복수.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그저 목숨을 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