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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9)화 (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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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네가 필요하구나

야홍릉은 시선에 담긴 차가움을 숨기고 회랑을 가로질러 갔다. 가냘픈 그녀의 몸에서는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녀는 높은 산에 핀 꽃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 같았다.

그녀가 한경백이 묵고 있는 자죽원에 도착하자 하인이 들어가 보고했다.

그러자 한씨 가문의 서자가 무채색 장삼을 입고 대문 앞에 서서 공주를 맞이했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그의 행동에서는 우아하나 공손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야홍릉은 그의 옆을 지나 선청(膳廳, 식사하는 방)에 들어섰다. 첨향이 다른 시녀들과 함께 식사를 차리고 있어 향긋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같이 하자꾸나. 물어볼 말이 있으니.”

한경백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첨향은 시녀들이 식사를 다 차리자 고개를 숙인 채, 양옆에 줄을 서서 공주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야홍릉은 상석에 앉은 뒤, 고개를 돌리고 한경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한씨 가문의 서자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앉지.”

짧은 두 글자였으나 성지처럼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한경백은 공손하게 응했다. 그는 도저히 공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야홍릉의 분부를 들은 그는 조용히 그녀의 아래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 차려진 산해진미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도 한경백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난 연기를 한 적이 없다.”

야홍릉이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시녀가 물고기탕을 떠서 그녀의 앞에 놓고 하얀색 숟가락을 건네주었다.

야홍릉은 옥으로 된 숟가락으로 물고기탕을 휘적이다 시선을 내리깔고 국물을 마셨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다들 물러가거라.”

“네.”

시녀들은 예를 올리고 조용히 선청을 떠났다.

선청에 둘밖에 남지 않자 한경백은 공기가 점점 차가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야홍릉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평소보다 배는 힘들어진 듯했다.

“나와 한옥금은 이미 원수가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 혹여나 속으로도 불필요한 억측을 자제하거라.”

한경백은 떨리는 시선으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 감히 억측하겠습니까?”

“한씨 가문은 내 손에서 연기처럼 흩어질 것이다.”

야홍릉은 담담한 말투로 입을 뗐으나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한씨 가문 서자인 네 결말 역시 한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파멸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려고 한다.”

야홍릉의 말을 들은 한경백은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씨 가문이 연기처럼 흩어질 거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한옥금이 공주를 암살하려고 해서 공주가 한씨 가문 전체를 복수하겠다는 건가?’

한경백은 자신의 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씨 가문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한 어사는 현재 조정 1품 관리에 고모는 황후였으며 현 태후 또한 한씨 가문과 친척 사이였다.

‘그런데 공주가 어떻게 한씨 가문을 파멸시킨다는 말이지?’

“너한테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야홍릉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는 한씨 가문과 명을 같이 하는 것. 즉 함께 파멸하는 것이지. 다른 하나는 내 저택에 남아 무사히 있는 것. 그러나 조건이 있다.”

한경백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는 원래도 침착한 사람이었다. 잠깐의 불안감을 느낀 그는 곧바로 침착함을 되찾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한씨 가문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경백은 야홍릉이 왜 한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야홍릉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던 한옥금이 왜 그녀를 암살하려 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한씨 가문의 서자일 뿐이었다. 즉 신분이 노비나 하인보다 약간 더 위일 뿐, 평소의 삶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그는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야홍릉이 그와 한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가 이 고귀하고 큰 권력을 손에 넣은 공주와 평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한씨 가문을 멸할 수는 없어도 한씨 가문 서자 정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래서 한경백은 그녀의 말에 반항할 생각이 없었다. 또 그녀의 앞에서 문인의 기개를 내세울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한씨 가문의 부인에게서 당한 괴롭힘으로 그의 기개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야홍릉에게 반항하기보다 평온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쉽게 망하지 않을 거라고?”

야홍릉은 물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행동은 느긋했으나 명문가 규수다운 우아함은 보이지 않았다.

“한씨 가문의 말로는 이미 정해졌다. 누구도 그들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야홍릉의 말투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한경백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참 침묵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한씨 가문의 서자로 가문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패기를 부려야 마땅하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씨 가문에서 받은 것이라곤 한씨라는 성씨와 괴롭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했지요.”

