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은 속으로 꽤나 놀랐다. 손에 든 계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금사망편(金絲蟒鞭)이었다. 이런 채찍은 특수한 약물에 담근 데다 금사가 섞여 있어 사람의 몸을 내리치면 살 속에 파고드는 것이었다. 힘껏 내리치면 자칫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이런 채찍으로 매질을 팔십 번 하면 어은위가 십여 년 동안 쌓은 무공을 한순간에 없애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피부가 조각조각 흩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계편의 위능은 가장 잔인한 고문 도구 못지않았다.
어은위는 모진 훈련을 거치고 나온 사람이었다. 신전에서 나온 허은위는 모두 갖은 훈련을 거쳐 몸이 더없이 단단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는 어은위들도 계편은 아주 무서워했다.
야홍릉은 매질을 더 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내 옆에 있거라.”
그녀는 계편을 던져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네 이름을 능묵(綾墨)이라 하겠다. 야홍릉의 릉에 검을 묵이다.”
“이름을 하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을 받은 능묵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능묵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네가 날 배신한다면 이 계편으로 너의 모든 살과 뼈가 조각이 되도록 매질하겠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그더러 홀로 상처를 처리하라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소년은 바닥에 엎드린 채, 홀로 작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마음속이 찌르르 아파왔다.
야홍릉은 홀로 저택에서 걸어 다니다가 뒤뜰의 정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호숫가에 앉아 활짝 핀 연꽃을 바라보았다.
한옥금을 알기 전에 그녀는 종종 혼자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그녀를 방해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한옥금을 알게 된 뒤로 그녀는 한옥금이 그녀를 방해하는 것을 한없이 봐주었고 급기야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시간 대부분을 군영과 전쟁터에서 보냈기에 한옥금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것 같으나 사실상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늑대에게 진심을 바쳤고 온화한 외모에 속아 가장 기본적인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이다.
부드러운 것은 뼈를 부식하는 독약이라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전하.”
시녀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다.
“8공주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야홍릉은 가늘게 눈을 떴다.
북릉(北陵) 황족의 8공주 야자릉은 그녀와 사이가 좋은 동생이었다. 3황자인 야소숙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야자릉은 한옥금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다.
전생에서 한옥금이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호숫가에 앉아 다시 태어난 뒤, 없애야 할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계산해 보았다.
‘야자릉이 첫 번째가 되려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야자릉은 대청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차가 바닥을 보이자 시녀가 또 한 번 조용히 차를 따라 주었다. 그녀가 짜증이 날 때쯤, 야홍릉이 천천히 걸어왔다.
대청 밖에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자 기마복을 입은 야자릉은 불만을 애써 억누른 채, 일어서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언니.”
야홍릉은 그녀의 열정적인 인사에도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야자릉은 얼굴이 초췌했다. 며칠 동안 속을 꽤 썩인 것 같았다.
하지만 황후의 적녀인 그녀는 예로부터 황족 공주의 우아한 품위를 잃지 말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마음속이 타서 재가 되더라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조용히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언니, 상처는 어떤가요? 어마마마께서 언니께 보약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수행 궁녀더러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를 따라온 여 관리는 모두 네 명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대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 관리 넷은 비단 함을 하나씩 들고 앞으로 나왔다.
함 안에는 궁의 창고에서 고른 인삼, 영지 등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야자릉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손수건을 꽉 틀어쥐었다.
“언니, 옥금 오라버니는…….”
‘옥금 오라버니?’
“천뢰에 있어.”
야홍릉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만나고 싶어?”
“아, 아니요.”
야자릉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청순한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전 그냥 옥금 오라버니가 정말 언니를 죽이려고 한 게 맞는지 물어보려고요. 오라버니는 언니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언니 혹시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아니면 누가 일부러 그를 모함하여 언니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다거나…….”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모함한 사람 없어.”
야자릉은 흠칫 놀랐다.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은 가련해 보였다.
“전 그냥 믿을 수 없어서요. 언니와 옥금 오라버니가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옥금 오라버니가 어찌…….”
야홍릉은 의자에 앉은 채, 말없이 그녀를 한참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되나 봐?”
야자릉은 깜짝 놀랐다.
