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7화. 대결말 (12)
사방화는 이제 회임 오 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배는 더 불러왔고, 초지가 줄곧 사방화를 살피곤 있었지만 매일 진강을 걱정하느라 사방화는 하루하루 메말라가고 있었다.
하루 반나절은 잠만 자고, 깨어있는 시간엔 안을 좀 걷는 것이 전부였다.
사방화도 분명 진강이 무사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밤마다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영친왕비도 밤마다 사방화를 살피느라 몇 차례 잠에서 깼고 보름 만에 얼굴이 다 핼쑥해졌다.
역시 또 사방화가 매우 미안해하자, 영친왕비는 사방화를 다정히 위로했다.
“아무리 그래도 회임한 너보다 힘들까. 너무 걱정 말고 태교에 힘쓰거라. 이제 겨우 다섯 달이잖니. 남은 다섯 달을 위해서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사방화도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단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러다 진강이 돌아오자 사방화도 비로소 마음을 놓고 편안한 밤을 맞았다. 매일 밤 배를 마구 걷어차던 아이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강아, 아무래도 네가 있어야겠다. 반나절을 곁에 있어도 기운을 차리질 못하더니 네가 오니까 바로 안색도 좋아졌어.”
진강도 혀를 내두르는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며칠 새 너무도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조그만 놈이 태어나고 나면 조모님 체면을 살려주지 않은 죄로 호되게 혼내겠습니다. 맞을 만하지요.”
“어디 감히 내 손자를 때리려고!”
진강이 혀를 쯧쯧 차자, 영친왕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님께서 널 감싸고 도실 땐 네가 버릇없이 자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이제야 그 마음을 좀 알겠구나.”
“어머니께서도 절 감싸고 도셨잖습니까.”
영친왕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 달간 품어 낳은 내 새끼를 어찌 애지중지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방화도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 * *
한 달 후, 남진은 봉황곡과 능양군(凌阳郡)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두 달 뒤엔 비자관(妃子关)과 풍주(沣州)까지 함락시켰지만, 석 달이 지나니 군량미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겨울에 접어들어 군량미가 떨어진 데다 이는 곧 병사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져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방화는 이제 회임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하루 열두 시진 중 열 시진은 침상에만 누워 보내야 했다.
한편 초지는 사묵함을 살리느라 기혈을 모조리 써버린 탓에 몸조리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사방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하루 내내 의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하루하루 생명의 불씨를 잃어가는 사방화를 살릴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지날수록 정말 사방화는 위태롭게 시들어갔다. 심혈 역시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고 있는 듯했다.
초지는 온종일 어두운 안색으로 사방화의 곁을 지켰으며, 진강도 나날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영친왕과 영친왕비도 어느 날 갑자기 큰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밤낮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이제 어인관 장군부의 모든 이들에겐 웃음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군량미가 다급하단 소식이 전해지자, 진강이 청암에게 분부했다.
“청암, 외숙부님과 은희에게 연락해, 그간 비축해 둔 군량미를 직접 풍주로 옮겨달라고 전해라.”
청암이 주저하자, 진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가는 김에 의안에게도 가서 때가 됐으니 더 이상 봐주지 말라고 전하고. 풍주로 군량미만 전해 주고 서둘러 돌아오라고 전해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청암이 서둘러 떠났다.
* * *
보름이 지나, 군량미가 무사히 풍주로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 보름 후, 왕의안이 제운설을 죽였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비보가 들렸다.
사은희가 진옥을 구하려다 제운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사방화는 순간 손에 든 약사발을 떨어뜨렸다.
‘은희가 죽었다고? 우리 은희가 죽었어……? 그 예쁜 아이가…….’
영친왕비는 넋을 놓은 사방화를 보고 기겁하며 말했다.
“방화야! 흥분해선 안 된다……!”
진강은 서둘러 덜덜 떨며 울고 있는 사방화를 끌어안았다.
“은희가 어찌…… 그 여린 아이가 어찌 폐하를 구하려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 봐요!”
사방화의 절규에, 진강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제운설이 완전히 미쳐서 살기를 품고 진옥을 죽이려던 순간, 사병으로 분장한 은희가 진옥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고 하오. 진옥의 말로는 은희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고 했소. 제운설이 악에 받쳐 어떻게든 목숨을 끊어놓겠다고 덤비는데, 의안도 다친 상태라 제때 나서질 못했소.”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단 말이야……? 은희가 목숨을 걸고…….’
순간 사방화는 마음이 미어져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사방화는 언젠가 정화곡에서 봤던 외로운 시 하나가 떠올랐다.
「굳게 갇힌 사랑의 봄은 서글프도록 늦어지고, 불을 지핀 이는 끝내 돌아오질 않는다.」
그것이 정녕 제운설의 숙명이었나? 하지만 제운설은 사은희까지 죽음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사은희는 정말 마지막까지 자신의 목숨을 다해 진옥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결국 사방화는 진강을 껴안고 구슬픈 울음을 토해냈고, 영친왕비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진강도 슬픈 눈으로 사방화를 따뜻하게 토닥였다.
“아마 이게 그 아이가 원했던 결말일지도 몰라. 진옥과 혼인은 못 해도 평생 진옥에게서 잊혀질 순 없는……. 상처 위로 쏟아 내리는 비처럼, 때때로 기억이 쏟아질 때마다 진옥은 늘 쓰라리고 가슴이 아프겠지.”
사방화의 기억에도 사은희의 어여쁜 미소는 여전히 생생했다. 수많은 사씨 사촌 형제 중에도 유독 친했던 동생이라 사방화는 더 마음이 아팠다.
영친왕비도 곧 울음을 그치고, 목 놓아 우는 사방화를 달랬다.
