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화. 대결말 (4)
장수가 떠나자, 제언경은 다급히 북제 황제를 보며 말했다.
“아바마마! 어떡합니까? 남진의 병마라면 협공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북제 황제는 잠시 어인관 쪽을 굳게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는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짧고도 긴 침묵 끝에, 북제 황제가 말했다.
“철수하라.”
제언경은 내키지 않았지만 연이어 크게 소리쳤다.
“철수하도록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북제 병사들은 순식간에 물러났고 어인관 밖에는 피로 물든 성벽과 바닥, 끔찍한 잔해만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진옥은 그제야 꼿꼿한 몸을 움직이며 전쟁터를 청소하라 분부를 내렸다.
* * *
전투의 흔적과 다친 병사들을 옮기기도 전, 사묵함과 정효양이 무기, 군량미와 함께 10만 병마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진옥이 성벽에서 내려가자, 사묵함은 말에서 내려 진옥에게 절을 올렸다.
“폐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았습니다.”
연이어 정효양도 인사를 올렸다.
“폐하, 아주 아름다운 싸움이었습니다. 관직을 높여 주시지요.”
진옥은 웃으며 얼른 두 사람을 일으켰다.
“도성으로 돌아가면 공에 따라 보상을 내릴 것이다.”
정효양은 금세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오는 길에 한시도 쉬지 못했습니다. 어인관에 도착해서 쉬려 했건만 발을 디디기도 전에 전투를 벌일 줄은 몰랐네요.”
사묵함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을 나간 뒤 효양과 만나 계획했던 대로 실행에 옮겼더니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그렇지만 설성의 2만 병마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갑자기 운란이 나타나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진옥이 눈썹을 들썩였다.
“사운란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어찌 된 일인가?”
“우선 성으로 돌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행은 서둘러 성 내로 들어섰다.
* * *
총병부로 돌아와, 사묵함이 설명을 시작했다.
“효양과 계획대로 단미령을 포위해 설성의 병마를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세력이 어마어마하긴 했으나 앞서 치밀하게 짜둔 계획과 방화와 폐하께서 내주신 10만 병마를 합치니 설성의 용병도 당해내질 못하더군요.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정효양이 연달아 말을 이었다.
“예, 사운란 공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온몸에 냉기를 풍기면서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얼음이 3자(尺)씩 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사묵함이 계속해서 말했다.
“매제와 누이가 운란의 근황을 말해줘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격전이 일어 날거라 생각했지만, 운란이 협상을 하자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협상?”
“설성은 양국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연석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협상이란 말입니까? 설성은 지금껏 본래 양국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만 제운설이 설성에서 병마를 이끌고 나왔잖습니까? 폐하와 사 후야께서 목숨 걸고 언신을 중독시키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일찌감치 북제와 연합해 어인관을 쳤을 겁니다.”
“설성의 병마는 자기가 데려갈 테니 바깥엔 우리가 설성의 모든 병마를 제거했다고 알리라 하더군.”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연석을 보고, 결국 최의지가 나섰다.
“연 소후야, 말 좀 그만 끊으시고 사 후야 말씀 좀 들어봅시다.”
그에 사묵함이 엷게 웃다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운란은 설성의 성주야. 설성의 병마는 성주 본인이나 성주령을 가진 자 외에는 그 어떤 이도 움직일 권리가 없지. 설성의 병마를 통솔하는 대장도 운란을 보자 즉시 명령을 따랐고. 한마디로 제운설의 명령만 듣는 것이 아니란 거네. 운란의 뜻은 자기가 단미령의 설성 병마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제운설과 북제가 모르도록 하라는 거였어. 그 조건으로 준 게…….”
사묵함은 홀연 품에서 영패를 꺼내 진옥에게 보였다.
이내 그 영패를 받아든 진옥의 눈빛이 놀라운 빛을 머금었다.
곧이어 연석과 최의지도 다가가 살피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설성의 성주 영패. 이 영패를 가진 자는 성주와도 같은 것이지.”
연석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사운란 공자가 이 성주 영패를 사 후야께 줬다고요? 이걸로 설성의 병마를 되찾으라고요?”
사묵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년 전 설성을 건국하던 초반에 매족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고옥이네. 이걸 성주 영패로 삼아 온 것이지. 운란이 이걸 주는데 당연히 내가 그를 막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진옥이 영패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성의 성주 영패는 짐도 처음 보는군. 사운란도 성의를 보인 것 같네. 근데 사운란, 제운설은 단둘만 남은 남매라 서로를 지켜주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제운설에게 숨기라는 거지? 사 후작, 뭔가 느껴지는 게 없었나?”
사묵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낯선 사람처럼 그 말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운란의 현재 능력과 힘으로 따지면 아무리 우리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2만 병마를 손에 넣은 상황이라도 충분히 정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희 10만 병마를 다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더군요. 설성을 생각하는 것 외엔 남진을 공격할 마음도 없어 보였고 제겐 정이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응? 방화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했잖아?”
진옥이 말했다.
“제가 느끼기엔 여전히 기억이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을 테지요.”
“기억이 남아있다면 어째서 진강과 방화를 만났을 때 못 알아본 거지? 설마 또 다른 속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연석이 말했다.
“속사정이 있을 게 뭐 있습니까? 지금껏 소왕비마마께 가장 잘해준 사람인데. 소왕비마마께서 강 소왕야 때문에 다쳤을 때도 영친왕부에 찾아가 바로 따지기까지 했잖습니까.”
이내 최의지가 입을 열었다.
“당시엔 상황이 급해 성주 영패를 받은 뒤 각자 떠나느라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제운설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설성의 병마가 모두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알리라고 했을 때 제운설을 강조했었어요.”
