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7화 (967/978)

967화. 대결말 (2)

제언경은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아 북제 왕이 흩트리고 간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북제 황제가 봐준 것이 아니라면 진옥과 사묵함은 순전히 그들의 능력으로 북제 군영을 습격하고도 무사히 탈출한 것이라 봐야했다.

제언경은 확실히 진옥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의가 아닌 이상 화살을 맞은 사묵함은…….

신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 언신 만한 사람이 없지만, 그는 결국 독에 중독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현재 사방화와 진강은 어인관에 있고, 사방화의 의술은 언신만은 못할지라도 친 오라버니인 사묵함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리도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 제언경은 화가 나 바둑판을 밀어버렸다.

바둑돌이 와르르, 바닥으로 추락하는데, 돌연 옥운수가 황급히 달려왔다.

“태자전하! 막내 숙부는 좀 어떠십니까? 운설 공주마마께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공주마마께선 해독하실 수 있으시답니까?”

언신이 돌아오고 난 뒤 옥운수도 제법 성장해 전보다 훨씬 진득해진 모습이 보였다.

“아직 안에서 치료 중이시다. 가능할지는 모르겠구나.”

제언경이 고개를 젓자, 옥운수가 다시 또 물었다.

“공주마마께서 들어가신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한 시진 지났다.”

옥운수는 이내 굳게 닫힌 막사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자 저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언경 역시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소식을 기다렸다.

* * *

오시(*午時: 오전 11시 ~ 오후 1시), 누군가 황급히 달려왔다.

“태자전하!”

“어인관에 무슨 소식이라도 있느냐?”

제언경이 물었다.

“예, 태자전하께 아룁니다. 오늘 아침 의사당에서 남진의 폐하와 사 후야께서 회의를 진행하셨다고 합니다. 사 후야께선 별다른 이상도 없이 멀쩡했다고 하고요.”

“뭐?”

제언경의 목소리가 커졌다.

“틀림없이 확실한 소식입니다.”

“그럴 리 없다! 아바마마께서 쏘신 화살에 맞았는데 목숨을 부지하기나 다행이지, 어찌 멀쩡히 움직여 회의까지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지만……, 어인관에서 그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잘못 본 것 아니냐? 사묵함이 확실한 것이야?”

“그렇다고 합니다. 어인관엔 사 후야가 한 분뿐이잖습니까.”

“다른 사 후야가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사씨 집안에 후작이 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다시 제언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알아보라 전할까요?”

“그래, 어서 가거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제언경은 분을 이기지 못해 몹시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내 옥운수도 깜짝 놀라 물었다.

“사묵함이 어찌 멀쩡할 수 있단 겁니까? 설마 남진에서 또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누군가 사묵함으로 변장해 군심을 안정시키고 있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진옥이 어인관에 있는데 굳이 사묵함이 나설 필요가 있겠느냐?”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남진의 강산 절반이 사씨 것인데다 사씨와 남진 황실이 손을 잡았잖습니까. 현재 남진이 북제를 대항할 힘을 가지게 된 것도 분명 사씨의 공이 있을 겁니다.

사묵함이 진옥을 위해 힘을 쓰고 또 깊은 신임을 받고 있으니 사씨 가문 전체가 힘을 합쳐 남진을 지키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묵함이 죽었단 소식이 전해지면 남진 민심이 얼마나 피폐해지겠습니까?

또 진옥과 사묵함이 같이 북제 군영에 쳐들어갔는데 사묵함이 죽는다면, 남진이 사씨를 내치려 했던 과거까지 있으니 내부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권력을 빼앗기 위해 죽인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올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구나!”

“제 추측이 맞다면 사묵함은 진짜 죽었을 겁니다.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어찌 다음날 멀쩡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분명 뛰어난 역용술을 이용해 우리 쪽 사람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제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아바마마께 아뢰어 어찌 처리해야 할지 상의해봐야겠다.”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어서 다녀오십시오. 운설 공주마마께서 우리 막내 숙부를 살려내시면 곧장 말씀 전하겠습니다.”

제언경은 북제 황제의 숙소로 향했다.

* * *

북제 황제의 숙소에 다다르자 한 나이 든 태감이 나와 말했다.

“태자전하, 폐하께서 두통을 호소하시어 태의께서 침을 놓아 드리고 있어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운설 공주마마와 소국구께 온 소식이라도 있으신지요?”

제언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없다. 그런데 폐하께서 두통을 호소하셨다고?”

“그렇습니다. 태자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듯, 폐하께선 하루라도 편히 쉬지 않으시면 늘 두통을 호소하셨잖습니까.”

제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머뭇거렸다.

“큰일은 아니고, 막내 고모과 막내 외숙께 전해 온 소식도 없다. 아바마마께서 여기 오신 뒤 잠시라도 쉬시는 걸 본 적이 없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온 것이고.”

“예, 태의께서 침을 다 놓고 나시면 들어가 보십시오.”

태감이 들어가고, 잠시 후 태의가 나와 제언경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께선 실로 지치셨던 것 같습니다. 노신이 침을 절반도 채 놓기 전에 잠드셨으니, 태자전하께서도 급한 일이 아니면 우선 편히 쉬도록 두십시오.”

“고맙네.”

태의가 떠난 뒤, 제언경은 다시 태감에게 당부를 전했다.

“아바마마를 잘 살펴다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이어 제언경은 막사로 돌아가 한 사람을 불렀다.

