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화. 대결말 (9)
사방화가 분위기를 환기하며 조금 가볍게 물었다.
“그나저나 초지, 폐하와 우리 오라버니랑 의형제를 맺었다면서요?”
초지도 픽, 미소를 지었다.
“깊은 산속을 지나는 와중에도 소식은 아주 빨랐나 봅니다?”
이내 사방화가 엷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나?”
초지 대신, 진강의 답이 이어졌다.
“당신이 왜. 초지가 당신을 형수님이라고 불러야지.”
초지가 황당한 듯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진옥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당연히 넌 내 동생이 된 것 아니더냐? 진옥 그 자식은 나이도 똑같은 놈이 나보다 한 달 남짓 빨리 태어났다고 매번 어찌나 형 노릇을 하려고 하는지. 쌍생아 사이에도 엄연한 순서가 있다나 뭐라나. 그러니 네 순서는 지금 얼마나 느린 것이더냐. 넌 당연히 우리 동생이고, 넌 방화에게 형수님이라 불러야 한다.”
“묵함 형님은 왜 빼는 겁니까?”
“네가 사씨 성을 받았더냐, 진씨 성을 받았더냐. 진씨 성을 받았으니 당연히 진씨 집안사람이 됐잖아. 당연히 우리 진씨 쪽에서 계산해야지.”
초지가 결국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자, 사방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맞네요. 그렇게 계산해야겠어요.”
초지는 아주 못마땅한 듯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다 이겁니까?”
사방화는 다시 풋,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요, 다 같은 가족이니 사이좋게 지내요. 그냥 지금처럼 이름 부르면 되죠. 난 계속 초지라고 부를 테니, 초지도 그냥 편하게 사방화라고 불러요.”
초지는 콧방귀를 뀌며 즉각 화답했다.
“그래, 방화. 괜찮아졌으면 이제 내 방에서 나가시오.”
사방화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약이 잘 듣네요.”
초지가 곧 바깥에 있던 이에게 분부하자 그가 답했다.
“초지 공자님께 아룁니다. 소천자 태감님께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마련하셨습니다. 소인이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 * *
진강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방화를 침상에 편하게 눕혀주었다.
“방화, 한숨 푹 자. 약이 다 달여지면 깨울 테니.”
사방화는 여태 한숨도 쉬지 못한 데다 제운설을 상대하느라 매술을 써 몸까지 상한 상태였다. 초지도 사방화의 상태를 알기에 당장 쉬라는 뜻에서 빨리 방으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전엔 초지가 정말 별로였는데 다시 보게 됐어요.”
진강은 곁에 누워 사방화의 등을 다정히 토닥였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하는 거요? 생각 그만하고 어서 자.”
“진강, 당신 계획대로 이번 전투에선 북제에게 쓴맛을 보여주게 됐어요. 하지만 북제 황실이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았고 북제 황제와 제언경도 멀쩡하니, 쉽게 끝나진 않을 거예요.”
결국 진강의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왜 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오? 그냥 좀 편히 다 내려두고 자.”
“알겠어요.”
진강이 토닥여주자 사방화는 금세 잠이 들었다. 진강은 잠든 사방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한참 후,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눈빛이 또렷해졌다.
* * *
반 시진 후, 소천자가 약을 가지고 왔다.
“소왕야, 이번엔 진하게 달여왔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여라.”
진강은 사방화를 품에 안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방화, 약 먹읍시다.”
사방화는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내가 먹여줄 테니 그대로 눈 감고 있어도 돼.”
사방화는 진강이 떠먹여 주는 약을 한입씩 열심히 삼키곤 다시 깊이 잠들었다. 소천자는 빈 그릇을 받아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몸이 저리도 허약한데 회임까지 했으니 정말 괜찮을지 걱정이 앞섰다.
이내 진강이 소천자에게 분부를 내렸다.
“소천자, 부엌에다 맑은 죽과 간단한 찬 좀 내오라 해다오.”
소천자는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진강은 다시 사방화를 품에 안고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신을 썼다. 그런 뒤 밖을 향해 소리쳤다.
“청암.”
“예, 소왕야!”
청암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강은 창문을 열어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의안에게 이 서신을 전하거라.”
청암은 서신을 건네받고 진강을 바라보았다.
“당시 사부님께서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다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얻고 싶구나.”
진강은 청암에게 하는 말인 듯,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청암도 그와 눈을 맞추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서신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지금 바로 가거라.”
청암은 장군부를 나와 어인관을 빠져나갔다.
진강은 다시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얇은 이불 위로 볼록한 아랫배가 눈에 띄었다.
진강의 눈빛엔 다시 따뜻한 온기가 떠올랐다. 그의 여인, 그의 아이가 이토록 굳건히 버텨주는데 그가 더 이상 세상에 견뎌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 * *
이번 남진과 북제의 싸움은 장장 3박 4일 동안 이어졌다.
진옥은 북제가 옥하파에서 철수했음에도 기세를 몰아 그들을 뒤쫓았다.
사흘이 지나 북제가 500리를 물러났지만, 진옥은 끝까지 따라잡아 끝내 북제가 하양성까지 후퇴하게 만들었다.
진강이 일찌감치 매복해두었던 대로 북제는 하양성으로 후퇴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이번 전투는 북제 역사상 가장 큰 패배였고 남진에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진옥은 사묵함을 대신해 북제 황제에게 복수의 화살까지 날렸다.
북제 군이 하양성으로 밀려난 뒤 제운설은 아픔을 참으며 북제 황제의 상처를 치료했다. 제운설의 의술 덕에 북제 황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제언경은 분통해 원망하면서도 남진이 북제 내륙까지 넘어와 하양성 밖 30리까지 진을 치고 있음에 어떤 방도도 마련하지 못했다.
