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다
3월 중순,
봄기운이 한껏 느껴지는 날이었다.
어사(禦使) 가문의 적자 차남 한옥금은 하얀 경포(輕袍)를 입고 말을 탄 채, 호국 공주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편액에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옥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깐 침묵하더니 돌계단을 올라 대문에 들어섰다.
공주는 그에게 공주부를 드나들 때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주었다.
그래서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온화한 느낌의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긴 옷자락이 땅을 스쳐 지날 때마다 더없이 멋진 느낌을 주었다.
한옥금은 목국 제경(帝京)의 귀족 여인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한때 한 어사 가문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중매쟁이들로 인해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수많은 여인이 한 공자의 아내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한옥금은 절대적인 실권을 가진 호국 공주를 택했다.
귀족 여인들은 화가 나도 발만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다.
한옥금은 살구나무 숲을 지나 호국 공주가 묵는 홍릉원(紅綾苑)에 들어섰다.
화랑 앞에 선 그는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댄 뒤, 심호흡을 했다.
끼익.
방문이 열리자 한옥금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는 흠칫 놀랐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봄이 성큼 다가와 공기 중에서도 옅은 복숭아꽃 향기가 났다.
향긋한 냄새는 사람들의 코를 간지럽혔다.
야홍릉은 말없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타서 재가 되더라도 이 사람을, 아니 저 개자식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번 생에는 기필코…….’
꿈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펼쳐졌다.
전생에 저 개자식에게 진심을 주고 배신을 당했던 야홍릉.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또다시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반드시…….’
“전하?”
한옥금이 정신을 차리고 활짝 웃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고 자상했다.
“제가 도화원(桃花苑)에서 전하께 송행연(送行宴, 무사히 전쟁을 마치고 오라는 의미의 연회)을 준비했습니다. 황자들과 공주들도 모두 오셨습니다.”
‘도화원? 송행연?’
야홍릉은 시선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옛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내일은 그녀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날이었다.
전생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해는 아니었다.
‘올해…… 내가 몇 살이더라? 아, 열일곱 살……’
오늘은 그녀가 열입곱 살 되던 해로, 전쟁에 나가기 전 열렸던 송행연 날이었다.
야홍릉은 제왕의 일곱 번째 딸이자 목국의 전설 호국 공주였다.
그녀는 다섯 살에 무술을 연마하고 일곱 살에 병서를 줄줄 읽을 수 있었다. 열 살에는 검 하나로 목국의 고수들을 쓰러뜨렸다.
열두 살에는 전쟁터에 나갔고 열네 살부터 홀로 병사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했다. 그렇게 휘황한 인생을 살다가 경제(景帝) 17년, 봄에 죽었다.
병사를 이끈 7년 동안 야홍릉은 도성과 전쟁터를 오가며 수많은 적을 무찔러 죽였다. 그렇게 그녀는 목국을 철통처럼 단단히 지켰다.
그랬던 야홍릉은 자신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옥금은 그녀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그녀가 전쟁을 나가기 전에 도화원에서 연회를 열어 주곤 했다.
연회에서 옥금은 황자, 공주들과 함께 그녀가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고 목국을 지켜주길 기원했다.
7년 동안, 이 과정은 이미 관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야홍릉이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한옥금은 그녀에게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 한을 만들어주었다. 바로 독이 묻은 비수로 그녀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야홍릉이 사랑했던 황제는 그녀 휘하에 있는 사대 장군을 사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야홍릉이 사랑했던 오라비들은 그녀가 황권에 위협이 된다면서 그녀를 사지에 몰아넣었다.
‘이 원수를…… 어찌 갚아야 한다는 말인가?’
야홍릉의 차가운 시선에 비웃음이 스쳤다. 야홍릉은 자신의 표정이 드러날까 봐 몸을 돌렸다.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다오.”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에서 예전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자 한옥금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불안한 느낌은 한층 심해졌다.
시녀들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공주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게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빗겨 주고 눈썹을 그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홍릉라상(紅綾羅裳)을 입고 비단으로 된 허리띠를 두르자 키가 크고 마른 그녀의 몸매가 더욱 부각 되었다.
미간에 빨간색 화전(花鈿, 고대에서 귀부인들이 미간에 그려 넣는 장식)을 그려 넣자 거울에 비친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는 고귀함과 요염함이 돋보였다.
“옥금.”
야홍릉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얼음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차갑기만 했다.
“줄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라고?’
한옥금은 깜짝 놀라서 멍한 얼굴로 여인의 싸늘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의 눈은 아주 아름다웠다.
