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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4화 (964/978)

964화. 위기에 처한 묵함 (2)

진옥은 너무 오래 서 있던 터라 다리가 굳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조심하십시오, 폐하.” 

최의지가 얼른 부축하자, 진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사묵함은 편안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침상에 기대앉아 있는 초지는 안색에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거기다 모든 기혈을 다 소진해버린 듯, 손에는 핏줄이 한껏 돋아나 있었다.

이내 진옥이 초지에게 다가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좀 어떤가?”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넌?”

“팔을 들 수도 없는데다 손을 제대로 쓸 수도 없어, 앞으론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폐하께 미리 절 버리지 말라 말씀드렸던 거지요.”

“걱정 마라.”

진옥이 손을 내밀자, 초지가 고개를 저었다.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불러 절 들어달라고만 해주십시오.”

진옥이 최의지에게 말했다.

“의지, 초지를 방으로 옮겨줘라. 도성을 떠날 때 방화에게 주려 챙겨온 약이 있는데, 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소천자더러 초지에게 쓰라고 전하고.”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최의지가 초지를 부축해 방을 빠져나갔다.

“사 후야, 일어나시지요.”

이내 연석은 사묵함에게 다가가 그를 살짝 흔들자, 진옥이 연석을 막았다.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우선 옷을 벗겨 상처가 어떤지 보자.”

연석은 사묵함을 조심히 뒤집어 등 쪽의 옷을 찢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등은 빛이 날 정도의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진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매술은 본래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신비로운 힘이라 알려졌지. 그 이유로 누구나 꿈에서까지 매족의 술법을 얻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거고. 남진의 황실 은위 종사가 북제 옥가와 제운설에게 이용당했던 것도, 매족의 극비 매술을 얻어내려 남진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마저 아랑곳하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매족 사람은 오히려 그 출신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 초지의 말대로 집이 있어도 돌아가질 못하니,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의 삶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묵함의 옷을 챙겨 입힌 후, 똑바로 뉘어 이불도 잘 덮어주었다. 

진옥은 초지가 앉아 있던 침상 머리맡에 기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바닥이 찹니다. 옥체 조심하셔야지요, 폐하.” 

연석의 말에, 진옥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연석, 네 입에서까지 옥체 조심하란 말을 듣는 날이 오는군.”

연석도 웃으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남진 강산의 기둥인 황제폐하이시니 당연히 보중하셔야지요.”

진옥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문지르며 다시 머리를 기댔다.

“사 후작을 업고 돌아오는데 정말 이대로 죽게 될까 봐 두려웠다. 짐을 위해 몸을 날렸다고 해도, 이대로 가버렸다면 한평생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야.”

연석도 힘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피범벅이 돼서 돌아온 모습을 보는데, 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사 후야께서 돌아가시는 날엔 저도 후야를 따라 갈 겁니다.”

진옥이 고개를 들고 연석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방화, 진강, 노후야를 비롯해 그 어떤 누구에게도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우리와 함께 자라온 벗이자 형님이신 묵함 세자만을 떠올렸지.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데다 최 어르신께서 겨우 치료해주신 뒤로 편안히 쉬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남진 강산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지. 임안성 역병과 양국의 대전으로 지금껏 변경을 지켜온 이도 모두 사 후작이었어.

그러니 짐의 목숨을 깎아서라도 반드시 사 후작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껏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고 한 번도 마음 편히 쉬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가면 안 되잖느냐.”

연석은 눈시울을 붉히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옥은 또다시 눈을 감고 말했다.

“연석, 군자란 자고로 고독한 자라 여겨졌지. 이 황위와 남진 강산의 무게도 결코 좋은 벗들에 비할 순 없다. 곁에 가까운 가족과 벗 하나 없다면, 국토를 만 리 넓히고 천하를 통일한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어쨌거나 외톨이일 뿐인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 모두 잘 살아서 짐의 곁을 지켜다오.”

연석은 진옥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자 다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 

연석이 지원군을 데리고 변경에 온 뒤 그들은 평산곡에서 북제 군영을 공격하고 제언경이 후퇴한 어인관까지 점령했다. 물론 다치고 죽은 병사도 있었지만, 장수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다.

연석도 오늘에서야 비로소 죽음이 손에 닿을 정도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늘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친우들이지만, 그중 진옥은 이 나라의 황제가 되고 진강은 영친왕부 소왕의 자리에 올랐다. 나머지 친우들도 다들 조정에 들어 다 함께 남진 강산을 지탱하고 있었다.

물론 그간 즐거웠던 순간도, 썩 유쾌하지 않은 순간도 있었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 한 적은 없었다. 연석도 이제야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다.

* * *

잠시 후, 최의지가 초지를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그는 진옥과 연석이 각각 침상과 의자에 기대 잠든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그들을 깨우려 했지만, 이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즉각 소천자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어왔다.

“최 시랑, 폐하는 어떠십니까?”

최의지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두 분 모두 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시네. 아직 바닥이 차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반 시진 후에 방으로 들어가 쉬라고 깨워주게나.”

“예, 최 시랑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초지의 약은 다 달여졌고?”

“예, 다 달여졌습니다. 곧 초지 공자님께 가져다드릴 수 있을 겁니다.”

