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화. 대결말 (10)
곧이어 소천자가 음식을 가져왔고, 진옥에게 젓가락과 그릇을 챙겨줬다.
식사 후, 진강이 진옥에게 말했다.
“진옥, 우선 좀 쉬다 와라.”
“안 피곤해. 상의할 게 있어 온 거다.”
“아니, 내 눈 버리게 하지 말고 어서 좀 씻고라도 오든지. 방화도 재워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와.”
진옥은 피식 웃다가 사방화를 한번 보곤 콧방귀를 뀌며 방을 나섰다.
이내 사방화가 팔로 진강을 톡톡 건드렸다.
“진강, 며칠씩이나 잤는데 어떻게 더 자요? 걱정되면 좋게 쉬고 오라고 하시면 되지, 왜 또 성질을 긁으세요.”
진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일국에 황제가 쓰러지면 어찌하나? 다 저 자식 좋으라고 한 것이오.”
사방화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진강, 저분이 황제폐하신 건 알고 계셨던 거죠? 근데도 어쩜 그렇게 변함이 없어요? 오히려 당신을 더 높여 부를 때도 있잖아요. 정말 머리가 달아나도 모자랄 실례네요.”
진강도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뭐 해볼 테면 해보라지!”
“정말 이 천하에 우리 낭군님 목을 가져갈 이는 한 사람도 안 보이네요.”
진강은 곧 사방화를 소중히 끌어안고 말했다.
“기운이 많이 돌아온 거 같으니 오늘 밤엔…….”
사방화는 헛기침을 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기운이 돌아왔다고 해서 힘이 있는 건 아니에요.”
진강은 이내 사방화에게 입을 맞추며 나른히 속삭였다.
“그럼 이 정도는? 당신은 힘들이지 않아도 되니 괜찮겠지…….”
사방화는 진강의 짙은 입맞춤에 다시금 정신이 아찔해졌다.
* * *
하룻밤 쉬고 나니 진옥도 기운이 많이 돌아온 듯했다.
기운을 되찾은 연석도 아침 일찍부터 진강과 사방화의 숙소에 찾아와 어서 나오라며 화당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진강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평소처럼 아주 여유롭게 준비한 뒤, 사방화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연석은 사방화의 부른 배를 보고 감탄을 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배가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몇 달입니까?”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넉 달 좀 넘었네요.”
“열 달간 품고 있는 것도 아주 고생이라던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연석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응, 문제없습니다.”
연석은 사방화에게 엄지를 척 치켜세우곤 시화에게 말했다.
“어서 종이와 묵을 내오거라.”
시화가 어리둥절 해하며 물었다.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람이가 몇 번이고 내게 소왕비마마 초상을 그려 보내달라고 안달이었어요. 어서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괴롭힐 테니 꼭 보내줘야 합니다.”
사방화가 즉각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 꼴이 말이 아니에요.”
“어디가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름답기만 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진강도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연석이 시화에게 재촉했다.
“어서 내오거라.”
사방화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시화, 안 돼. 대신 내가 연람에게 서신을 써 보낼게요.”
“아, 초상화 한 점 그리는 것뿐인데 뭘 그러십니까? 회임한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강 소왕야, 혹시 회임한 소왕비마마 초상을 갖고 계십니까?”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고요? 달마다 한 점씩 그려서 아이가 태어나면 보여줘야지요! 어찌 지금껏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은 겁니까?”
사방화와 진강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끝내 자신이 죽게 되면 아이에게 자신의 초상이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초상을 그려 기념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내 진강도 연석에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근데 그려도 내가 그릴 거야. 연람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가 간직할 것이니 넌 눈독 들이지 마.”
연석이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저 쪼잔한 부부! 대신 람이에게 서신을 보내겠다고 약조했으니 그건 꼭 들어줘야 합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바로 쓸게요.”
그때, 소천자가 다가와 말했다.
