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불안한 마음
여러 명의 태의가 애를 쓴 후에야 야홍릉은 목숨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침대에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못해도 삼 개월 뒤에나 무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태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황제는 화가 났지만, 한옥금이 왜 갑자기 야홍릉을 죽이려고 했는지 알아볼 여유가 당장 없었다. 지금 바로 해야 하는 일은 변방에 사람을 보내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문무 관리들은 모두 3황자 야소숙(夜蕭肅)을 추천했다.
야홍릉을 제외하고 그는 황제의 자제들 중에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운 유일한 황자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른 장군들은 만이족의 전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서 간다고 해도 큰 도움이 안 되었다.
하지만 야소숙은 황후의 적자인데다 태자의 적임자로 꼽히는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따져보면 그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경성을 떠나면 야소숙에게는 불리한 일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야소숙은 당연히 경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고민했으나, 결국 야소숙더러 전쟁에 나가라고 명을 내렸다.
황제에게는 야소숙 한 명보다 목국의 강산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황후마마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말리려고 찾아가셨으나 성지(聖旨)가 이미 내려진 뒤라 되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사대 장군은 공주의 궁전 안에 서서 무거운 얼굴로 궁중에서 벌어진 일을 야홍릉에게 전하고 있었다.
“전하, 한옥금이 왜 전하를 암살하려고 한 겁니까?”
‘왜냐고?’
침대에 누워있는 야홍릉은 안색이 창백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는 싸늘함과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나야말로 알고 싶구나.”
야홍릉조차 한옥금이 전생에 왜 그렇게 모질게 그녀를 칼로 찔렀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실수할까 걱정되었는지 치밀하게 비수에 독을 묻히기까지 했다.
그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야소숙을 수령으로 정하여 전쟁터에 보낸다면 폐하께서는 꼭 너희도 그와 함께 가라고 할 것이다.”
야홍릉은 곧 울적한 생각에서 빠져나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심(羅尋), 봉양(鳳陽), 너희 둘은 야소숙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거라. 그리고 2년 동안은 절대 그가 다시 제경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여라.”
네 장군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의 뜻은…….”
‘2년간 야소숙이 제경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변방에서…… 모쪼록 잘 지내도록 하거라.”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슴팍에서 극심한 고통이 전해지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지 절대 돌아오지 못하게 하거라.”
나심과 봉양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야홍릉에게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나신(羅辛), 봉우(鳳羽), 너희들은 폐하께…….”
야홍릉의 시선에는 차가운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내 상처가 심하여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날 대신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하니 못……, 못 떠난다고 하거라.”
나신과 봉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들은 야홍릉이 걱정되었다. 만약 그녀가 네 명 모두에게 야소숙을 따라 전쟁터로 가라고 했다면 오히려 더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야홍릉이 먼저 이렇게 말해주니 그들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네 명의 장군 중 두 명은 떠나고 두 명만 남아 있으면 황제도 허락할 것이다.
“가보거라.”
야홍릉은 눈을 감았다. 안색이 아주 창백했다.
“좀 쉬고 싶구나.”
“네.”
네 명이 떠난 뒤, 야홍릉은 홀로 침대에 누워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그녀라 해도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내가 정말 돌아온 건가.’
경제(景帝) 13년 봄, 야홍릉은 열일곱 살이던 해로 돌아왔다.
이때는 그녀와 한옥금이 알게 된 지 십 년째 되는 해이자 사랑한 지 삼 년째 되는 해였다. 동시에 그녀가 홀로 병사들을 이끌고서 전쟁터에 나간 지도 삼 년째 되는 해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사혼(賜婚, 황제가 혼인을 하사하여 명분을 줌)을 해달라 두 번이나 간청했다. 매번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그녀는 항상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사혼을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항상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옥금의 아버지는 정1품 어사였고 고모는 황후였다.
고모인 황후 슬하의 3황자 야소숙은 적자였고 그의 삼촌은 관리들을 감사하는 감찰(監察)이었다. 이토록 한씨 가문은 아주 권세가 높은 가문이었다.
만약 야홍릉이 한옥금과 혼인한다면 그녀 휘하의 신책군(神策軍)은 틀림없이 3황자의 편에 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황자들이 경쟁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도 커다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스물한 살 되던 해, 즉 전쟁에 참가한 지 7년 되던 해에 만이족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그녀는 황제가 경계심을 풀고 사혼을 허락하게 하려면 반드시 모든 군공과 병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권을 전부 내놓기도 전에 야홍릉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고 말았다.
비수가 심장을 찌르던 아픔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아프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이었다.
야홍릉의 시선에는 뼈를 에일 것 같은 한기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지금도 한 자, 한 자 그녀의 귓가에 또렷이 맴도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조차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황제는 직접 야홍릉의 공주부를 압수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반역죄라는 죄명으로 그녀가 전쟁터에서 7년 동안 세운 공로를 말살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네 장군도 모조리 죽였다.
