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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3화 (973/978)

973화. 대결말 (8)

제운설은 입술을 꼭 물고 어떻게든 진강의 장벽을 깨뜨려보려 했으나 결국 그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제운설은 일순 공법을 바꿨고, 짙었던 검은 연기는 어느새 핏빛으로 바뀌었다.

핏빛 연기는 꼭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왔다.

하지만 진강은 다시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다 막아냈다. 제운설은 그 어떤 공법으로도 진강을 이길 수 없음을 절감하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정신을 모아 집중하니 진강의 검 손잡이에 뭔가 보이는 게 있었다. 제운설은 검에 달린 그 물건을 보자마자 순간 불같이 화를 냈다.

“아버지께서 그 취영석을 네놈에게 준 것이야?”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 영감님이 내게 그 정도로 잘해주진 않았지. 다른 이에게 받은 거다.”

제운설이 차갑게 웃었다.

“취영석이 있다고 해서 내가 어쩌지 못할 거란 생각은 마라. 네놈 목을 가져가기 전까진 절대 물러나지 않아!”

제운설은 돌연 품에서 붉은 피리 하나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그 피리 소리에 짙고 붉은 물결무늬가 만들어졌고, 진강을 덮쳐왔다. 

진강은 급히 공력을 사용했지만, 이 피리 소리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단 걸 눈치챘다. 이내 그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진옥도 다급히 뛰어들려는데, 순간 왼쪽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사방화가 나타난 것이었다.

곧 사방화가 손을 움직이자 푸른 연기가 흘러나와 피리 소리를 감쌌고 다른 한 손에선 옷 소매에 숨겨진 12개의 화살이 부채처럼 쏟아져 나와 제운설을 향해 날아갔다.

제운설은 깜짝 놀라 얼른 피했지만, 결국 한쪽 손목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이윽고 사방화는 말에서 내려 진강의 곁으로 가 차갑게 말했다.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운설, 네가 여태 남진에서 벌였던 모든 짓,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단 걸 잊지 마라.”

제운설을 고개를 들고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이제 사방화의 아랫배는 제법 볼록 나온 상태였다. 제운설은 그 배를 바라보다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사방화,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뭘 어쩔 셈이더냐?”

“내가 뭐가 되든 무슨 상관이지? 난 단 한 번도 널 두려워한 적이 없다.”

“언신의 해독제를 가지고 있지? 어서 내놔라!”

사방화는 눈을 깜빡이며 담담히 말했다.

“없다.”

“그럼 죽어야지!”

제운설은 다친 손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피리를 입에 갖다 댔다.

사방화가 손을 쓰려던 순간, 진강은 제운설을 향해 검을 날렸다.

“이번엔 네 피리가 빠를지, 내 검이 빠를지 똑똑히 봐라.”

제운설은 눈을 찌를 듯한 차가운 빛에 뒤로 물러나 진강의 검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두 번째 검이 날아왔고, 제운설은 급히 손에 쥔 피리를 무기 삼아 진강의 검을 막아냈다.

쾅!

결국 피리는 진강의 검에 부서졌다.

제운설은 순식간에 안색이 돌변해 피리를 이리저리 돌렸고, 그 안에선 차츰 장치가 열리더니 무수한 쇠바늘이 진강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에 사방화는 매술을 이용해 급히 연기를 피워올려 그물망을 만들었다.

진강은 그물망 아래, 바늘에게서 안전히 보호됐고 동시에 활을 들어 제운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제운설도 결국 진강의 이 화살을 피하지 못해 오른쪽 어깨를 맞았고 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운설, 후퇴해라!”

제운설은 입술을 꽉 물고 진강을 바라보다가 말을 돌려 후퇴했다. 

“가게 내버려 두지 말고 죽여라!”

연석의 명령이 이어졌다.

곧이어 진옥은 주위의 상황을 살핀 뒤, 진강과 사방화를 찾았다.

사방화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었고, 진옥은 서둘러 사방화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소?”

