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6화 (976/978)

976화. 대결말 (11)

진강이 진옥을 보며 말했다.

“상의도 다 마쳤는데 군영엔 언제 돌아갈 거냐?”

“내일 아침에 갈 거다! 오늘 밤엔 백부님과 한 잔 기울이고.”

영친왕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승을 거두었으니 당연히 한잔해야지요.”

이내 영친왕비가 영친왕을 살짝 흘겨보았다.

“절 못 가게 막으실 땐 언제고 이젠 저보다 더 신나셨습니다?”

그리고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아가, 그간 시간이 남아돌아 아기 옷과 신발, 양말을 만들었으니 한번 보거라. 네 맘에 들지 모르겠구나.”

사방화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든 것만 있는 줄 아니? 태후마마, 영강후 부인, 좌상 부인, 우상 부인, 연람과 금연까지 네가 회임했단 소식을 듣고 다들 모여 아기 물건을 만들었단다. 금세 마차 한가득 채워졌어.”

사방화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감동의 눈빛을 일렁였다.

“이 아이가 참 복이 많네요.”

“그럼! 네 배 속에 자리 잡은 것부터 아주 큰 복을 타고난 거지.”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사방화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부모님이 없다면……, 그걸 정말 큰 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방화는 차마 더는 생각할 수 없어 그냥 엷은 미소만 지었다.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심경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아기 옷을 만들며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신이 나 있었다.

이렇듯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온 덕에 어인관이 한껏 떠들썩해졌다.

* * *

장군부에선 잔치를 벌여 진옥, 진강, 영친왕, 정명, 송방, 연석, 진경이 둘러앉아 술을 마셨고, 사방화와 영친왕비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차에 실었던 아기 물건을 내리자 방이 한가득 메워졌다. 아기 옷, 신발, 양말 외에도 베개, 이불, 장난감들까지 가득했다. 전부 아주 좋은 재료를 골라 한땀 한땀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어머님 말씀이 맞을지도 몰라요. 정말 복을 타고난 아이네요.”

사방화의 감탄에, 영친왕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너희 셋 다 복이 넘치지.”

사방화는 한참을 망설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절 미워하진 않으실 거죠?”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방화야,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이해한다. 강이가 널 좋아하게 되고 네가 아니면 장가도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부터 난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봤었어. 여기 오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이건 네 탓이 아니다. 다 운명이고 팔자인 게지. 너와 강이는 반드시 이 화를 거쳐 가야만 하게 돼 있어.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하거라. 무사히 이 화를 넘어갈지 또 누가 알겠니?

만일 최악의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면 사돈 어르신께서 너와 묵함을 기르셨듯, 왕야와 아이를 정성껏 길러 줄 테니 걱정 말거라. 반드시 어른이 될 때까지 무사히 길러 주마.”

사방화는 눈물을 머금은 채 울먹거렸다.

“어머님…….”

영친왕비도 눈시울이 붉어져선 사방화를 폭 껴안았다.

“우리 아가, 울 게 뭐가 있니? 아이를 품은 네가 가장 고생이 많을 거다. 어머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단다.”

사방화는 떨어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며느리가 될 수 있었던 건 제 평생의 복이에요.”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넣어 두거라. 강이가 네게 장가들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평생의 복이지. 남진 백성들도 널 얼마나 찬양하는지 사리에 밝고 심성도 강한 데다 나라를 생각하는 대의까지 있는 여인이라며 입 아프게 떠들어 대더구나. 오는 길에도 네 칭찬에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어머님.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착하기도 하지!”

영친왕비가 사방화의 손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진옥, 연석, 정명, 송방, 진경은 군영으로 돌아갔다. 영친왕도 군영에 따라가려 했지만, 진옥이 만류했고 사방화의 건강과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지도 않아서 그는 그냥 영친왕비와 함께 어인관에 남기로 했다.

진강은 당연히 사방화의 곁을 지켰다. 전선에 가고 싶어 했던 사방화도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등장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화도 이제 어떤 말을 하든 영친왕비가 절대 보내주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제운설이 매술을 쓰면, 우리 남진에선 누가 상대해요?”

사방화는 진강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진강은 저번과 똑같은 답을 했다.

“올 사람이 있으니 그때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사방화도 진강이 말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 묻지 않았다. 어쨌든 제운설도 크게 다쳐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으니 전선도 무사할 것이었다.

* * *

진옥이 떠나고 이틀이 지나, 사묵함이 어인관에 도착했다.

사방화는 사묵함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팔을 톡, 때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깜짝 놀랐잖아요. 초지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조부님께선 손자인 오라버니를 먼저 보내실 뻔했어요.”

사묵함이 웃으며 말했다.

“그땐 그저 폐하만 생각했다. 남진에 나 하나쯤은 없어도 되지만 폐하께서 없으면 안 되잖아. 폐하께서 날 업고 돌아오시던 길에서 그때야 생각이 들었지. 내가 정말 죽는다면 연로하신 조부님은 어떡하나, 몸도 안 좋은 너까지 마음고생 하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다.”

사방화가 사묵함의 품으로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오라버니, 부디 무사해야 해요.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할지도 모르고 제운설은 악에 받쳐 있어요. 또다시 위기에 빠지면 그땐 초지도 살려내지 못할 거예요.”

사묵함이 동생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알겠다. 매제와 폐하께서 상의하신 대로 남은 전투는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테니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다. 네 몸만 신경 쓰거라.”

사방화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묵함은 어인관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강이 그를 막아섰다.

