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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8)화 (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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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누구를 지키라는 건가?

야홍릉의 말을 들은 나신은 깜짝 놀랐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나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할 것은 없다. 난 너희들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나신은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제 목숨은 전하의 것입니다. 전하께서 십팔 층 지옥으로 가겠다고 해도 저는 흔쾌히 전하보다 먼저 지옥으로 뛰어들어 전하의 앞길을 터줄 것입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있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정말 지옥이 있다면 난 너희가 먼저 들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일어나거라.”

전생에 그들은 그녀 때문에 한 번 죽었다. 그녀는 그때의 빚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절대 그 누구도 나 때문에 죽게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전생에 그녀에게 빚을 지우게 한 사람은 현생에서 처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행복이겠지.’

군영을 둘러본 야홍릉은 수령의 병영으로 들어가 장군 몇 명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재 교대하여 휴식 중인 봉우도 불러왔다.

봉우는 야홍릉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좀 놀란 듯했다.

예를 올린 그는 바로 물었다.

“전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그와 나신은 비수가 그녀의 가슴에 박힌 것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그런 상처는 가벼울 수가 없었다.

“많이 나았다.”

야홍릉은 의자에 기댄 채,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온 것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다.”

시선을 들고 심복들을 바라본 야홍릉이 입을 뗐다.

“난 이미 한옥금과 사이가 틀어졌다. 너희도 앞으로 한씨 가문의 그 누구도 존중할 필요가 없다. 나를 제외하고 현갑군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없느니.”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황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야홍릉의 말이 끝나자 병영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신과 봉우, 그리고 다른 고급 장군들도 흠칫 놀랐다. 그들은 야홍릉의 말투에서 평범하지 않은 단호함을 느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그들은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들은 전하의 지시만 따르겠습니다!”

그전까지 그들은 야홍릉과 한씨 가문 사이에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하지만 야홍릉이 직접 말하니 마음속의 모든 궁금증과 의심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난 너희들의 충성심에 대해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너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이미 내가 잘 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2년 동안 나는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훈련이다. 끊임없이 훈련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여라. 나중에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너희는 여전히 가장 용맹한 정예병들이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장군들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힘이 넘쳤다.

“현갑군은 절대 전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공기 중에는 익숙한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는 군영과 전쟁터 특유의 분위기였다.

이들은 그녀와 함께 전쟁터에서 7년 동안이나 어깨를 나란히 한 동료였다.

전생에서 야홍릉은 7년 동안 전쟁터에 나가며 점차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점점 자신이 결벽증이 있다는 것도 잊고 동료들 사이의 피 냄새와 땀 냄새에 익숙해졌다.

전에 그녀는 이런 것이 바로 나라를 보호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를 위하고 충성을 다하는 용사라고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존중과 보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권자가 그들이 죽기를 바란다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세웠던 공로도 결국에는 명을 재촉하는 부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였으나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단단한 마음은 그녀의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을 만나지 못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성지를 전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고 가슴이 비수가 찔리던 죽기 전 마지막 느낌은 그녀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무엇인지 낱낱이 말해주었다.

야홍릉은 질질 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처가 좀 나은 첫 번째 날에 군영으로 가서 그녀의 뜻과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군영을 떠났다.

상처가 많이 나았지만 아직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군영에 남아 있어도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야홍릉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버티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녀는 자신의 몸을 혹사하지 않으려고 했다.

말을 몰아 황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호국 공주부 문밖에 도착하자마자 마차 하나가 서서히 다가왔다.

야홍릉은 가까워지는 마차를 바라보았지만 무시한 채 손에 든 채찍을 하인에게 주고는 저택으로 걸어갔다.

“능묵.”

야홍릉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흑의 소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부터 난 저택에서 그 어떤 손님도 맞이하지 않겠다.”

야홍릉은 지시를 마친 뒤, 안뜰로 걸어갔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들이지 말거라.”

“네.”

