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가짜로 바꾸다
야홍릉의 마음에 아직도 한옥금에 대한 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능한 얘기였다.
야홍릉이 한옥금에 대한 사랑이 남아서 이 모든 것이 한경백의 음모라고 스스로 납득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황당하다고 여겨도 이 일을 다시 추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제도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고 한옥금을 무죄로 석방하려 할 것이다.
“야홍릉이 이 거짓말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황제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 할 것이 아니냐?”
태후의 싸늘하고 위엄이 넘치는 얼굴에 단호한 표정이 어렸다.
“황제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 자네들은 걱정하지 말게.”
한옥금이 7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를 천뢰에서 내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경백과 옥금은 닮은 데가 있어 조금만 치장하면 바로 가짜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긴 침묵이 이어진 뒤, 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택으로 가서 아버지와 이 일을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는 어림군의 수령이나 천뢰는 조정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렇게 경비가 엄한 곳에 한경백을 집어넣고 한옥금을 빼내는 일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방법을 잘 생각해보아야 했기에 한령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령이 자안궁을 떠난 뒤, 황후는 계속 남아서 태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마마마, 이렇게 해도 될까요?”
황후 한씨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천뢰의 경비가 엄하여 한경백을 집어넣기 쉽지 않아요. 게다가 호국 공주가 이번 일은 한경백의 소행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큰일 아닌가요?”
만약 이번 일이 정말 한경백이 한 일이라고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둘 사이가 그렇게 좋은데 야홍릉이 찔린 뒤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한옥금이 한 번도 문병하러 간 적이 없는지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한옥금은 호국 공주의 상태가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는 왜 한경백이 공주를 찌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한경백이 한 일이라 뒤집어씌우기에는 허점이 너무 많았다. 죄명을 한경백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만으로 한옥금이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옥금이 무사히 천뢰에서 나와 한씨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이번 암살의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잡아떼면 되지.”
태후는 겉으로는 인자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후궁의 여인 중 최후의 승자로 살아남은 여인이 어찌 인자하기만 하겠는가?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밖에는 그동안 아파서 한 달간 누워있었다고 말하면 되지. 한 달 동안 혼절해 있다가 깨어나 보니 이런 일이 벌어져 있었다, 자신은 전혀 몰랐다고 하면 될 게야.”
황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은 내가 알아서 생각해보마.”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태의를 찾아 말을 맞춘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그 말을 들은 황후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경백과 한옥금은 좀 닮은 데가 있었다. 이는 그들의 어머니가 자매이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정실이었고 동생은 첩실이었다. 두 자매가 한 남편을 섬겼다.
한경백의 용모와 분위기는 한옥금과 비슷하여 친형제인 한령보다 더 친형제 같았다.
하지만 서자는 중시를 받을 수 없는 법. 용모가 비슷하나 지위는 천지 차이였다.
한경백은 그저 하인보다 지위가 조금 더 높을 뿐이었다. 정말 한경백을 천뢰에 넣을 수 있다면 이유는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경백이 저택에서 냉대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한씨 가문의 2공자의 자리를 탐내 일부러 한옥금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할 수 있었다.
암살을 시도한 사람이 한경백이라고 해도 한씨 가문에는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서자가 죄를 지은 것은 적자가 지은 것은 천지 차이였다.
거기에 서자가 음모를 꾸며 적자에게 뒤집어씌웠다고 한다면 상황이 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유를 충분히 준비해야 했다. 어떤 질문을 하든 완벽하게 받아친다면, 그렇게 야홍릉이 한옥금의 억울한 상황을 이해하게 만든다면 너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야홍릉은 억울한 일을 당한 한옥금을 불쌍하게만 여길 것이다.
한씨 가문이 받을 악영향도 지금보다는 훨씬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황후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말했다.
“역시 어마마마는 현명하십니다. 신첩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태후는 씨익 웃으며 황후의 찬사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궁에서 작전을 짜고 있을 때.
야홍릉은 궁을 나선 뒤, 마차를 타고 한씨 가문의 대문 밖에 도착했다.
보고를 들은 한 어사는 바람처럼 뛰쳐나왔다. 그는 야홍릉을 보기도 전에 마차를 보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공주전…….”
“경백더러 나오라고 하시게.”
야홍릉은 싸늘한 말투로 울부짖으려고 하는 한 어사의 말을 잘랐다.
“내가 만나고 싶으니.”
‘한경백을?’