북제는 그렇게 남진 대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됐다.
제언경의 눈빛은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분명 북제에 유리했던 시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곧이어 북제는 하양성으로 후퇴하며 미처 챙기지 못한 군량미는 모조리 다 태워버렸다. 행여나 남진에게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 * *
남진은 하양성 밖에 진을 치고 병갑을 정비했다.
진옥은 곧 사묵함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짐이 먼저 어인관에 다녀올 테니 내가 오면 후작도 방화를 만나고 오게나.”
사묵함이 말했다.
“방화와 아이 모두 무사하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잠시 쉬시지요. 그러다 옥체 상하십니다.”
“진강과 상의할 게 있어 그래. 짐은 괜찮네. 제운설과 북제 황제가 다쳤으니 당분간은 출병하지 못할 거야.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도 며칠뿐이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면 반드시 반격해올 거야. 여기까지 온 상황에 북제 황궁에도 쳐들어가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지금껏 이렇게 고생해 준 이들을 볼 면목이 없겠지.”
사묵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심하십시오, 폐하.”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를 나와 막 출발하려는데, 연석이 달려왔다.
“폐하! 저도 가겠습니다.”
“연석 너도 가겠다고? 그럼 사 후작은 누가 돕는단 말인가?”
“효양과 의지가 있잖습니까!”
진옥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올라타.”
연석은 서둘러 말에 올라 진옥과 함께 어인관으로 향했다.
* * *
진옥과 연석이 어인관에 다다른 그때, 며칠간 깊은 잠에 빠졌던 사방화도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연석은 아무래도 진옥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못하고 며칠 밤낮으로 전투를 벌인 와중에 쉬지 않고 어인관으로 온 터라 도착하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진옥은 그런 연석을 보고 즉각 그를 장군부로 데려가라고 분부했다.
진옥을 배웅하러 나왔던 소천자는 업혀가는 연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폐하, 연 소후야께선……, 어찌 되신 겁니까? 다치셨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지쳐 쓰러진 거다.”
소천자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방화는 어떠냐?”
진옥은 말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왕야께서 소왕비마마를 데려오신 그날,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초지 공자님께서 약을 지어주셨고, 며칠간 잠만 주무시다 조금 전 일어나셨습니다. 오늘에서야 안색이 좀 괜찮아지셨고요. 하지만 초지 공자님께서 더 이상은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아이도 지키지 못할뿐더러 소왕비마마께서도 위험해질 거라고 말입니다.”
진옥은 순간 발걸음을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딨지?”
“예,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사방화, 진강의 숙소에 다다르자 사방화는 마침 식사 중이었다.
며칠 깊은 잠에 빠져 약과 탕국을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고 오늘에서야 정신을 차린 터라 이제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진옥이 문턱을 넘자, 사방화에게 정성껏 밥을 먹여주고 있는 진강이 보였다. 그에 진옥은 잠시 주춤하다 입을 열었다.
“하루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먹을 것 좀 가져와다오.”
소천자는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이내 진옥은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고 탁자에 앉았다.
사방화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진옥을 보고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도 쉬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까?”
진옥은 대답 대신 진강을 돌아보았다.
“진강, 차 좀 따라봐라.”
진강이 즉각 그를 째려보았다.
“손도 없냐?”
“움직일 힘도 없다.”
진강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차를 따라주었다.
“먹여주리?”
“그건 나도 싫다.”
진강은 웃으며 찻잔을 건넸다.
진옥은 정말 찻잔을 들 힘도 없는 듯 힘겹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째 쉬지도 않고 오신 겁니까? 옥체도 살펴 가며 오셨어야지요.”
진옥은 한숨 같은 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내게 잔소리할 힘이 있는 걸 보니 정말 괜찮아졌나 보군.”
사방화가 말없이 진옥을 째려보자, 진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상황까지 왔는데 숨 돌릴 틈이 어딨어? 사 후작과 함께 올 수 없어 나만 먼저 온 것이오. 내가 돌아가면 사 후작도 올 거고.”
사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죽을 지경도 아닌데 두 분 다 뭘 그렇게까지 힘들게 그러십니까? 오라버니는 보내지 마십시오. 이제 많이 나아서 같이 갈 수 있습니다.”
진옥이 바로 눈썹을 들썩였다.
“뭐? 이 상태로 같이 전쟁터에 간다고?”
“예, 걱정돼서 같이 가야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오라버니도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안 돼!”
진옥이 즉각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진강, 그렇죠?”
사방화가 진강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진강이 말을 하기도 전, 진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쟁터라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그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당장 전쟁이고 뭐고 그대로 남진으로 돌아갈 건데? 대체 얼마나 더 우릴 걱정시키려는 셈이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
이내 진강이 사방화를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
“부모님께서 곧 어인관에 도착하신다고 들었소. 그러니 두 분께서 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립시다.”
“네? 어머님, 아버님께서 어찌 어인관에 오신다는 거예요?”
“당신 걱정에 오신 것 같아.”
사방화는 금세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분명 한바탕 뭐라고 하실 거예요. 지금껏 소식 한 통도 전하질 않았으니 어머님께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신 걸 테니까요.”
“당신한텐 한마디도 못 하실 테니 걱정 마. 혼나는 건 나뿐이잖아.”
사방화는 잠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선에선 누가 제운설을 상대하죠?”
“내 칼에 피리가 부서졌으니 다시 고친대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상처도 깊어 나으려면 일주일은 걸릴 테고. 매술로 치료한다면 매술 공력이 떨어질 테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쓸 리는 없을 테고……. 시간은 충분해.”
“뭐가 시간이 충분하단 거예요?”
“그때 가면 알게 될 테니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당신이 얼른 기운을 차려야 그나마 어머님께서도 꾸중을 덜 하실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