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0화. 대결말 (5)
제운설은 한창 언신의 독을 해독할 방법을 연구 중이었다.
그러다 제언경이 오자 곧장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썩 꺼지거라.”
제언경도 이젠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고모, 외숙께서 스스로 절 살리시려 뛰어드신 걸 왜 자꾸 제게 화풀이를 하시는 겁니까? 아바마마께서 보내지 않았다면 저도 올 생각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제언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여태 막내 외숙을 치료하시느라 모르셨지요? 어젯밤 아바마마께서 어인관을 공격했으나 끝내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쓸모없기는!”
“제게 쓸모없다고 하시는 건 용납할 수 있지만, 아바마마께는 그리 말씀하셔선 안 되지요! 그날 진옥과 사묵함은 절 노리고 북제 군영에 침입했던 거지만, 막내 외숙께선 저 대신 독에 중독되셨고 사묵함은 아바마마가 쏘신 화살에 맞았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등쪽 심장부에 꽂혀 신의가 아닌 이상 절대 살려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근데 다음 날 사묵함이 멀쩡히 진옥과 의사를 나누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게다가 어젯밤엔 어디선가 지원군 10만을 데려와 이젠 더더욱 어인관을 탈환하긴 어려워진 상황입니다.”
제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10만 지원군이라고?”
제언경이 상황 설명을 해주자, 제운설은 곧바로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사묵함과 정효양이 데려온 지원군이 설성 쪽에서 왔단 말이냐?”
제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본 자가 그리 보고했습니다.”
“폐하는 어디 계시느냐?”
“중군영에 계십니다.”
제운설은 곧장 일어나 중군영으로 향했고, 제언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제운설은 역시 또 북제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지도 않고 곧장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북제 황제가 입을 열려던 순간, 바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북제 황제가 말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사묵함과 정효양이 몰고 온 10만 병마가 단미령에 진을 치고 있던 설성의 10만 병마를 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설성의 10만 병마가 전부…….”
“뭐라?”
제운설은 즉각 휘장을 걷고 나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공…… 공주마마…….”
그는 겁에 질려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서 말하거라!”
제운설이 소리쳤다.
“단미령에 진을 치고 있던 설성의 10만 병마가 모조리 전멸했답니다.”
제운설이 손을 내리자, 그는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다시 말해 보거라! 어서!”
제운설은 거의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는 온몸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았지만, 덜덜 떨리는 소리로 답했다.
“단미령에 진을 치고 있던 설성의 10만 병마가 모조리 전…….”
순간 그의 말이 끊어지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제운설이 손을 쓴 것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북제 황제가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제운설을 다그쳤다.
“못 들었습니까? 설성의 10만 병마가 전멸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30만 병마를 상대하는 설성의 10만 용병이 어찌 전멸할 수가 있단 겁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북제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어찌 더 물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죽여버린 것이냐?”
제운설이 소리쳤다.
“여봐라!”
“예! 공주마마!”
“어서 단미령에 가 알아보고 소식이 있으면 곧장 내게 전하도록 해라. 한 치의 착오도 있어선 안 되느니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제운설은 소름끼칠 정도로 싸늘한 눈빛을 하곤 어인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은 붉은 치맛자락도 금세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이내 제언경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어인관에서 저희를 혼란에 빠트리려 일부러 흘린 소식일 겁니다. 그 틈을 타 공격하려는 셈이지요.”
북제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설성의 10만 병마는 예로부터 명성이 대단했으니 결코 유명무실할 리가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남진과 북제가 지금껏 양국의 변경에 설성이 있게 가만히 뒀을 리 없다. 진옥의 계략일 수도 있으니 우선 진정하거라.”
제운설은 심호흡을 한 뒤 북제 황제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신 겁니까?”
“설성의 10만 병마 일로 부른 거였다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선 기다려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제운설도 북제 황제가 대거로 공격했음에도 어인관을 탈환하지 못해, 설성의 10만 병력을 빌리고자 자신을 찾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현재 진상이 파악되질 않으니 지금은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설성의 10만 용병이 사묵함과 정효양의 병마에 몰살됐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곧 북제 황제가 다시 또 물었다.
“언신은 좀 어떠냐? 해독법은 생각해 냈느냐?”
“아니요. 단기간엔 해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운설의 답에, 제언경이 다급히 물어왔다.
“막내 외숙을 살릴 방법이 정말 단 하나도 없는 겁니까?”
“깊게 잠들기만 할 뿐, 목숨을 앗아가는 독은 아니란 걸 알아냈다.”
“그럼 저대로 계속 잠들어 계시게 놔둬야 하는 겁니까?”
제운설이 입술을 깨물며 북제 황제에게 말했다.
“우선 옥가로 보내고 거기서 돌보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다. 해독법은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단기간엔 무리입니다.”
“그래, 해독법도 나오질 않으니 계속 그 일만 신경 쓸 순 없지. 목숨엔 지장이 없다니 그렇게 하자꾸나. 곧 사람을 붙여 옥가로 보내도록 하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저와의 혼약은 유효합니다. 혼서도 받았으니 제 정혼자인 건 달라지지 않지요. 그 누구라도 제 정혼자를 감히 함부로 대하는 건 절대 용서치 않을 겁니다.”