“언니, 전 옥금 오라버니를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전 언니가 아직 옥금 오라버니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언니가 아바마마 앞에서 사정했을 리도 없잖아요…….”
‘사정을 했다고?’
야홍릉은 서슬 퍼런 표정을 짓고 입가를 올렸다. 그녀는 한옥금이 쉽게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인자한 사람이 아니야.’
“한옥금의 일은 걱정하지 말거라.”
야홍릉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걱정해도 소용없으니.”
야자릉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야홍릉은 일어서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거라.”
“언니.”
야자릉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쳐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며칠 뒤면 옥금 오라버니의 생일이에요. 전 오라버니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싶어요.”
이것은 허락을 바라는 말이 아니라 통보였다. 떠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야홍릉의 태도를 떠보고 있었다.
야자릉은 무술을 할 줄 모르고 병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도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공주였다. 이로 인해서 공주들 사이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우아하고 품위를 잃지 않으며 절대 적공주의 신분으로 잘난 척하지 않았다. 또 한옥금과 야홍릉의 관계 때문에 야홍릉 앞에서는 항상 다정하고 친근한 동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 야홍릉의 애매한 태도는 그 적공주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야홍릉은 입가를 올리며 담담하나 무정한 미소를 지었다.
“가고 싶으면 가려무나.”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적공주의 도도한 성미는 다른 사람에게나 소용 있겠는지 몰라도 야홍릉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야홍릉은 어렸을 때부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는데 그녀의 이런 꼼수가 야홍릉에게 먹힐 리 없었다.
야자릉은 표정이 굳어진 채, 대청에 서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일부러 한옥금의 생일이라는 말을 꺼내어 야홍릉의 태도를 살피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옥금 오라버니의 생일조차 언니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말인가? 한 달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전에 옥금 오라버니에 대한 진심은 모두 가짜였단 거야?’
야자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감정을 무기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중에는 절대 야홍릉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외롭고 차가우며 거짓으로 모습을 꾸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감정을 무기로 내세울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야자릉은 예전에 야홍릉이 한옥금을 대하는 감정은 진심이라고 확신했다.
진심이기에 야홍릉은 그를 위해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으며 또 그를 위해 갑옷을 벗고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려고 했다.
야자릉은 야홍릉이 한옥금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야홍릉이 보여준 태도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야홍릉은 연기를 하는 것뿐이고 사실 한옥금은 그녀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다. 그녀도 한옥금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연기를 하는 것이다.’
사실 야자릉은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는데, 야홍릉과 마주하자마자 생각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건 모두 야자릉의 망상이었을 뿐이었다.
야홍릉의 태도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주 전하.”
여 관리는 비단 함을 들고 물었다.
“이 물건들은 어찌할까요?”
야자릉은 그녀가 들고 있는 비단 함을 보더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이미 가져왔는데 당연히 두고 가야지, 가져갈 거야?”
“네.”
시선이 이미 멀어진 야홍릉의 등에 닿은 야자릉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껏 한옥금 때문에 야홍릉에게 살갑게 군 것이었다.
‘이미 사이가 틀어진 이상, 더는 우애 깊은 자매인 척하지 않을 거야.’
야자릉은 황후의 적공주였다. 황족의 모든 종친과 명문 세가의 귀족 여인들은 다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야홍릉을 상대하는 것은 그녀에게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잠시 뒤.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호국 공주는 성 외곽의 군영에 도착했다.
위용이 넘치는 십만 현갑군은 야홍릉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다. 3년 동안의 전쟁을 거쳐 그녀와 현갑군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돈독했다.
이들은 강자인 야홍릉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
백전백승의 전쟁을 이끄는 장군.
십만 병사를 전쟁에 이끌고 나갔다 그대로 돌아올 수 있는 수령.
영원히 사상자 인원을 백 안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군.
이런 위용을 보여준 야홍릉을 현갑군은 무적의 전신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옷을 입고 있는 나신이 걸어오며 물었다. 그의 시선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처는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훈련하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집에만 있어 답답하여 나와 보았다.”
나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야홍릉을 따라 훈련장 밖을 걸어가며 물었다.
“그동안 감히 묻지 못했으나 전하와 한 공자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야홍릉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저 지금부터 이 커다란 경성에는 야홍릉의 적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현갑군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난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