“강 소왕야, 폐하께서 의사를 나누러 오라고 하십니다. 소왕비마마께선 마음 편히 계셔야 하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강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부했다.
“방화 오늘 밤이면 어머니, 아버지께서 어인관에 도착하실 테니 당신은 여기서 편히 쉬고 있으시오.”
사방화는 속으로 진옥을 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요.”
연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가겠습니다.”
* * *
진강과 연석이 떠난 뒤, 사방화가 시화, 시묵, 소등자에게 분부했다.
“이제 어머님, 아버님께서 오실 테니 깨끗이 청소하고 가까운 곳에 머무실 방을 마련해줘. 부엌엔 두 분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도 준비해 두라 전하고.”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두 분 말고는 또 누가 와?”
사방화가 물었다.
“정명 공자님, 송방 공자님과 8황자마마께서도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마마. 널린 게 하인들이니 알아서 다 준비할 겁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쓸모없는 사람이 돼 버린 것 같네. 내가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두 분께서 그 먼 황성에서 여기까지 오실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자 시화가 즉각 말을 이었다.
“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왕야께서 들으시면 속상해하실 겁니다. 본래 회임을 하면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회복하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겁니다.
왕야와 왕비마마께서도 마마를 보고 싶어 먼 길을 오시는 것일 겁니다. 왕비마마께서 어떤 성격이신지 잘 아시잖습니까. 왕야께서도 왕비마마를 말리시다 끝내 함께 따라나서셨을 겁니다.”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껜 하나뿐인 아드님인데, 하필 나 때문에 목숨이 이어져 있으니……. 어머님껜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야. 뵐 면목도 없어.”
“아닙니다, 마마! 소왕야와 마마의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겁니다. 마마의 탓이 아닙니다. 왕비마마께서도 소왕야껜 마마뿐이라는 걸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행여 마마를 탓하실 분도 아니고요.”
시화의 위로에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해도 어쨌거나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마마, 계속 그렇게 자책하시면 아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왕비마마께서도 절대 원치 않으실 거예요.”
사방화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시화 넌 날 너무 잘 알아. 이렇게 생각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 진강은 뭘 했어?”
“매일 마마 곁을 떠나시지도 않고 약을 먹여 드리고 챙기셨습니다. 그간 소왕야께서 홀로 마마를 돌보셔서 저희야말로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사방화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었고?”
“아! 소왕야께서 청암을 어디론가 보내신 것 같았습니다.”
“청암을 보냈다고? 어디로?”
시화가 고개를 저었다.
“소왕야의 분부를 받고 어인관을 나가는 것만 봐서 어딜 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강이 기른 사병도 모조리 진옥에게 넘겨 하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데다 그 진옥도 현재 여기 어인관에 와 있는데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 청암을 보낸 걸까?
* * *
진강과 진옥, 연석은 의사당에서 반나절 동안 의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의사당을 나오자 누군가 다가와 아뢰었다.
“왕야와 왕비마마의 대열이 어인관에 도착했습니다.”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예상보다 빨리 오셨네.”
진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마음 졸이며 오셨을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바로 그때 사방화가 내원에서 황급히 달려나왔다.
진강은 곧장 사방화를 따라가 조심스레 손을 잡고는 왜 그렇게 빨리 뛰냐며 잔소리를 쏟았다. 사방화는 그런 그를 힐끗 째려보긴 했지만 이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두 사람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만 같았다. 진옥도 그런 연인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저 둘만 무사하다면 진옥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 * *
곧이어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대열이 장군부에 다다랐다.
휘장이 걷히고, 영친왕과 영친왕비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진강과 사방화를 마주했다. 진옥, 진강과 사방화는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영친왕은 사방화의 볼록 솟아오른 배를 보고 눈동자가 떨리며 한동안 말도 잇지 못했다.
영친왕비는 시녀의 부축도 받지 않고 마차에서 거의 뛰어내려와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았다.
