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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0)화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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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진심을 이렇게 저버리다니

밝은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밤.

말 한 마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밝은 달빛 아래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질주했다. 은빛 반짝이는 달빛 아래서 말은 섬뜩한 핏빛 잔영을 남기며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목국(穆國)에서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血寶馬)는 한 마리밖에 없었다.

바로 호국 공주(護國公主)인 야홍릉(夜紅綾)이 타고 다니는 말이었다.

말은 커다란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무관 복장을 한 서늘한 표정의 여인이 민첩한 몸놀림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여인은 채찍을 옆에 있는 하인에게 건네주고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에 들어갔다.

백의(白衣)를 입은 남자가 저택의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서 공주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다들 시선을 아래에 두고 머리를 숙여 여인에게 예를 올렸다.

목국 유일한 여장군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드러낸 것이다.

여인은 시선을 들고 맨 앞에 있는 백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싸늘했던 그녀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옥금(玉锦).”

“돌아오셨습니까, 전하?”

한옥금은 인지하게 웃더니 앞으로 다가가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없어요.”

야홍릉은 고개를 젓고는 남자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번 전쟁을 마치면 만이(蠻夷)족들이 좀 잠잠해질 거예요. 옥금, 전 내일 아침 병권을 내놓고 이제 더 이상은 세상일에 신경 쓰지 않겠어요. 우리 날짜를 잡고 식을 올려요.”

“병권을 내놓는다고요?”

한옥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잘 생각해보시고 내린 결정입니까?”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더 이상 전쟁터와 조정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한옥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야홍릉은 저택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밤은 점점 깊어졌다.

달이 구름 뒤에 숨은 것처럼 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급기야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캄캄해졌다.

하늘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새까맸다.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야홍릉의 침전(寢殿) 안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야홍릉은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항상 싸늘하기만 했던 그녀의 눈빛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꿈꿔왔던 미래를 말했다.

“오랫동안 병사들을 이끌다 보니 지쳤어요. 옥금, 앞으로 저와 함께 세상 일을 뒤로 하고 금슬 좋게 알콩달콩 사는 건 어때요? 그래도 서운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어찌 서운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를 알게 된 것은 제 평생 가장 큰 영광입니다.”

한옥금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전하야말로 저를 위해 병권을 포기하고 모든 영예를 저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아까울 건 없습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전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니까요.”

한옥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옥금에게 물었다.

“다른 장군들도 황성(皇城) 밖에 도착했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 보고 싶어서 저는 먼저 급히 왔어요. 그들은 내일 저녁이 되어야 도착할 거예요.”

“그렇군요.”

옥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안심이라고요?”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

그때였다.

야홍릉은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목소리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야홍릉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팍에 박힌 비수를 바라보았다.

이 고통이 모두 착각처럼 느껴졌다. 어찌 이런 일이.

“옥금?”

야홍릉은 시선을 들었다. 부드러운 눈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어느새 이글거리는 분노만 남아 있었다.

“당신……,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한옥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소매를 정리했다.

“전하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 긴 연기도 끝이 났군요.”

야홍릉의 입가에 검은빛이 도는 피가 스며 나왔다.

비수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야자릉(夜紫菱)이지 야홍릉이 아닙니다.”

한옥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하게 잔인한 사실을 말했다.

“호국 공주의 직책은 나라를 보호하는 거지요. 이미 적을 물리쳤으니 호국 공주의 임무도 끝난 것입니다. 이제 제가 전하를 보내드리지요.”

“당신, 당신이 어떻게……”

야홍릉이 가까스로 입을 열자 시커먼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창살을 잡았다.

“왜…… 왜 이러는 거지?”

“저와 자릉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옥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의 존재는 황권에 위협이 될 따름이지요. 황자들은 다 전하가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온몸의 힘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한때 사랑했던 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 제대로 보고 싶었다.

“한옥…….”

탕! 탕! 탕!

쾅! 쾅! 쾅!

하늘을 뒤흔드는 큰 소리가 또다시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깼다. 밖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야홍릉은 머리가 어지럽기만 했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났다.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힘주어 창살을 잡고 있었지만,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호국 공주가 반역을 일으켰다! 황제 폐하께서 공주부(公主府)를 포위하라고 명하셨다!”

“호국 공주가 적과 내통하여 반역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호국 공주와 공주 휘하의 사대 장군을 사살하여 국법을 바로잡으라고 명하셨다!”

격양된 목소리가 공주부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공황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어지러운 발소리, 병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마찰음, 그녀의 죄명을 알리는 외침까지.

수많은 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야홍릉은 조각상처럼 침대 위에 엎드린 채, 굳어 있었다.

그녀는 생명의 기운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커먼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어찌 이런 일이. 바보같이 저런 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니. 만약 나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이 있다면…… 네 놈에게, 너 같은 놈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저런 버러지 같은 놈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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