한 어사는 깜짝 놀랐다. 순간 그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전하께서 경백을 만나시려는 겁니까?”
야홍릉은 문발을 열어젖히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말을 또다시 반복해야 하는가?”
한 어사는 흠칫 놀라더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하인에게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경백이를 불러오거라. 얼른!”
하인은 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어사는 고개를 돌리고 마차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이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고 한 어사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한 달 동안 애타게 기다린 그는 야홍릉이 깨어나면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지만……
‘공주 전하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야홍릉은 예전에도 차갑긴 했으나 그가 한옥금의 아버지인 것을 봐서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 도도한 얼굴로 한 어사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그녀는 한 어사를 개미 보듯이 보고 있었다.
한 어사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도 이 순간에는 한옥금이 야홍릉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면 야홍릉이 왜 이렇게 차갑게 변했겠는가?
곧 하인이 돌아왔다. 하지만 혼자였다.
“대인…….”
한 어사는 고개를 돌리고 한경백이 없이 하인만 나온 것을 보자 버럭 화를 냈다.
“3 공자는?”
한경백은 한씨 가문의 서자였다. 공주의 부름은 물론이고 부모님이 불러도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대…… 대인께 아룁니다…….”
하인은 무릎을 털썩 꿇고 말했다.
“삼 공자께서 지금 벌을 받고 계십니다…….”
“뭐라고?”
한 어사는 깜짝 놀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야홍릉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하인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길을 안내하거라.”
그리고 말없이 어사부로 걸어 들어갔다.
한 어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따라갔다.
“공주 전하!”
한경백은 2월생으로 올해 갓 스무 살이 되었다. 그는 몸집이 말랐고 얼굴은 한옥금과 마찬가지로 준수하고 온화한 미남형이었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는 정실과 친자매이니 한옥금과 용모가 비슷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세는 많이 달랐다.
한옥금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으로 항상 눈에 띄었다. 그는 경성에 있는 아가씨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경백은 조용하고 늘 옅은 색깔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항상 사람이 없는 구석에 숨은 그는 한옥금의 그림자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야홍릉은 한옥금과의 사이 때문에 한씨 가문의 서자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경백이 조용하고 겸손하다고 느꼈다.
다만, 서자라서 그에 맞는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
한씨 가문의 부인은 한경백에게 아주 엄격했다. 귀족 무리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야홍릉이 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한경백이 몸집이 건장한 두 하인에게 제압당해 춘등(春凳, 등받이가 없는 넓고 긴 고급 구식 걸상의 일종)에 엎드려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귀부인은 옆에 서서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어미는 이미 없으니 내가 어머니로서 너를 단단히 혼내야겠다.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게 말이다.”
그녀는 양옆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쳐라!”
무거운 곤장이 떨어지려는 순간, 분노가 담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거라!”
두 하인은 깜짝 놀라며 하마터면 손에 든 곤장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들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 주인을 바라보았다.
“대인?”
귀부인은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뒤에 따라온 사람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7공주 전하?”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한 부인의 위풍이 대단하시군.”
한 부인은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하, 옥금이는……”
한옥금이 감옥에 갇힌 순간부터 그녀는 식사를 잘하지도, 잠을 잘 자지도 못했다.
그녀는 야홍릉이 찾아오자 순간 희망을 느꼈던 것이다.
“무엄하구려!”
한 어사는 부인이 무례를 범하려고 하자 다급히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공주 전하를 뵙고서도 예를 올리지 않고 뭣 하는 것이오?”
아주 무식하고 아둔한 여인이었다.
한 부인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다가 또 싸늘한 표정의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의 얼굴이 굳게 굳은 것을 보고 그녀는 흠칫 놀랐다.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뻣뻣하게 무릎을 꿇고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있던 하인과 호원, 시녀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춘등에 엎드려 있던 한경백도 조용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한경백은 흰색에 가까운 옅은 장삼(長衫)을 입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했다.
무릎을 꿇는 자세마저도 비굴하고 공손해 보였다.
“한경백, 너에게 2각의 시간을 주겠다. 가서 짐을 챙겨 나오너라.”
야홍릉의 말투도 여전히 싸늘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공주부로 가자.”
한경백은 깜짝 놀란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공주 전하?”
한 부인도 놀란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한경백을 공주부에 데려가겠다고? 그럼 옥금이는? 우리 옥금이는 어찌하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 어사를 바라보았다.
한 부인의 눈길은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호국 공주가 깨어나면 오해가 풀린다면서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옥금이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