“형님, 올 사람이 있으니 같이 데려가시지요. 이틀 뒤면 도착할 겁니다.”

사방화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응? 누가 오는 거예요?”

“오면 알게 될 것이오.”

다시 같은 대답이 이어지자, 사방화가 진강을 째려보았다.

“계속 이럴 거예요?”

“내 입으로 이름을 말하기가 싫어서 그런 것이오.”

사방화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리고 이틀이 지나, 왕의안이 어인관에 나타났다.

사방화는 그 소식에 한참을 멍하니 있다 진강에게 물었다.

“진강, 당신이 말했던 사람이 왕의안이었어요?”

“응.”

진강이 답했다. 

“중요한 일이라고 청암을 보냈던 것도 왕의안을 어인관으로 부르기 위해서였던 거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안을 오라버니 편에 보내서 제운설을 상대하게 하려는 거예요?”

진강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로 의안을 움직인 거예요?”

이내 진강이 사방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내가 맞을 테니 당신은 여기 있으시오.”

* * *

진강이 나가고 두 시진이 지난 뒤, 그는 혼자 돌아왔다.

“응? 의안은 왜 같이 안 왔어요?”

“곧장 묵함 형님을 따라 군영에 가겠다기에 보냈소.”

“그렇게 서두른다고요?”

“지금쯤이면 제운설도 기운을 차렸을 거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만 되면 곧장 출병시킬 게 뻔하니. 하양성의 병사들을 저대로 시간만 끌게 놔둘 수도 없을뿐더러 군량미가 넉넉하지 않잖소.

의안이 오지 않았다면 진옥과 상의한 대로 안정적으로 싸우려 했다만 이렇게 와주었으니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낫소. 전쟁이 길어지면 나라에 빚만 늘어나고 군량미도 시급해질 테니 불리해지기만 해.”

사방화는 진강이 무슨 수로 왕의안을 데리고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거란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의안이 와주었으니 이제 문제없을 거예요. 제운설도 의안에겐 상대가 안 될 거고 언신도 중독돼 깨어나질 못하는 데다 북제 황제도 다쳤으니 말이에요.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진옥의 상대는 되지 못했을 거예요. 제언경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되면 남진이 대승을 거둘 일만 남았네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니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이만 생각하시오.”

“알겠어요.”

사방화도 왕의안이 남진을 도우러 와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 * *

사묵함은 왕의안을 데리고 하양성 30리 밖 남진 군영으로 돌아갔다. 진옥은 친히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이튿날, 남진은 하양성을 향해 출병했고 제운설은 다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전선에 나섰다. 어차피 사방화도 더 이상 매술로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단 걸 알고 있기에 제운설도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전쟁에 왕의안이 등장할 거란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운설이 왕의안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남진을 돕는 것이냐? 네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강에게 시집 가버린 사방화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냐?”

왕의안이 차갑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제운설이 웃음을 터뜨렸다.

“복수? 왕의안,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누가 네 아버지란 거냐? 청운관의 왕 노장군 말이냐?”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모두 내게 하늘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연히 갚아야 하지 않겠나?”

왕의안은 이미 양아버지 왕 장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왔다. 제운설도 그런 그와 입씨름 한다는 건 더 이상 의미도 없음을 알았다.

제운설도 모친 란 장로에게서 매술을 전수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충실히 익혔지만, 진정한 매족 왕실 후예 앞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왕의안의 순결하고 맑은 술법의 기운은 제운설의 살기를 짓눌렀고, 제운설은 결코 왕의안의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약삭빠른 제운설은 끝내 왕의안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 * *

3일 후, 남진은 하양성을 함락시켰다.

북제 황제, 제운설, 제언경은 병마를 이끌고 풍곡구(风谷口)로 후퇴했다. 

남진은 며칠간 정비를 마친 뒤 풍곡구를 공격해 열흘 만에 점령했고, 북제는 또다시 후퇴해 호구산(虎口山)까지 물러났다.

호구산은 이름 그대로 산세의 입구가 입을 쩍 벌린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꼭 그곳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다 집어삼킬 것만 같은 형상이었다.

옥조천은 그 호구산에 1,000마리의 사나운 호랑이들을 키웠다.

이제 그는 무공을 쓰진 못하지만, 그 위력만은 여전했다.

그렇게 1,000여 마리 호랑이는 모두 제운설에게 넘겨졌고, 매술로는 왕의안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제운설은 꾀를 써 호랑이들을 산에 배치했다.

남진의 사병들과 말은 사나운 호랑이들 앞에서 더 이상 호구산으로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 *

이 소식이 어인관으로 전해지자, 진강이 말했다.

“호구산에 다녀와야겠소.”

“호랑이를 쫓으러 가는 거예요?”

“늑대를 다스리는 법과 호랑이를 쫓는 법은 어차피 다 비슷해. 늑대를 다스릴 수 있으면 당연히 호랑이도 쫓을 수 있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되니까 같이 가요.”

진강이 바로 사방화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의안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오? 당신을 데려가는 게 더 마음이 놓이질 않아. 어머니, 아버지도 걱정하실 테니 여기서 기다리시오. 호랑이만 쫓고 나면 금방 돌아올 테니. 길어도 보름이야.”

사방화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이 호구산으로 떠나고 열흘이 지나, 진강이 그 사나운 1,000여 마리 호랑이들을 모두 다 거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기세로 남진은 북제 군을 되받아치기까지 했고 악에 받친 제운설은 피를 토하며 또다시 봉황곡(凤凰谷)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윽고 정확히 보름 만에 진강이 다시 어인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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