“현재 어인관에 있는 사묵함은 변장한 이고, 진짜 사묵함은 아바마마의 화살에 맞아 죽었단 소식을 널리 퍼트려라. 진옥이 남진과 북제가 흥병한 이 틈에 사씨를 제거하려는 계략이라고 말이다. 하룻밤 사이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남진 전역에는 반드시 널리 퍼져야 해.”

제언경의 차가운 웃음 뒤로,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예, 명 받들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어인관.

진옥과 사묵함은 한창 제운설이 단미령에 배치해 둔 10만 병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상의 중이었다.

오전 내내 머리를 맞댄 결과 두 사람은 기본적인 틀을 완성했고, 이젠 만반의 준비를 위해 보충할 거리만 남겨둔 상태였다.

저녁 무렵엔 최의지와 연석도 합류해 회의에 골몰했다.

그런데 그때, 북제에서 퍼트린 소식이 들려오자, 사묵함은 어리둥절해 잠시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연석 역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제언경이 이리도 하찮은 계책을 내놓았다고요? 설마요.”

진옥은 말이 없었고, 최의지의 답이 이어졌다.

“보기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잘만 먹힌다면 상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남진 황실과 사씨는 서로 암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남진의 강산을 바로 잡고자 사씨와 황실은 힘을 합쳐 북제에 대항하고 있지요.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은 힘을 합쳤다고 해도 사실 대부분은 사씨가 든든히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국고가 거덜날 기미를 보인지도 오래고, 남진은 북제처럼 비축해 둔 게 없으니 출병하는 순간 금방 텅텅 비고 말 테지요.”

“그렇지.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소.”

“예, 그렇지만 지금 저희는 폐하와 사 후야께서 함께 북제 군영에 진입하셨다가, 사 후야께서 화살을 대신 맞고 돌아오시어 초지 공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다 압니다. 그러나 이는 외부인들은 모르는 얘기지요. 북제가 벌인 이 판에 남진 백성들이 정말 이 소문을 믿기 시작한다면, 남진에 한바탕 난리가 일수도 있습니다. 그땐 걷잡을 수도 없어지겠지요.”

최의지의 말이 끝나자, 연석이 다리를 탁 내려쳤다.

“이 썩을 제언경! 폐하,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곧 온 세상에 소문이 다 퍼지게 될 텐데요.”

진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선 며칠간 지켜보지.”

“예? 이대로 신경 쓰지 말자는 말씀이십니까?”

“응, 우선 지금은 내버려 두자는 거다.”

“그렇지만……, 만일 정말 남진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지금 시점에선 최악의 수를 두는 것과도 같습니다.”

“목청에게 국내 형세를 안정시키도록 하라 전하면 된다. 혼란스러워질 순 있으나 폭동만 일어나지 않으면 문제없어. 목청이라면 충분히 해낼 거다.”

“그럼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우린 그 틈을 타 제운설의 10만 병마를 상대하는 거지. 남진이 혼란에 휩싸이고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것처럼 보이게 해, 제언경을 한번 우쭐하게 만들어 준 뒤에 바로 무릎 꿇리면 돼.”

“기발하신 생각입니다! 분명 콧대가 높아져 뒤에 어떤 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테지요.”

연석이 손뼉을 치며 웃자 진옥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성 10만 병마를 상대하고 초지의 신분을 알리면 모든 게 맞춰질 거야.”

“우리가 혼란에 빠진 줄 알고 으스대느라 분명 설성의 병마에는 신경도 안 쓸 겁니다. 근데 이를 제운설이 눈치챈다면 곤란해질 텐데요.”

“언신이 중독된 독은 아무나 해독할 수 없는 거라 아무리 제운설이라 해도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거다. 그러니 바깥일엔 신경 쓸 겨를도 없겠지. 그래서 지금 바로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때, 사묵함이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목청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서신은 제가 직접 쓰겠습니다.”

“그래, 사 후작의 친필 서신은 단연 가장 설득력 있을 테니 어서 쓰게.”

사묵함은 서둘러 이목청에게 서신을 써 황성으로 매를 날려 보냈다.

“매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흘은 걸릴 겁니다.”

그러자 최의지가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비슷할 테니 황성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때쯤 서신도 도착할 겁니다. 이 대인의 능력이라면 그때 나서도 늦은 게 아닙니다.”

“재주꾼이 황성을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안심되는군.”

연석의 말에 진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이 도성에 있어 짐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다.”

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자, 일을 길게 끌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설성의 병마를 어떻게 제거하면 좋을지 마저 상의해봅시다.”

사묵함이 이어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 * *

바깥에선 진옥이 사묵함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다른 이를 변장시켰다는 소식이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언신의 막사에서 어두운 낯빛의 제운설이 나왔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옥운수는 황급히 제운설에게 다가갔다.

“운설 공주마마, 저희 막내 숙부는 어떠십니까?”

제운설은 옥운수를 힐끗 보곤 말이 없었다. 옥운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고, 때마침 제언경이 돌아와 다급히 걸어왔다.

“막내 고모, 막내 외숙은 깨어나셨습니까?”

제운설은 답 대신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머물 막사는 마련해뒀어?”

제언경이 멍한 모습으로 바라보자, 제운설이 말을 덧붙였다.

“쉬고 싶으니 어서 마련해다오.”

제언경은 서둘러 하인에게 분부했다.

“어서 막내 고모의 막사를 마련해 드리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