최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가 이런 만큼 어인관에 그 어떤 착오도 있어선 안 되니 여길 잘 지켜주게. 난 성을 돌아보고 오겠네.”

“알겠습니다.”

소천자가 고개를 숙였고, 최의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 * *

반 시진 후, 소천자가 들어가 진옥과 연석을 깨웠다.

그러자 진옥은 일어나 사묵함을 안쪽으로 옮긴 뒤 침상에 함께 누워버렸다.

소천자는 깜짝 놀랐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진옥의 안색을 보곤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연석도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있던 간이 침상에 드러눕고는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소천자가 할 수 없이 다시 방을 나가는데, 마침 진의와 왕귀가 찾아왔다.

“폐하는 좀 어떠신가? 사 후야께서도 무사하시고?”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선 모두 무사하시니, 염려 마십시오.”

“폐하께 아뢰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네.”

왕귀가 말했다.

“그게……, 급한 일입니까?”

“병사(兵事) 관련 일이네.”

“예, 그럼 폐하를 깨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천자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고, 잠시 후 진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게.”

왕귀와 진의는 공손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진옥이 물었다.

“조금 전 최 시랑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 설성에서 제운설이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고 합니다. 근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단미령에 진을 쳐 둔 뒤로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최 시랑이 우선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분부를 내렸습니다.”

진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병사가 얼마나 되지?”

“10만입니다.”

진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운설이 어인관에서 그 멀리 떨어진 곳을 벗어나지 않을 리는 없다. 분명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일 테지. 북제의 그 어느 누구도 언신을 살리지 못할 테니 제운설이 북제로 간 게 틀림없다. 우선 신경 쓸 것 없고, 구체적인 소식이 전해지면 그때 다시 결정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갔다.

“폐하는 사 후야, 연 소후야, 이 대인까지 다 함께 자라셨지만 확실히 다르신 것 같습니다.”

왕귀의 감탄에 진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젯밤 그 큰일이 벌어졌을 때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어 어찌나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지던지…….”

이내 왕귀가 진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다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사촌 형제지만 강이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영남에서 살면서 그 짧아진 식견으론 절대 두 분 능력에 비할 수는 없지요. 영남에서 나와도 우물 안 개구리일 뿐입니다.”

진의가 말했다.

“가진 능력만큼 일을 해낸다는 말이 있듯 진의 공자님만의 장점이 있는 법이지요. 그간 행군과 전투에선 그다지 힘을 쓰진 못했다만, 연병과 후방 안착에 있어선 아주 뛰어나셨습니다. 어젯밤 일은 우리가 힘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뿐이니 낙담하지 말고 넓게 보세요.”

“나도 내 능력을 잘 아니 위로는 괜찮습니다. 이제 유겸왕부도 도성에 온전히 자리를 잡게 됐으니 아버지의 숙원을 이루게 된 셈이지요. 비록 폐하께 큰 힘이 되어 드릴 순 없지만, 남진 도성을 위해 힘이 닿는 곳까지 노력하고 우리 유겸왕부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나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왕귀는 진의를 다시 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낮 무렵, 사묵함이 서서히 깨어났다.

그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자신의 상처를 만져봤지만,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묵함의 곁엔 여전히 진옥과 연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 사 후작, 일어났는가?”

마침 진옥도 깨어났다.

“폐하? 제가 어찌……, 폐하께선……, 이게 어찌 된 겁니까?”

사묵함은 여전히 등에 손을 얹은 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불편한 데는 없고?”

사묵함이 천천히 고개를 젓자, 진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럼 됐어.”

연석도 간이 침상을 내려와 기쁨에 찬 얼굴로 사묵함에게 급히 다가왔다.

“사 후야! 어찌 이리 빨리 깨어나셨습니까?”

“이게 다…….”

사묵함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뭘 그리 어리둥절하십니까? 후야 때문에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요. 어젯밤 폐하께서 피범벅이 된 후야를 업고 오셨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워…….”

“누가 날 살린 건가?”

사묵함도 등에 화살을 맞아 진옥의 등에 업혀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 듯했다.

“초지가 살렸어.”

그리고 진옥은 초지가 그를 어떻게 살리게 된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사묵함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매술의 힘이 그리 대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초지는 좀 어떻습니까?”

“몸에 남아있던 모든 술력(术力)을 다 써버려, 이젠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어졌네. 무사하니 걱정할 거 없어.”

사묵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따 가봐야겠습니다.”

진옥도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짐의 추측으론 북제 황제가 화살을 쏜 것 같아. 후작이 날 막아서지 않았다면 화살은 짐의 몸에 꽂혔겠지.”

그러자 사묵함이 답했다.

“지금껏 북제를 장악해온 데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옥가조차 북제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만한 힘을 가진 자인 게 분명합니다. 마음이 놓이질 않아 폐하를 뒤따라갔던 게 천만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래 봤자 후작이 맞은 화살이 짐에게 꽂히는 게 전부였겠지. 후작이 짐 대신 고생해준 거야.”

사묵함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오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런 말이 어딨습니까. 남진을 위해 폐하께서 안위도 고려치 않으신 채 위험한 곳으로 가셨는데 신하도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한 몸 바쳐야지요.”

진옥은 가만히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전부 허울 좋은 말들일 뿐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어. 초지에게나 가보지.”

세 사람은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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