한편, 말을 모는 시위가 마차 문발을 들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전하, 7공주께서 이제 막 돌아오셔서 저택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알았다.”

시위는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일러줬다.

“우리 마차를 본 것 같습니다.”

마차 안에서 의자에 기대 책을 읽던 사람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일곱째 동생이 요즘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니 내가 많이 봐줘야지.”

시위가 대답했다.

“네.”

마차는 호국 공주부의 대문 밖에 멈춰 섰다. 청색 옥포(玉袍)를 입은 남자는 일어서서 마차로 향했다.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준수하게 생긴 데다 황족 특유의 느긋하고 우아한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옷을 정리한 뒤, 그는 대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올라서서 양옆의 문지기들에게 말했다.

“동생을 보러 왔으니 들어가서 고하거라.”

두 문지기는 4황자인 것을 보고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보고하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소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께서 오늘부터 손님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4황자 야정연(夜廷淵)은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냐?”

“주인님께서 오늘부터 손님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소년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돌아가십시오.”

야정연은 낯빛이 차가워졌다.

‘감히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는 자가 이렇게 방자하게 군다는 말인가?’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숨어있던 여덟 명의 호위무사가 양옆에서 몰려나왔다. 하나같이 몸집이 크고 기세가 날카로운 사람들이었다.

야정연은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살짝 변했다. 표정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과 한참 대치한 4황자는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갔다.

홍릉원에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야홍릉은 턱을 괸 채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때 옅은 피비린내가 코를 파고들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능묵을 불렀다.

“능묵.”

검은 그림자가 휙 다가오더니 한 소년이 대들보 기둥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소리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웬 피 냄새냐?”

소년은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하게 물었다.

“웬 피 냄새냐고 물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제 몸의 상처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했다.

그녀는 오전에 그에게 채찍질한 게 떠올라 더욱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왜 약을 바르지 않은 것이냐?”

‘약을 바른다고?’

능묵은 당황했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약을 바르라고 허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은위(隱衛, 숨어서 주인을 지키는 호위무사)는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약을 바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야홍릉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약간 미묘했다.

그녀는 일어선 뒤, 내실(內殿)로 들어가 침대 머리맡의 서랍에서 약 한 병을 꺼냈다.

그녀가 힘을 쓰자 약병이 능묵에게 날아갔다.

“약을 바르거라.”

소년은 약을 받아 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몸을 날려 순식간에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

야홍릉은 계속해서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이와 같은 수많은 버릇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많이 바뀌었다.

그 탓에 그녀는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게 사라졌던 것 같았다.

노을이 지고 검은색 장막이 서서히 하늘을 뒤덮었다.

연녹색 치마를 입은 시녀 첨향(添香)이 걸어왔다.

“전하, 저녁 드실 시간이에요. 오늘 저녁에는 홍릉원에서 식사하시겠어요?”

야홍릉은 창밖을 잠깐 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자죽원에 차리거라.”

“네.”

첨향은 예를 올리고 준비하러 돌아갔다.

야홍릉은 밖으로 걸어가며 지시를 내렸다.

“영일(影一), 며칠 동안 야자릉의 동향을 지켜보거라.”

어둠 속에서 영위(影衛)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이(影二), 4황자를 지켜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영칠(影七), 일주일 동안 심탁(沈卓)이 직권을 이용하여 뒷돈을 챙긴 증거를 4황자에게 전하거라. 절대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어두워지는 하늘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는 뼈를 에는 한기만 남아 있었다.

“영영(翎影).”

“네.”

“오늘부터 조정의 삼성 육부(三省六部)에 있는 모든 일을 알아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밤이 어두워지자 바람이 불어오며 꽃이 핀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놓았다. 옅은 꽃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맴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그녀의 우울한 시선과 닮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어두운 색깔의 먹구름은 겹겹이 쌓인 채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곧 다가오게 될 비바람을 암시하는 듯했다.

‘호국 공주. 호국이라……’

야홍릉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누구의 나라를 지키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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