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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6)화 (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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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옷은 새로 살 테니 챙길 것 없다. 더없이 중요하여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것만 챙기거라.”

야홍릉의 시선은 한경백의 정수리에 닿았다.

“한경백, 내 말을 들었느냐?”

한경백은 공손한 자세로 일어났다.

“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한 어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의아하고 불안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왜 한경백을 공주부로 데려가는 것이지?’

싸늘한 얼굴의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어사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신은 공주 전하와 경백이가 함께 지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한 대인.”

야홍릉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온기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

“난 요즘 기분이 좋지 않네. 한옥금이가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한 글자도 더 말하지 말게.”

한 어사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한 부인은 몸이 휘청거려 무릎을 꿇고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야홍릉은 뜰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고 한 부인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곧 한경백이 걸어 나왔다.

그는 야홍릉의 말대로 자주 보는 책과 서찰, 그리고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검은색 함을 들고나왔다.

야홍릉은 힐끗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한경백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홍릉을 따라 걸어 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온 한경백은 야홍릉이 마차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마차를 따라 걸어가야 하나, 아니면 마차 앞의 말을 타고 가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이때, 야홍릉이 고개를 내밀고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차에 타거라.”

한경백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말을 마친 그는 마차에 올랐다.

한 어사와 한 부인은 한경백이 호국 공주의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자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호국 공주는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 그들과 얘기를 나눌 생각도 없는 듯했다.

마차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한 부인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국 공주는 도대체 무슨 뜻이래요? 설마 정말로 옥금을 죽여야 마음이 풀릴 건가요? 생각 좀 해보세요.”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소?”

한 어사는 고개를 돌리고 부인을 바라보았다.

“생각할 수 있는 수는 다 생각해보았소. 정말 좋은 수가 있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소?”

한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옥금이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내버려 둘 거예요?”

한 어사는 어두운 얼굴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르오. 폐하께서는 형부(刑部)에 심문하라는 명도 내리지 않으시고 직접 가서 물으시지도 않는데 내가 어찌 폐하께서 무슨 생각인지 알겠소? 나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낙담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태후와 황후 쪽에서 방법을 생각해주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소.”

탓탓탓.

바로 이때, 말발굽 소리가 다른 방향에서 전해졌다. 한 어사와 한 부인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큰아들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입구로 걸어온 한령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여기에 서서 뭘 하시고 계셨습니까?”

“호국 공주가 다녀갔단다.”

‘호국 공주께서? 왜 오신 거지?’

한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궁금증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아버지, 어머니, 옥금이를 구할 방법이 생겼습니다.”

“뭐라고?”

한 어사는 깜짝 놀랐다.

한 부인도 놀랐으나 기쁜 마음이 더욱 컸다.

“령아, 그게 정말이냐? 무슨 방법인지 얼른 말하거라. 공주 전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오해였지? 오해가 풀렸어? 옥금이는 언제 풀려날 수 있다느냐…….”

“어머니.”

한령은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듣는 귀가 많으니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셋은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주원(主院)에 도착한 한 어사와 한 부인은 한령이 말한 방법을 듣더니 표정이 굳어버렸다. 듣는 사람이 많아 방 안에는 세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령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버지,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불안한 마음이 든 한령은 굳은 표정의 부모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태후마마께서 생각하신 방법이라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경백이는 옥금이와 닮아서 조금만 치장하면 충분히 비슷해 보일 겁니다. 서자인 경백이가 옥금을 질투하여 옥금이로 분장하고 공주를 죽였다, 그리고 공주와 옥금 사이를 이간질하여 둘이 서로 미워하게 하였다…….”

“한경백은 이미 호국 공주가 데려갔다.”

한 어사의 말투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말이다. 떠난 지, 2각도 되지 않았다.”

‘뭐라고?’

한령은 표정이 굳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마차는 호국 공주의 저택 앞에 세워졌다.

한경백은 마차에서 내린 뒤,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물러섰다.

야홍릉은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한경백은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공주 전하.”

집사가 걸어오더니 한경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분이 한씨 가문 3공자이신가요?”