그 순간, 연석이 소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제운설이 그간 배후에서 수많은 짓을 꾸며왔잖습니까. 당시 운란 공자도 남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제운설이 무슨 수를 쓴 건지 분심이 발작해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고 들었어요. 그 후, 란 장로가 세상을 떠나고 운란 공자는 줄곧 제운설에게 붙들려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니 설성에서 진강과 방화를 만났을 때도 제운설을 속이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설성 병마를 통솔해 나가는 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은 거지요. 때마침 다시 나타난 걸로 보면 제운설과는 절대 한 편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럴싸한데요?”
최의지에 이어, 사묵함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흘러가야만 이야기가 맞아떨어지긴 하지.”
연석은 금세 우쭐하게 진옥을 바라보았다.
“저 똑똑하지요? 폐하, 제 추측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지요?”
진옥은 피식, 웃고는 설성의 성주 영패를 사묵함에게 돌려주었다.
“일리가 있긴 하지만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설성 병마를 없애건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했건 어쨌든 해결했으니 이긴 셈이야.”
“폐하께서 가지고 있으십시오.”
사묵함이 영패를 받지 않자 진옥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 쥐여줬다.
“아니, 이건 사운란이 사 후작에게 준 것이니 가지고 있게.”
사묵함은 잠시 머뭇거리다 영패를 품속에 넣었다.
“조만간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르고, 운란이 돌아올지도 모르니 우선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석에게 말했다.
“연석, 어젯밤 사 후작과 효양이 설성의 병마 10만을 모두 교살했다고 소식을 퍼트려다오.”
“사운란 공자가 태도를 바꾸진 않겠지요? 이미 소식이 퍼졌는데 그 8만 병마가 다시 나타난다면 큰일이잖습니까.”
연석이 물었다.
“그럴 리는 없어. 난 그를 믿는다. 설성의 성주 영패는 수천 년간 내려온 신용의 물건이야. 신용이 없다면 그는 설성 성주 자리에 오를 자격도 없지.”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돌연 정효양이 연이어 몸을 일으켰다.
“온 천하에 재빨리 소식을 퍼트리려면 연 소후야 힘만으론 무리이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지쳤다고 하지 않았소?”
“잠시면 됩니다. 끝나고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 누구도 절 깨우지 마시고요.”
정효양이 나가자 연석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이내 진옥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사묵함을 보고 말했다.
“사 후작, 후작도 그만 가서 쉬게나.”
“예, 북제 황제도 물러갔고 설성의 병마 문제도 해결했으니 폐하께서도 이만 편히 쉬시지요.”
사묵함도 진옥에게 휴식을 권하자, 최의지가 연석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전쟁 마무리는 저희에게 넘기시고 두 분께선 어서 쉬십시오.”
그러자 연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입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네요. 여긴 저와 의지가 맡을 테니 두 분께선 편히 쉬십시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럼 너희들에게 맡긴다.”
“염려 마십시오. 돌아가 후하게 상을 내려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진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사묵함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이윽고 연석과 최의지는 전쟁터를 정리하고, 부상자 치료와 백성들 위로에 전념했다. 모든 일을 끝마칠 때쯤엔 벌써 하루가 다 저물었다.
* * *
다음날, 북제 황제는 옥하파로 철수한 뒤 남진의 지원군을 이끈 통솔자가 사묵함과 정효양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북제 황제는 옥잔을 깨트렸고, 제언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사묵함이 정말 살아있다는 겁니까? 대체 언제 어인관을 빠져나간 거죠? 설마 아바마마의 화살에 맞은 게 사묵함이 아니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멀쩡히 살아 움직여 병사들까지 이끌 수 있겠습니까?”
북제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제언경이 고개를 저었다.
“일찍이 알아봤을 때도 사묵함이 화살에 맞은 다음 날 멀쩡히 진옥과 의사를 나누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자가 재차 알아봤지만, 사실로 확인됐고 현재 밖에선 사묵함이 죽었단 소식이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뒤 제언경은 어제 사묵함이 죽었다는 소식을 퍼트린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북제 황제가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그날 내 화살에 맞고 진옥에게 업혀 간 이가 사묵함으로 변장한 이일 경우. 둘째,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 멀쩡히 살아났을 가능성.”
“그게 어찌 가능합니까? 아무리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거의 다 죽어가던 이를 하룻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살려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매족이 있단 걸 잊지 말거라. 이 넓은 세상엔 온갖 별일이 벌어지기 마련이고, 매족의 존재는 단연코 예외라 볼 수 있다.”
제언경은 한참을 충격에 빠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진강과 사방화가 북제 군영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사방화가 자기 오라비를 살린 걸까요? 그렇지만 사방화는 현재 매족 혈맥 때문에 곧 죽을 위기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북제 황제가 말했다.
“더 자세히 조사해봐야 할 일이다.”
제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었다.
“어젯밤 아바마마께서도 어인관을 탈환하지 못하셨는데 사묵함과 정효양이 10만 병마를 더 이끌고 왔으니 일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북제 황제가 말했다.
“운설은 어디 있느냐?”
“하룻밤 주무셨다가 오늘 다시 막내 외숙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외숙께서 저리되지만 않으셨어도 어인관은 이미 탈환하고도 남았을 텐데, 전 진옥과 막내 외숙만도 못합니다.”
북제 황제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경아, 진옥으로부터 이 짙은 패배감을 몇 번째 느끼고 있는 것이냐?”
제언경은 말없이 입술을 깨문 채 북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젯밤 어인관을 공격한 이래 몇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볼 일이 있으니 가서 운설을 불러오너라.”
이어진 북제 황제의 말에, 제언경은 제운설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