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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3화 (963/978)

963화. 위기에 처한 묵함 (1)

“근데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

“북제와 연합해 남진을 공격해서 북제가 어인관을 탈환할 수 있도록 하려는데 오라버니 생각은 어떠세요?”

사운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뜻대로 하거라.”

“오라버니는 설성의 성주잖아요. 북제를 도우려면 반드시 설성의 병마를 움직여야 하고요. 아무리 예전 기억을 다 잃었다곤 하지만, 남진의 사씨와 충용후부의 사방화와도 깊은 사이이셨는데 정말 괜찮아요?”

사운란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너도 말했듯 난 그저 설성의 성주일 뿐이다. 어머니께서도 임종 전 내게 설성을 넘겨주시며 설성을 잘 지키라고만 하셨을 뿐, 다른 말씀은 없었다.”

제운설이 말했다.

“그럼 오라버니 말은…….”

“이 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네 뜻대로 하라는 말이다.”

“그럼 북제와 연합하는 데에 오라버니는 동참하지 않겠단 거예요? 설성의 병력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되는 거고요? 모든 걸……, 전부 내 뜻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에요?”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제운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오라버니는 앞으로 뭘 할 생각이에요?”

“폐관하고 무술을 연마할 거다.”

“지한술을 통달하고 난 뒤에는요?”

“천계산의 불을 끄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한술을 통달하고 난 뒤엔 이 힘으로 불을 끄려 시도해 봐야지.”

“그럼 지금 날 위해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무공을 연마하는 거예요?”

사운란은 이내 옅은 미소를 띠며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넌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가족이자 동생이잖아. 그런 네가 천계산의 불을 끄고 싶다고 하니 그렇게 하도록 도와줘야지.”

제운설은 멍하니 사운란을 바라보다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다니.”

사운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제운설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라버니는 마음 편히 폐관하고 있어요. 난 내일 군사를 이끌고 나가 북제와 연합해 어인관을 협공할 거예요.”

사운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진옥에게 실패의 쓴맛을 보여주고 말 거예요. 그뿐 아니라 북제도 부활전을 펼쳐 어인관에서 남진을 몰아내고 남진 땅까지 쳐들어갈 거예요.”

사운란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이를 믿는다.”

제운설도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었다.

* * *

이튿날 아침, 사운란은 성벽에서 군사를 이끌고 설성을 빠져나가는 제운설을 배웅했다.

제운설은 흰옷을 입은 사운란을 살짝 돌아보았다. 그는 꼭 설성에 1년 내내 갑작스레 흩날리는 새하얀 눈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사운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설성과 북제가 연합해 남진을 공격하려는 데도 꼼짝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진 듯했다. 이는 제운설이 그토록 바랐던 오라버니의 모습이었다.

이내 제운설이 손을 흔들자 사운란도 손을 흔들었다.

제운설의 대열이 떠나고 모습을 감추자, 사운란은 그제야 성벽을 내려가 성주부를 폐관했다. 그러자 제운설의 측근이 곧장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공주마마, 공자님께서 폐관하셨습니다.”

제운설은 소식을 듣곤 완전히 마음 놓고 웃으며 어인관으로 향했다.

* * *

100리쯤 갔을까, 누군가 다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공주마마!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정신없이 오는 게냐?”

그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공주마마께 아룁니다. 어젯밤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에 남진이 갑작스레 출병해 옥하파를 공격하고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북제 군영은 지세가 평탄하고 10리 안에 초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있었지만, 바람에 불길이 번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 폐하께서 즉시 대피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혼비백산한 틈을 타 누군가 북제 대영으로 침입해 태자전하를 해하려 했고 소국구께서 발견하시어 곧장 태자전하를 구하셨지만, 소국구께선…….”

“소국구께선 어쨌단 말이냐? 어서 말하거라!”

“태자전하를 구하시려던 소국구께선 암살자의 독에 중독돼 지금껏 깨어나질 못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데려오신 태의도 어떤 독에 중독되신지 알아내질 못하고 계신답니다. 북제에선 이미 소국구께 가망이 없다는 얘기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언신에게 독을 쓰다니, 확실한 것이냐?”

“확실합니다. 벌써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어젯밤 북제 군영에 침입해 독을 쓴 자는 남진의 폐하와 사 후야란 말이 있습니다.”

제운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두 사람이라고? 잡았느냐?”

“붙잡진 못한 것 같습니다. 남진의 사 후야는 화살에 한 차례 맞았으나 폐하는 무사해 그대로 도망쳐버렸습니다. 태자전하께선 강 소왕야의 습격을 겪으신 뒤로 호위를 더 늘려두셨지만, 북제 사병으로 위장해 침입한 탓에 알아채지 못했답니다. 사고 직후 소국구께서 중독돼 쓰러지자 태자전하께서도 당황하여 잡지도 못했다고 하십니다.”

제운설은 크게 화를 냈다.

“언신은 왜 그 쓸모도 없는 제언경을 구하려고 한 거란 말이냐! 더는 해독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잖느냐!”

의독술에 있어선 남진과 북제 사람들 모두 북제 소국구 언신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독에 걸려버렸으니 누가 그를 해독해줄 수 있겠는가?

제운설은 어인관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강 네놈이 설성의 내기에서 지더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어인관으로 왔나 했더니 전부 계획이 있었어!”

결국 그의 뜻대로 악랄한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다.

“공주마마, 북제에 침입해 태자전하와 소국구를 암살하려던 사람은 진강이 아닌 남진의 황제 진옥입니다.”

제운설이 두 사람의 이름을 헷갈렸다고 착각했는지 정정하자, 제운설은 격노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멍청한 자식! 내가 진강과 진옥도 구분 못 하는 줄 아느냐!”

