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화. 혼서
사묵함은 끝내 옥하파로 가겠다는 진옥의 뜻을 꺾지 못했다.
두 사람은 결국 장시간에 걸쳐 치밀한 계획과 대책을 세웠고, 만반의 준비를 걸쳐 계획을 짰지만 사묵함은 그래도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에 사묵함은 진옥이 분장을 하고 어인관을 떠난 뒤, 연석과 최의지를 불러 두 사람에게 진옥과의 계획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역시 연석과 최의지는 크게 놀랐고, 사묵함은 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몰래 폐하의 뒤를 쫓아 옥하파 대영으로 갈 테니 자네들은 계획대로 출병해 산에 불을 지르도록 실행해주기만 하면 되네.”
두 사람은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누이랑 매제는 옥하파 후방의 낙하산에 침입해 북제 대군의 앞뒤로 들어오는 협공을 완성할 거야. 산골짜기로 진입해 낙하산에 도착하려면 빨라도 보름은 걸릴 거고.
이 보름 안에 북제 황제와 설성은 협상을 이루기만 하면 즉시 출병할 테니 반드시 시간을 벌어야만 해. 그 사이 제언경을 중독시켜 북제와 설성의 연합 출병을 지연시키려는 거지. 이것만이 북제와 어인관, 미래 남진 강산의 승패까지 결정짓게 될 거야.”
두 사람은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무나 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폐하께선 어찌 꼭 직접 가겠다고 하신 겁니까?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최의지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만전을 기하기 위해 가시는 거지. 우리가 가는 것보다 더 승산이 있으니까. 자네들은 계획대로 진행해 주시게, 난 이만 폐하의 뒤를 따라가 보겠네. 의지, 필요하면 자네가 직접 결단을 내려도 돼.”
“왜 최 시랑은 되고 전 안 되는 겁니까?”
연석이 곧장 불만을 드러냈다.
“연석 자네는 성격이 너무 불같아서 안 돼. 그간 좀 나아지긴 했다만 아직 의지에 비하면 멀었지.”
연석은 사묵함 말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큰일을 앞둔 상황이라 결국 성질을 죽이고 입술만 삐죽였다.
“멋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폐하를 안전히 모셔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디 살아서 돌아오셔야 합니다. 우리 이 형제들은 술 한 잔 기울이기만 기다리고 있단 걸 기억하십시오.”
사묵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알겠다.”
그렇게 사묵함도 분장을 마친 후 어인관을 빠져나갔다.
* * *
진옥과 사묵함 모두 홀로 사람들 시선을 피해 살며시 떠났고, 두 사람이 떠난 뒤에도 어인관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이 치밀한 작전은 진옥, 사묵함, 연석, 최의지만 아는 사실이었고 진의, 왕귀, 장수들조차 몰랐다.
관 내의 백성들은 며칠간 갈팡질팡하며 마음을 놓지 못하는 듯했으나 남진의 군대가 어인관을 점령한 뒤로 평범한 하루하루가 이어지자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둘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또 백성들은 남진의 소왕 진강과 소왕비 사방화가 어인관에 왔다는 걸 듣고 숨죽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가 천하에 널리 퍼지긴 했지만 백성들이 실제로 두 사람을 볼 기회나 있었겠는가? 백성들은 어마어마한 명성을 지닌 두 사람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300년간 남진과 북제 사이에 작은 마찰은 있었지만 큰 분쟁은 없었다. 특히 북제의 황후는 남진 충용후부의 아가씨였기에 변경의 무역도 왕성하게 이루어졌었다.
양국의 세가 대족을 제외한 백성들은 서로 통혼할 정도로 관계가 가까웠고 변경의 백성들에게조차 양국의 분단은 그리 깊게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일이 이렇게까지 됐지만, 남진 군대가 북제 백성들을 해하지 않으니 금세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음악을 들을 여유도 생겼고 찻집과 주점도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관 내는 그렇게 사방화, 진강이 어인관에 왔다는 소식으로 시끌시끌했으며 장군부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제운설의 명령으로 어인관을 지켜보던 이 역시, 밤이 될 때까지도 관 내에 별다른 점이 보이질 않자 제운설에게 그대로 이 소식을 전했다.
* * *
「공주마마, 어인관 내는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진강과 사방화는 장군부로 들어간 뒤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인관과 설성은 거리가 멀지 않아서, 매를 날린 지 한 시진 반 만에 제운설에게 서신이 전달됐다.
제운설이 이 서신을 받았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문 깊은 밤이었다.
제운설은 등을 밝혀 이 서신을 읽고 미간을 찌푸리며 창가에 서 있었다.