“방화야, 우리 방화. 날도 추운데 어찌 방에 있지 않고 나와 있는 게야? 한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사방화가 말을 하려던 순간, 영친왕비는 즉각 진강을 때리며 화를 냈다.
“이 자식은 어찌 회임한 부인을 함부로 바깥에 데리고 나온 게야! 옷도 이리 얇게 입었는데 풍한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진강은 익숙한 듯 팔을 매만지며 슬쩍 뒤로 물러나 손을 내저었다.
“제가 데리고 나오고 싶어서 나온 줄 아십니까? 두 분이 오셨다는 소식에 말릴 새도 없이 뛰어나온 거란 말입니다.”
“변명은 무슨! 지금껏 소식 한 통 보낼 줄도 모르고! 네게 어미가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는 것이냐!”
“걱정하실까 봐 그런 거잖습니까.”
“방화가 회임했단 것도 숨기더니 우리가 알고 나면 걱정 안 할 줄 알았더냐! 이 썩을 놈!”
영친왕비는 계속해서 진강의 팔을 때렸다.
그러다 진강은 한쪽에 서서 웃고 있는 사방화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여기 제 아들이 보고 있습니다. 아비가 되어 자식 앞에서 이렇게 맞아서야 되겠습니까?”
영친왕비는 순간 멈칫하며 사방화의 배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진강을 흘겨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어 영친왕비는 조심스레 사방화의 배를 문지르다가 갑자기 멈칫하며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방화야! 태동이 느껴지는구나. 날 막 발로 찬다!”
사방화도 깜짝 놀라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영친왕비는 흥분해 목소리까지 떨려왔다.
“아주 힘껏 차는 걸 보니 틀림없이 아들이로구나! 내가 자기 아비를 때렸다고 내게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오늘이 처음으로 태동을 느낀 날이에요.”
영친왕비는 재차 놀라 소리쳤다.
“그게 정말이냐?”
진강이 다가와 물었다.
“정말 움직이고 있소?”
진옥, 영친왕, 정명, 송방, 진경까지 다 몰려왔다.
사방화는 순식간에 시선이 몰리자 멋쩍은 듯 헛기침하며 말했다.
“응, 느껴져요. 넉 달이 넘으면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화가 난 게 아니라 조부모님께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영친왕비는 신이 나 영친왕에게 말했다.
“왕야, 정말 움직였어요. 제게 인사를 하는 건가 봐요.”
영친왕은 애써 기뻐 날뛸 듯한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방화야!”
이내 진강이 사방화의 배에 손을 갖다 대보았다.
“안 움직이잖아.”
사방화가 말했다.
“조금 전엔 정말 움직였어요. 저도 느꼈어요.”
“치사한 자식!”
진강은 사방화의 배를 살짝 흘기곤 영친왕,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을 테니 우선 들어가 쉬시지요.”
이에 정명, 송방, 진경이 서둘러 진옥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진옥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궁도 아닌데 다들 편히 해라. 백모님, 백부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영친왕비는 그제야 진옥을 보며 안쓰러운 듯 말했다.
“황상, 어찌 이리 야위셨습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오는 길에 듣자 하니 이번 전투에서 남진이 대승을 거두어 하양성 밖까지 진입했다고 하더군요. 백성들도 훌륭한 황제를 뒀다며 환호성입니다. 이로써 북제에게 남진의 아들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단 걸 보여주게 됐어요. 잘 됐습니다!”
진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영친왕이 말을 이었다.
“황상, 유리한 기세를 이용해 병폐를 막고 단기간 전투로 큰 승을 거둔 데다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병법을 이뤘으니 천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오.”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천고 역사에 길이 남길 바라기보다는 그저 남진 국토가 침략당하지 않도록, 조상의 가업을 지켜내고자 초심을 다잡았을 뿐이지요. 기세를 몰아 활을 당겼으니 화살을 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북제 황성을 뚫는다면 천하 통일은 어려울 것도 없을 겁니다.”
“그렇지!”
영친왕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