공주부의 사람들 수백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살해당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야홍릉은 심지어 이 모든 일을 누가 꾸민 일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양옆으로 내려뜨린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야홍릉은 천천히 눈을 감고 시선에 담긴 증오를 감췄다. 그녀는 음모를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 생에는 절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녀와 생사를 같이한 장군과 병사를 제외하고 그녀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은 야홍릉의 핏기 없는 입술에 차가운 냉소가 피어올랐다.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웃음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한옥금. 야소숙. 그리고 나의 부황…….’
‘내가 지옥에서 돌아온 것은 너희들의 목숨과 이 제경(帝京) 강산을 가져가기 위한 것이다.’
‘난 전생의 억울함을 깨끗이 씻을 것이다. 물론 전생에 너희에게 바쳤던 충성심과 보잘것없는 진심까지도.’
그리고 야홍릉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황제는 나신 일행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녀 휘하의 네 장군 중 두 명은 야소숙과 함께 변방으로 가게 되었고 나머지 둘은 경성에 남아 호국 공주의 현갑군(玄甲軍)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야소숙은 조정에 현갑군 이만 명을 데려가겠다고 청을 올렸다. 현갑군이 용맹하며 전쟁에서 만이족을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청은 합당한 청이 아니었다.
현갑군은 호국 공주 휘하의 병사였기 때문이다.
현갑군은 인원이 십만 명밖에 안 되었으나 실력은 오십만 대군 부럽지 않게 강했다.
야홍릉이 직접 육성해낸 병사들인 현갑군은 하나 같이 정예병 중의 정예병이었다.
현갑군은 야홍릉을 따라 곳곳에 전쟁하러 다니면서 수많은 공로를 거두었다. 그리고 거듭되는 전쟁을 통해서 호국 공주에 대한 충성심도 공고했다.
현갑군이 복종하는 사람은 호국 공주밖에 없었다. 야홍릉을 제외하면 황제조차 그들을 부릴 수 없었다.
황제는 야소숙이 제기한 청을 듣고 내심 놀랐다.
잠깐 망설이던 황제는 야홍릉의 기분을 헤아려 바로 야소숙의 청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바로 아끼는 승상을 직접 공주부에 보내 야홍릉의 뜻을 물어보라고 한 것이다.
야홍릉이 허락해야만 야소숙은 현갑군 이만 명을 데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터에 가서도 야소숙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승상이 호국 공주부에 도착했을 때, 공주가 또다시 혼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 깨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승상은 헛걸음하였고 야소숙은 애써 굴린 잔꾀가 헛수고로 돌아가게 되었다.
야홍릉이 직접 입을 떼지 않은 한, 그리고 야홍릉의 병부(兵符)가 없는 이상, 그 누구도 현갑군을 호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일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야소숙은 야홍릉이 혼절했다는 말을 듣고 따뜻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곱째의 몸이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화를 크게 냈다.
찻주전자와 꽃병들이 땅에 잔뜩 깨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전쟁에 나가기 싫어! 변방에 가기 싫다고!”
그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이를 악물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만이 가득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지? 왜?!”
서재에는 사람이 두 명밖에 없었다.
야소숙을 제외하면 청색 옷을 입은 중년 문관뿐이었다. 그는 야소숙이 화를 한참 쏟아내기를 기다렸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일었다.
“이번 일은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성지가 이미 내려왔으니 따르지 않는 건 대역죄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변방에서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라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야소숙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아 씩씩거렸다.
지금은 태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한옥금이 옥에 갇힌 건 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만약 그가 야홍릉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명이 사실로 드러나면 한씨 가문의 지위는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런 시기에 변방에 가라니.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면 조정 상황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대신 현갑군 이만 명을 데려가 야홍릉을 견제하려고 했더니 상처가 깊었는지 다시 혼절해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야소숙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모든 것이 그가 예상하지도 못하게 일어났다. 그는 지금까지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중년 문관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얼른 준비하시고 떠나시지요. 폐하께서 의심하실 겁니다.”
변방의 상태가 위급하여 황제는 그더러 바로 짐을 싸서 떠나라고 명했다.
야소숙은 숨을 들이쉬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어머니와 외삼촌을 뵐 수가 없군. 자네가 기회를 봐서 그들더러 침착함을 잊지 말라고 해주시게.”
중년 문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소숙은 눈을 감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정 안되면 자릉이더러 호국 공주부로 가서 상황을 살피라고 하게. 어마마마에게 좋은 물건이 있으면 야홍릉에게 선물하라고 하고.”
중년 문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소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건의 진실이 뭐든 한옥금더러 절대 이 죄를 인정하지 말라고 하게!”
중년 문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할지 잘 아니 전하께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었다.
밖에서 두 명의 장군이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야소숙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를 따르는 십오만 병사와 함께 변방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