“방화야,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잖니.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절대…….”
그 순간, 사방화의 안색이 일그러지더니 곧장 배를 움켜잡았다.
“왜?”
진강도 놀라 묻자, 사방화는 눈물을 매달고 사색이 되어 말했다.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진강은 깜짝 놀라 서둘러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초지를 불러오거라!”
소등자가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서 방화를 침상으로 옮기거라.”
영친왕비도 다급히 외치자, 진강은 서둘러 사방화를 안고 침상으로 향했다.
“방화, 배 말고는 또 어디가 아픈 것이오?”
진강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사방화는 고개를 저으며 구원처럼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아이가…… 나올 것 같아요.”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니! 방화야, 너 설마……!”
영친왕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포궁 문이 열린 것 같아요…….”
진강은 어리둥절한 채로 몸을 덜덜 떨며 물었다.
“뭐가 열렸다고?”
사방화는 이내 진강의 손을 놓고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진강, 당신은 나가 있어요. 어머님, 어서 산파를 모셔와 주세요…….”
영친왕비도 황성을 급히 떠나는 중에도 산파 4명을 데려왔던지라 다급히 그들을 불렀다.
“여봐라! 어서 산파를 데려오너라!”
시화, 시묵은 조산기를 보이는 사방화를 보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아, 아이가 나오려 하니 넌 나가 있거라.”
영친왕비가 떠밀자,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곁에 있어 줄 거예요.”
사방화는 애처롭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아이가 나오려는 것일 뿐이에요. 당신은…….”
“뭐라 말해도 당신 옆에 있을 거니 괜히 힘 빼지 말고 말 그만하시오.”
사방화가 힘겹게 영친왕비를 바라보자, 영친왕비도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예로부터 사내가 산실에 있는 법은 없었지만, 넌 상황이 다르니 괜찮다. 방화야, 강이가 옆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거라.”
사방화는 눈을 감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고통스러워하는 사방화를 보며, 자신이 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방화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음이 미치도록 한스러웠다.
그러다 잠시 후, 진강은 돌연 사색이 됐다.
“방화! 당신한테서 피가 나오!”
영친왕비는 즉각 진강의 팔을 찰싹 때렸다.
“이 녀석아! 아무것도 아닌 걸로 놀라지 좀 말거라! 산실에 있을 거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그런 뒤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은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다.
진강은 새빨간 피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겁에 질린 듯 말했다.
“어머니…….”
“괜찮아. 포궁 문이 열려야 아이가 나올 수 있는 거야.”
영친왕비의 말에도, 진강은 온몸이 다 굳어버렸다. 눈앞의 새빨간 피를 보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방화도 그런 진강이 더 놀랄까 걱정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입술을 꼭 물고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다.
“방화야, 아프면 소리를 내지르거라.”
영친왕비가 안쓰러운 듯 말했지만, 사방화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영친왕비는 다시 진강을 힐끗 보다, 사방화의 입술에 손수건을 물려줬다.
“어머니! 손수건을 왜 물리시는 겁니까? 숨을 못 쉬면 어떡하려고요?”
진강이 즉각 소리치자, 영친왕비가 정색하며 말했다.
“너 정말 한 번만 더 말하면 산실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네가 뭘 아느냐!”
진강은 겁에 질린 채 손수건을 꼭 문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 * *
잠시 후, 초지와 산파 4명이 황급히 들어왔다.
남자인 초지는 본래 산실에 들어와선 안 되지만 사방화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따지고 들 시간이 없었다.
초지 역시 사방화가 덮은 이불이 온통 피로 범벅된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허둥지둥 맥을 짚어보았다.
진강은 초지가 심각한 말을 할까 봐 두려워, 그에게서 눈도 떼지 못했다.
이내 초지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뗐다.
“아이 위치는 정상이나 방화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난산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시작됐으니 우선 약을 좀 먹이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다녀오거라.”
영친왕비가 서둘러 초지를 내보냈다.
시화와 시묵이 처방전을 들고 따라 나가 약을 달였고, 아이를 받아낸 경험이 많았던 산파들은 산실로 들어와 서둘러 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 * *
반 시진이 지나, 시화와 시묵이 약을 들여왔다.
사방화는 약을 먹은 뒤 통증이 좀 가라앉은 듯 손수건을 빼냈지만 여전히 숨을 돌릴 기운도 없어 보였다.
진강은 정말 대신 아플 수 없어 속이 다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방화, 좀 어떻소?”
진강이 온통 땀과 피로 젖은 사방화를 애절하게 보며 말했다.
사방화는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숨을 살짝 들이마셨다.
진강은 사방화보다 더 심하게 땀을 흘리며 온몸이 거센 비에 젖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울에 나란히 비춰보면 사방화보다 진강이 더 딱한 모습일 것 같았다. 진강 스스로도 평생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일 듯했다.
“본래 아이를 낳을 땐 전부 이렇다고 들었어요. 전 괜찮으니 걱정 마요.”
진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금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에 영친왕비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아이를 낳을 땐 전부 이렇단다. 며칠 내내 산통을 겪다 겨우 낳는 이들도 있고. 조금 전 초지가 약을 내줬으니 괜찮다. 방화는 조산이라 며칠 내내 이어지진 않을 거야.”
한쪽에 서서 사방화의 상태를 지켜보던 초지도 진강을 안심시켰다.
“약을 먹었으니 곧 약효가 나타날 겁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방화는 다시 산통이 밀려왔고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전보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사방화는 진강을 생각해 입술을 꼭 물고 소리를 참았다. 영친왕비는 그런 사방화를 안쓰러워하며 다시 입술에 손수건을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