북제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그간 북제에도 공을 쌓아온 언신이니 짐이 잘 보살피겠다. 국구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그것도 걱정 마라. 호랑이도 제 자식은 잡아먹지 않는 법이니. 또 언신을 따르는 자들도 보통 충성심이 아니잖느냐. 말하지 않아도 잘 챙겨줄 거다.”
제운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북제 황제는 노태감에게 분부를 내렸다.
“소국구를 옥가로 보낼 준비를 하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 * *
저녁 무렵, 제운설이 보냈던 이가 돌아와 아뢰었다.
“공주마마께 아룁니다. 단미령은…… 역시 모두 전멸한 게 확실합니다.”
쨍그랑!
순간 제운설이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고, 막사 안팎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적막이 흘렀다.
제운설은 잔을 떨어트린 뒤, 몸이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찌 자신이 보낸 사람의 말마저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 진옥은 무슨 수로 설성의 10만 용병을 다 전멸시킨 거지?’
설성 10만 용병의 위력은 천하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근데 제운설이 이끈 지 며칠 채 되지도 않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전멸을 했다니……!
제운설은 충격 때문에 머릿속이 다 울리는 듯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다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후, 제운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이냐? 대체 어찌 된 거야?”
“예, 공주마마께 아룁니다. 사묵함과 정효양이 각각 사방화와 진옥의 사병 5만을 이끌었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 단미령 상류의 수원지에서 연합하여, 설성의 10만 병마를 교살했다고 합니다. 단미령엔 온통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고 군량미와 무기들도 남진에서 거둬갔다고 했습니다. 모두 우리 황제폐하께서 어인관을 치던 그날 밤에 벌어진 일이랍니다.”
“진옥 그놈이……! 내 이 원수를 갚기 전까진 사람도 아니다!”
제운설의 진노에, 탁자도 사정없이 부서져 내렸다. 지금 제운설의 목소리는 꼭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를 마주한 것처럼 섬찟한 느낌을 안겨줬다.
* * *
천지를 뒤흔드는 그 소리는 근처 막사에 있던 북제 황제에게까지도 전해졌다.
황제는 곧 곁에 있던 하인에게 명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그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돌아왔다.
“폐하께 아룁니다. 공주마마께서 보내신 사람이 전하길, 설성 병마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사실이라 합니다.”
북제 황제도 충격에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설성의 10만 병마가 전멸하다니……. 진옥, 사묵함, 정효양은 대체 무슨 수를 썼단 말인가?
북제 황제 곁에 있던 제언경도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남진이 하룻밤 새 북제의 팔과 다름없던 설성 10만 병마를 전멸시켰니? 언신도 깨어날 기미가 없어 옥가로 보냈는데, 이제 무슨 수로 남진을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언경은 창백해진 얼굴로 북제 황제를 바라보았다. 북제 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한참 후 미간을 문지르며 간이 침상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때, 제언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내 고모께 다녀오겠습니다!”
“멈춰라! 자칫하다간 사람도 죽일 판에 더 보탤 일 있느냐? 돌아오거라.”
“아바마마! 어찌해야 합니까! 설성의 병마가 전멸했으니 이젠 끝입니다! 진옥도 이 기세를 몰아 계속 밀고 들어올 텐데, 그럼 우리 북제는…….”
“짐이 생각해 보겠다.”
지친 듯 보이는 북제 황제를 보며 제언경도 결국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밤이 됐을 때, 북제 황제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많이 진정됐을 테니 운설을 불러오너라. 다시 상의토록 하자.”
곧 제언경이 제운설의 막사로 가자, 꽤 많이 진정된 듯한 제운설이 보였다.
제운설은 제언경을 보곤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막사를 빠져나갔다.
* * *
다음날, 설성 10만 병마가 남진의 손에 전멸됐단 소식이 서서히 퍼졌다. 동시에 진옥이 기회를 틈타 사묵함을 죽였다는 소식도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 소식에 남진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발칵 뒤집혔다. 역시 영친왕을 비롯한 좌상, 영강후, 대신들이 아침부터 우상부를 찾았다.
그 무렵, 이목청은 사묵함의 친필 서신을 받았다. 이목청은 그제야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사묵함의 서신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다들 그 서신을 확인한 뒤, 겨우 놀라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진을 뒤흔들려고 가짜 소식을 내보낸 거였군. 빌어먹을 북제 같으니!”
영강후는 한마디 욕을 내뱉었다.
“예, 맞습니다. 그러니 이제 대인들께서도 저와 한배를 타고 국내 정세를 다잡으실 일만 남았습니다.”
이목청의 말에,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이목청은 북제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말썽을 일으킨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고, 사묵함은 무사하며 황제 진옥, 초지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소식까지 전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고시는 각 주와 현으로 퍼졌고, 불안에 떨던 백성도 잠시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목청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들 사묵함이 정말로 무사하단 걸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지금껏 북제가 남진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저질러왔던 전례가 있으니, 백성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조정 문무 대신들도 이목청의 당찬 배포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