그의 말투는 매정해 보일 정도로 평온했다.

“만약 제가 한씨 가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 마땅하다면 할 말이 없으나, 전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저도 답하겠습니다. 저는 한씨 가문의 고귀한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내뱉은 ‘고귀한 사람들’에는 짙은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 서자가 권세 있는 집에서 생존하면서 느낀 고통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한경백은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자인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전에는 모든 불공평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는 모두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명문가 귀공자가 아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수를 덕으로 갚는 가식적인 모습을 연출할 생각도 없었다.

한경백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고기탕을 천천히 먹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조건 중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한경백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제가 못하는 일이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내 측부(側夫)가 되거라.”

‘뭐라고?’

한경백은 깜짝 놀랐다.

야홍릉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측부가 되면 네 목숨을 지켜줄 것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권력과 부귀영화도 모두 누릴 수 있게 허하겠다. 다만 절대 날 배신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안 그러면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경백은 몸을 흠칫 떨었다.

‘공주의 측부?’

측부. 한경백에게는 더없이 낯선 이름이었다.

목국은 남존여비 사상이 뚜렷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호국 공주라고 해도 그녀가 남편을 여러 명 거느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정정당당하게 첩실을 거느릴 수 있었지만 여인이 남편을 두 명 두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태후도 몰래 남자 노리개만 몇 명을 둘 뿐이었다.

물론, 태후와 공주는 상황이 달랐다.

한경백은 호국 공주의 입에서 측부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주의 측부는 황자의 측비(側妃)와 마찬가지였다. 물론 측비는 듣기 좋으라고 그렇게 부를 뿐, 사실상 첩실과 마찬가지였다.

측부가 있다는 것은 나중에 정식 남편도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공주의 정식 남편은 부마라 호칭했다.

‘그래서 공주는 남편을 여러 명 거느리겠다는 말인가?’

왠지 모르게 한경백은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야홍릉이 방금 말한 ‘한씨 가문의 말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과 측부가 될 신분을 떠오르자 더럭 겁이 났다.

선청의 공기는 쌀쌀했고 분위기는 불안할 정도로 조용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로 인해 한경백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또 한경백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국을 다 마신 뒤, 그릇을 앞으로 밀어놓고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한경백이 일어서서 배웅하려고 했을 때, 야홍릉은 이미 멀리 가버린 뒤였다.

공주는 애초에 그와 의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를 측부로 들이겠다는 통보를 남기고 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러시는 거지?’

한경백은 생각에 잠겼다.

‘한씨 가문 서자인 내 신분이 호국 공주에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서자의 신분은 어디 내놓을 수도 없는 초라한 것이었다.

한경백은 귀족 가문의 연회에 나갈 기회도 많지 않았다. 가끔 초대장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명문가 적자들의 들러리로 서거나 그들이 손가락질할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한경백에게는 약간의 학식이 있긴 했다. 그 외에는 그가 내놓을 만한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공주께서는 내 어디가 마음에 드신 거지?’

한경백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나에게는 한옥금과 꽤 비슷한 얼굴이 있기는 하지……’

그로서는 야홍릉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사실 야홍릉은 한경백에게서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남편’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남자가 나설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여인은 여인들만의 공간이 있었다.

야홍릉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제도의 귀족 아가씨들과 왕래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남자’의 신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측부가 필요했다.

그녀와 동맹 관계이며 같은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자 겁이 많지 않고 품행이 단정한 측부 말이다.

한경백을 부마로 세우지 않는 이유는 한씨 가문의 서자인 신분이 너무 비천했기 때문이다. 야홍릉이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니라 제도 전체의 사람들은 서자는 공주의 ‘정궁(正宮) 부마’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홍릉이 혼인을 하려면 절차를 밟아서 부마를 간택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자잘한 일들 모두 황제의 허락을 거쳐야 했다.

황제는 절대 한씨 가문 사람이 야홍릉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혼인할 필요도 없고 황족 족보에 올릴 필요도 없는 측부를 들이는 게 나았다. 사람들은 그저 그녀가 방탕하고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할 뿐,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행위가 수많은 억측을 낳겠지만 또 많은 불편함을 덜어주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더러 방탕하고 조신하지 않다고 해도 좋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군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 하나씩 이루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녀의 발걸음을 막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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