한경백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죽원(紫竹園)에 데려가거라.”

야홍릉은 싸늘한 말투로 말을 한 뒤, 또 한 마디 덧붙였다.

“앞으로 이 자는 여기에 묵을 것이다.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주거라.”

집사는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홍릉원(红菱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홍릉원의 문을 굳게 닫고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저녁 무렵.

궁에서 내시가 검은색 옷을 입은 소년과 함께 찾아왔다.

“전하, 이것은 폐하께서 전하께 드리라고 하신 칼입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공주 전하가 나라의 기둥이시기에 절대 위험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올해 신전(神殿)에서 나온 어은위(禦隱衛)를 전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자가 공주 전하의 안전을 지킬 겁니다.”

‘어은위?’

야홍릉은 천천히 시선을 들고 내시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보았다.

열일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에 차갑고 도도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오관은 준수하고 기질은 뛰어나 보였다. 검은색 옷에 감싸인 몸은 훤칠하고 말라서 날렵해 보였다. 그에게서는 늑대 같은 난폭함과 매정함이 돋보였다.

야홍릉은 차가운 시선으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폐하의 뜻을 이행했으니 저는 궁으로 돌아가 폐하께 보고해야 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내시는 몸을 굽히며 말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은위라고?”

야홍릉의 말투는 여전히 싸늘했다.

소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두 팔로 채찍을 내밀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야홍릉의 시선은 채찍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이 채찍이 신전의 계편(誡鞭)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신전에서 갓 나온 어은위는 모두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전 이름이 없으니 주인님께서 하사하여 주십시오.”

‘이름을 하사해달라?’

야홍릉은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폐하의 사람이냐?”

“주인님께서 저한테 이름을 하사하시면 전 주인님의 사람이 됩니다.”

소년이 대답했다.

야홍릉은 서늘한 한기를 뿜으며 말했다.

“지시받고 온 사람을 내가 믿을 수 있겠느냐?”

“주인이 정해지면, 주인님만, 단 한 분의 말만 따릅니다.”

소년은 무릎을 꿇은 채, 계편을 들고 꼼짝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이름을 하사하시고 훈계와 질책을 해주십시오.”

야홍릉의 말투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래서 넌 내 동향을 폐하께 고하지 않겠다는 말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손에 든 계편을 받았다.

“옷을 벗거라.”

소년은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어은위는 항상 훈련하고 격투에 참여하기에 입고 있는 옷은 항상 가벼웠다. 그래서 벗기가 수월했다.

옷이 허리춤까지 벗겨지자 단단한 가슴팍과 등근육이 드러났다.

몸에는 장기적인 훈련으로 인해 생긴 듯 보이는 각종 상처가 남아 있었다. 색깔이 짙은 것도 있었고 연한 것도 있었으며 푸르고 자주색을 띠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어렸을 때 생긴 것인지 색깔이 연해져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최근에 생긴 것이었다.

많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몸은 여전히 탄탄하고 예뻤다. 균형을 이룬 몸선과 군살 없이 마른 허리, 건강한 피부색까지 더해진 소년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면하는 표범처럼 위험한 기운을 풍겼다.

그는 온순하나 날카로웠다.

야홍릉은 그의 몸을 감상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오른손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채찍은 귀를 찌르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소년의 등을 후려갈겼다.

선명한 핏자국이 나타났다.

소년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으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리도 전혀 내지 않았다.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매질에 이어 곧바로 두 번째 매질이 떨어졌다.

소년의 등에는 두 줄기의 핏자국이 생겼다.

야홍릉도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 손의 힘이 일반인과 달랐다. 소년의 마음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가득한 그녀는 힘껏 모질게 매질했다.

연속된 세 번의 매질에 소년의 등에는 핏자국이 세 개나 생겼다.

소년은 등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고 숨도 가빠졌다. 바닥에 올려놓은 두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런 매질을 몇 개나 버틸 수 있느냐?”

소년은 숨을 가다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주인님의 힘으로는 팔십 대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팔십 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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