한옥금을 바라보는 새카맣고 맑은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전혀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순간, 한옥금은 온몸의 피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호국 공주 야홍릉은 차가운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 그녀가 이런 시선으로 한옥금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한옥금을 부드럽게 대했다. 일반 여인들처럼 애교를 부리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온화한 면은 항상 한옥금에게 한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
곱게 치장한 야홍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 비친 여인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요염한 미인이었다. 미간 중심에 그려진 빨간색 화전은 그녀의 도도함과 요염함을 한껏 부각했다.
높은 산 위에 핀 꽃처럼 고귀해 보이나 다가갈 수 없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다들 나가거라.”
시녀들은 다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뒤, 빠른 속도로 나갔다.
빠른 걸음에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눈부신 봄 햇살이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와 여인의 고귀한 얼굴에 드리웠다. 그녀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한옥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위압감이 그를 조여왔다.
“전하?”
한옥금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왜…….”
“들어오세요.”
야홍릉은 화장대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문을 닫아요.”
한옥금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녀의 말대로 일어나 방문을 닫았다.
야홍릉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고 작고 정교한 비수를 꺼냈다.
“옥금, 이 비수는 저의 호신용 물건이었어요.”
한옥금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다가가 여인의 가는 허리를 안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르시니 항상 위험하지요. 호신용 물건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비수에 닿았다.
낡고 검소한 구리 칼집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봉황의 모습이 평범해 보이는 비수에 존귀함을 더해주었다.
이 비수는 황족의 보물이었다. 야자릉 공주도 가지고 싶어 했지만, 황제는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오를 수 있는 야홍릉에게만 비수를 주었다.
“전하께서 줄 선물이 있다고 한 것이……”
한옥금은 미간을 살짝 움직였다. 속으로 짐작이 갔다.
“설마 이 비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가지고 싶어요?”
한옥금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때라면 저한테 뭘 선물해도 기쁘기만 하겠지만 곧 전쟁터로 나가시니 호신용품을 몸에 지니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호신용품이라고?’
야홍릉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호신용품이라…… 목숨을 빼앗는 무기겠지.’
“옥금, 이 비수가 제 심장을 찌른다면…….”
야홍릉은 몸을 돌리고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없이 평범한 얘기를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떨 것 같아요?”
‘뭐라고?’
한옥금은 당황했다. 그가 야홍릉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뜨뜻한 피가 얼굴에 튀었다.
한옥금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곧 가슴팍에서 큰 고통이 느껴졌다.
그는 공주의 발에 차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퍽!
몸이 병풍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원들과 이제 막 공주부에 들어선 사대 장군은 흠칫 놀라며 다급히 뛰어왔다.
“전하!”
쾅!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전하!”
방 안의 모습에 뛰어온 장군과 호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색마저 창백해졌다.
네 장군은 침대 앞까지 뛰어와 몸을 숙이고 가슴에 비수가 꽂힌 야홍릉을 바라보며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전하……!”
야홍릉은 무기력하게 침대다 리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옥금을 가리켰다.
“죽, 죽이지 마…….”
그리고 눈을 감더니 곧 혼절했다.
“전하!”
“어서! 태의, 태의를 불러와!”
“전하! 전하!”
“한옥금이 호국 공주를 죽이려고 했다! 얼른 황제 폐하께 보고하라!”
호국 공주의 저택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 * *
한옥금이 호국 공주를 죽이려고 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갔다.
황제는 크게 화를 냈다.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혼란스러운 시국에 많은 것을 묻지 못하고 한옥금을 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리고 태의에게 공주부에 가서 야홍릉을 치료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만이족은 야심이 커 변방에서 여러 번 전쟁을 일으키며 목국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호국 공주가 삼 년간 병사들을 이끌고 변방을 지켰기에 만이족은 항상 패배하고 말았다.
며칠 전에 변방에서 받은 전보에 의하면 대장군 위형(衛珩)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지금 변방에 수령이 없다는 말인데, 변방에서는 만이족에서 전쟁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니 호국 공주를 보내 병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달라고 요청한 참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호국 공주가 암살당할 뻔한 것이다.
그녀를 죽이려고 한 것도 다름 아닌 한씨 가문의 적자 한옥금이라니!
한옥금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현 황후의 조카이자 한 어사의 차남이었다. 그의 형은 어림군(禦林軍) 총수이자 황제가 각별히 아끼는 신하였다.
한씨 가문은 목국 사대 가문 중에서도 가장 권력이 드센 가문으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한옥금은 야홍릉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제경 전체가 야홍릉이 한옥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야홍릉은 그를 위해 갑옷을 걸치고 전쟁에 나가고, 직접 황제에게 그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 청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한옥금이 호국 공주를 죽이려고 들었다니.
이 당황스런 소식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