그는 졸지에 채찍을 얻어맞고는 감히 반박도 하지 못했다.

“진강과 진옥 두 형제가 북제 군영이 이리도 쉽게 쳐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려주는 것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냐!”

제운설의 분노에,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제운설은 그렇게 어인관을 한참 바라보다 한 사람에게 분부를 내렸다.

“병마를 네게 넘겨줄 테니 전방 100리 단미령(断尾岭)에 진을 치거라. 내 명령이 없는 이상 절대 출병해선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그가 물었다.

“북제로 가서 소국구를 구하시려는 겁니까?”

제운설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니고선 그를 구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다.”

이내 그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리 병마를 넘겨주시고 진을 치라 분부하시면 어인관으로 출병…….”

“출병은 미룰 수밖에 없지! 언신이 죽게 놔둘 수도 없고 북제도 분명 출병할 생각이 없을 거다.”

그는 즉각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십시오, 공주마마. 반드시 10만 병마를 무사히 지켜내겠습니다.”

제운설은 고개를 끄덕이곤 시중드는 이에게 분부했다.

“어인관을 돌아 옥하파로 향할 것이니 속히 준비하거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잠시 후, 제운설은 몇 사람을 데리고 길을 돌아 옥하파로 향했다. 

제운설이 떠나고, 부하는 명령을 따라 100리 떨어진 단미령에 진을 쳤다. 

한 시진 후, 제운설은 속히 언신을 살려달라는 제언경의 서신을 받았고 제운설은 하루만 더 버티라는 답신을 보냈다. 어인관을 돌아 옥하파로 향하는 길은 산세가 험준해 빨라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이었다. 

* * *

한편, 진옥은 거의 피투성이가 된 사묵함을 데리고 어인관으로 돌아왔다. 

군중의 장수들은 깜짝 놀랐고 연석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사묵함은 등 뒤에 화살이 박힌 채로 정신을 잃고 깨어나질 못했다.

진옥은 곧 사묵함을 조심히 내려놓고 즉각 명령을 내렸다.

“어서 초지를 불러오라!”

“초지, 그래! 어서 초지를 불러오시오!”

연석이 소리치자 최의지가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초지가 왔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사 후야를 살려내라. 네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짐이 다 들어주마.”

초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묵함에게로 걸어왔다. 

사묵함은 등 한가운데에 화살을 맞아 엎드린 채로 침상에 눕혀져 있었다. 

초지는 화살이 꽂힌 위치와 상태를 살펴보고는 안색을 굳어졌다.

“폐하께서도 보셨듯 등 한가운데에 화살이 꽂힌 채로 겨우 숨이 붙어 있는 터라 반드시 살릴 수 있을 거란 보장은 못 하겠습니다.”

“절대 죽어선 안 된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려내야 한다. 네게 사 후작을 살릴 방법이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다.”

초지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제가 매족인이란 걸 아시니 그리 확신하시는 거겠지요? 하지만 매족인도 만능은 아닌지라 누구에게나 기사회생술이 있는 건 아닙니다.”

“네게 타고난 재주나 혈맥이 없었다면 어찌 제운설 모친인 란 장로에게 키워졌겠느냐? 뭘 원하느냐? 짐의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들어주겠노라.”

“폐하 말씀이 맞습니다. 란비마마는 제 고모님이십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초지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살리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나……. 제 혈맥을 다 소진해야 할 겁니다.”

“그럼 더 이상 술법을 쓸 수 없을 거란 말이냐?”

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을 겁니다.”

“뭘 원하느냐? 어서 말해 보거라.”

“과거 폐하 곁에서 남진 강산을 바로 잡고 매족 술법과 의술에 의존해서라도 더 이상 강 소왕야께서 폐하를 어찌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약조했습니다. 이젠 폐하께선 강 소왕야와 화해하시어 함께 남진 강산을 지켜내고 계시니 제 약속도 이루어진 셈이지요.

폐하께서도 남진 국고에서 제가 원하던 걸 내주셨으니 그만 곁을 떠나도 되지만, 고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줄곧 폐하 곁에 남아있었습니다.

매족인으로 태어나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가 없어 종일 떠돌기만 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지금껏 충분히 해왔으니 그만할 때도 됐지요. 다른 건 바랄 게 없습니다. 강산이 안정을 되찾은 뒤에 성씨를 하사해 주시어 한평생 남진에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십시오.”

“정말 그거면 되겠느냐?”

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게 나라의 성을 내주고 의형제도 맺어주겠노라. 앞으로 짐의 강산에는 네 몫도 있게 될 것이다.”

초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 온 힘을 다해 사 후야를 살려내겠습니다.”

진옥은 눈을 감고 초지의 어깨를 토닥이곤 밖으로 향했다.

“연석 소후야, 최의지 시랑께서도 나가주시지요. 지금부터 누구도 절 방해해선 안 됩니다.”

이어진 초지의 말에 연석과 최의지도 자리를 비워줬다.

* * *

이내 초지는 사묵함을 살리는 데 사력을 다했다.

새벽부터 정오가 되고, 다시 저녁이 되어 날이 깊을 때까지도 초지는 방에서 나오질 않았고, 방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진옥은 문 앞에 서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기다리기만 했다. 연석, 최의지, 진의, 왕귀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묵함이 남진 강산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모두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황제를 대신해 사씨와 충용후부의 유일한 적통인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사씨와 충용후부의 충심은 천지가 본받을 만했다. 

그리고 한밤중,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가 됐을 때, 방에서 다 쉬어버린 초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들어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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