연석도 사방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서둘러 다가갔다.

진강 역시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사방화의 말에 올랐다.

“내가 뒤에 있으라고 했잖아!”

애절하게 외치는 진강을 보고, 사방화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당신이 걱정되잖아요. 제운설은 무공뿐 아니라 요술, 매술도 쓸 줄 아는 사람인데. 당신이 위험할까 걱정됐어요.”

진강도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사방화가 제때 나서주지 않았다면 진강도 제운설의 피리 소리에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매술은 오직 매술만이 막을 수 있었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를 단단히 보호해 안고 말고삐를 쥐었다.

“어서 근처에 가서 쉽시다.”

사방화도 진강의 품에 기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전, 진강이 진옥을 돌아보았다.

“진옥, 10만 병마를 두 대열로 나눠서 한쪽은 옥하파에서 하양성(河阳城)으로 철수하는 길목에 매복해뒀고 나머지는 옥계언 고모부님 10만 병마 뒤에 뒀다. 어찌해야 할지 알겠지?”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으니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빨리 가라!”

진강은 사방화를 데리고 서둘러 떠났고, 진옥은 연석에게 분부를 내렸다.

“연석, 잘 들었지? 제운설의 패배로 북제 군심이 흐트러졌을 때 옥하파를 접수한다.”

“예, 알겠습니다!”

연석이 답했다.

* * *

남진과 북제의 사병은 여전히 격돌 중이었다.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 북제는 제운설의 부상으로 점점 기세가 약해졌고 남진 사병들은 제운설의 부상과 진강, 사방화의 등장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오늘 옥하파를 접수하면 공에 따라 모든 이에게 상을 내리겠노라!”

진옥의 말에 남진 사병들의 사기는 더 불타올라, 아주 맹렬히 북제 사병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제운설이 뒤편으로 후퇴해왔다.

어깨와 손목의 부상으로 제운설은 이미 팔 전체에 감각을 잃었고, 옷은 아예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북제 황제는 제운설과 바깥 상황을 번갈아 보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철수하자.”

“안 됩니다. 철수할 수 없어요!”

제운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남진 사병들이 기세가 오른 데다 너까지 다쳤잖으냐. 이대로는 옥하파를 지켜낼 수 없을 거다.”

“지킬 수 있습니다! 저들에게 좋은 꼴을 만들 순 없어요! 전 괜찮습니다.”

제운설이 눈에 불꽃을 내뿜으며 말했다.

이어 제언경도 제운설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아바마마, 막내 고모 말씀이 옳습니다. 철수해선 안 됩니다. 옥하파에서 철수해 계속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남진은 기세를 몰아 더 들어올 겁니다.”

“그럼 이 정세를 반전시킬 방법은 있는 것이냐?”

제운설이 북제 황제의 물음에 답하려던 순간, 옥계언이 데려온 지원군들 뒤로 남진 사병들이 물밀듯 쳐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게 무엇이냐?”

제언경도 제운설의 시선을 따라 뒤를 바라보았고 이내 안색이 돌변했다.

“큰일입니다! 남진의 군대입니다!”

“남진의 군대가 어째서 저 방향에서 오는 것이냐?”

제언경도 알 턱이 있겠는가. 그는 갑자기 말을 잃었고, 북제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은 하지 않는 법이다. 운설, 계속해서 싸울 것이냐? 네 어깨와 손목 상처도 결코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시기를 놓쳐 한쪽 팔이 쓸모없어지게 되면 앞으로 어찌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냐?”

제운설이 물었다.

“수가 얼마나 됩니까?”

“5만은 돼 보인다. 전부 정예 병사들처럼 보이는구나.”

제운설도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후퇴한다!”

제언경도 북제 황제를 힐끗 보고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후퇴하라!”

북제 사병들은 서둘러 북제 황제를 엄호하며 후퇴했다.

이내 그 장면은 남진의 황제 진옥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뒤쫓아라!”

진옥이 차갑게 웃으며 명령했다.

이 전투에선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이것으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진옥은 그렇게 말을 타고 직접 북제 군을 뒤쫓아갔다.

* * *

한편, 진강은 조용한 곳으로 가 말을 멈췄다.

“방화, 좀 어떻소? 많이 아프오?”

사방화는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진강은 결국 사방화에게 화를 냈다.

“내가 아무리 의술을 모른다지만, 언제까지 내게 다 숨길 참이요?”

사방화는 결국 아랫배를 움켜쥐고 처연하게 말했다.

“좀 아파요.”

진강의 얼굴도 사색이 된 그 순간, 월낙이 공손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 소왕야, 폐하께서 어서 소왕비마마를 모시고 어인관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지 공자님께서 소왕비마마를 봐 드린다고 하십니다.”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곤 어인관으로 말을 돌렸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도 진강은 사방화를 품에 끌어안고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을 다했다.

* * *

한 시진 뒤, 어인관에 도착했지만 사방화는 이미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돼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진강은 말에서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총병부로 질주했다.

“초지는?”

일찍이 소식을 들은 소천자가 서둘러 안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예, 소왕야! 소인이 초지 공자님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곧이어 초지의 숙소에 다다르자, 그는 이미 약상자를 준비해 두고 진강과 사방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침상에 눕히시지요.”

진강이 사방화를 조심스레 눕히자, 초지는 서둘러 사방화를 진맥했다.

사방화는 계속 아랫배를 움켜쥔 채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초지는 어두운 낯빛으로 탁자에서 약방문을 쓴 뒤 소천자를 찾았다.

“태감, 이 약방문대로 약을 달여주시오. 푹 달일 필요 없으니 약물이 끓으면 바로 한 그릇 가져오면 되오.”

“알겠습니다.”

소천자는 약방문을 건네받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방화는 숨을 헐떡이며 초지에게 말했다.

“초지, 난 반드시 아이를 지켜야 해요.”

초지는 답답한 듯 짧게 분기를 토했다.

“하여간 고집불통!”

사방화는 초지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다시금 되물었다. 

“아이는 지킬 수 있죠? 그렇죠?”

결국 진강이 다가가 사방화의 손을 잡아주었고, 초지도 가여운 사방화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조용하게 말했다.

“아이는 괜찮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매술을 쓴 겁니까!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제때 약만 챙겨 먹으면 아이도 괜찮습니다.”

사방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그렇게 메마른 사방화를 품에 꼭 안아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초지도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소천자가 약을 가져왔다.

“초지 공자님, 끓자마자 가져왔습니다만 약효가 부족할듯한데 괜찮습니까?”

“우선 이렇게라도 먹이고 계속 끓여주시오.”

소천자가 진강에게 약사발을 건네자, 진강은 즉각 공력을 이용해 탕약을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사방화의 입술 가까이 대주자, 사방화는 냄새를 한번 맡아보곤 안심하며 약을 마셨다. 

초지는 그런 사방화의 모습을 보고 화를 냈다.

“왜, 제가 약으로 소왕비마마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서요?”

“초지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남이 달여준 약을 먹을 때마다 이러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 거예요.”

초지도 할 말이 없어졌다.

이내 진강이 빈 그릇을 소천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천자, 다 달이면 한 그릇 더 가져와다오.”

소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들고 황급히 밖으로 향했다. 

사방화는 진강의 품에 안겨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서히 호흡이 안정되는 것이 차도가 보이자, 사방화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잖아.”

진강은 사방화를 절박하게 안고 말했다. 아마도 지금 세상 가장 놀란 사람이 바로 사방화의 남편이 아니겠는가.

사방화도 그에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했다.

“남진에선 제운설을 막을 사람이 없는데 어떡해요. 안 그래도 심성이 악한데 설성의 10만 병마까지 전멸했으니 얼마나 더 악랄해졌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요.”

진강도 사방화가 아니었다면 제운설을 상대할 사람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방화의 뺨만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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