‘예상이 틀렸나? 진강과 사방화가 아무런 후수도 없이 이리 쉽게 패배를 인정한다고?’
제운설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진강이 누구던가. 그는 절대 이렇게 패배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 설성의 병마를 빼앗기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다니, 설마 따로 기병이 있는 건가? 그 기병은 어디에 있지? 남진에 병마가 더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직접 기른 사병?
생각의 끝에 닿자, 제운설은 진강에게 따로 기른 사병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진강과 진옥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다퉈온 형제로, 그간 진옥이 노렸던 건 막북 군영의 30만 대군이었지만 진강은 막북 군영엔 관심도 두지 않고 그 대군을 순순히 진옥에게 내주었다.
이는 곧 당연히 따로 길러 둔 사병이 있다는 것이었다. 빼앗은 병사가 어찌 자신이 직접 기른 병사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북제와 설성이 연합해 출병한다고 해도 진강이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건 그의 사병이 설성의 10만 용병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럼 북제도 남진에 대항해 어인관을 어찌어찌 탈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은 아니었다.
제운설은 일순 안색이 어두워졌다.
“언신은 아직 소식이 없느냐?”
시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예, 공주마마께 아룁니다. 낮에 왔던 서신을 제외하곤 지금껏 북제에서 온 서신은 없었습니다.”
제운설이 콧방귀를 뀌었다.
“두려운가 보지?”
시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운설에게 물었다.
“공주마마, 소국구께서 뭘 두려워하신다는 것인지요?”
“나와 혼인하기 두려운 거지. 보아하니 아직도 사방화를 잊지 못했나보군.”
시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이 생겨 좀 늦어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내 제운설이 벌컥 화를 냈다.
“설성과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나라가 걸린 큰 문젠데, 또 그럴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느냐!”
“누가 봐도 남진의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이제 생사를 함께 할 사이이십니다. 이는 소국구가 아닌 그 누구라도 단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공주마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진강의 사병이 어인관까지 오도록 손 놓고 기다리란 것이냐? 북제와 설성이 언제부터 그리 자신만만했던 거지? 전술이란 기발한 것이야말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고, 아주 사소한 착오로도 순식간에 그 시기를 바꿔버릴 수 있다. 진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제운설은 화가 나, 있는 힘껏 창문을 닫아버렸다.
쾅!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려는데,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매는 절묘한 때에 닫히는 창문에 부딪혀 창밖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주마마, 서신이 왔습니다!”
시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제운설도 창문에 묻은 피를 보고 안색이 급변해 곧장 밖으로 향했다.
시녀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창밖엔 소리 없이 쓰러진 새가 보였고 다리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언신이 제운설에게 서신을 보내던 그 매였다.
제운설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자 매는 이미 머리를 다쳐 죽어 있었다.
순간 제운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주마마, 매가……, 죽었습니다.”
시녀의 목소리도 떨려왔다.
제운설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로 죽은 매를 조심히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으면 죽은 거지, 뭘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겨우 이 정도로 죽어버리다니, 쓸모없는 것.”
시녀는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창틀에 금이 갈 정도로 창문을 세게 닫았는데 거기에 부딪히고도 살아남을 새가 어디 있겠는가?
제운설은 매의 다리에 묶인 서신을 풀고 죽은 매를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지금껏 오래도록 서신을 전해준 공이 있으니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거라.”
시녀는 곧장 매를 건네받았다.
제운설은 다시 방으로 가 서신을 펼쳐보았다. 서신은 바로 혼서였다.
제운설은 한참 그 혼서를 보다, 천천히 접어 품속에 넣고 밖으로 외쳤다.
“여봐라!”
“예, 공주마마!”
“오라버니가 폐관하고 있는지 한번 확인하고 오거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잠시 후, 하인이 돌아와 아뢰었다.
“공주마마께 아룁니다. 성주께선 출관하셨습니다.”
“그럼 여기로 좀 모셔오거라. 북제와 연합해 출병하는 일로 상의할 것이 있다고 말씀을 전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 * *
반 시진 후, 사운란이 제운설의 거처로 찾아왔다.
제운설은 깨진 창문 너머로 사운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설성에 돌아왔을 때보다 한기가 더더욱 짙어진 듯 보였다.
저것이 바로 어머니 란비가 물려준 지한술인가? 물론 지한술은 분심독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은 있지만, 평생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야 할 것이었다.
이제 사운란의 술법이 한층 더해질 때마다 한기도 더 짙어질 터였다.
곧 제운설은 문을 열고 나가 사운란을 맞이했다.
“오라버니!”
사운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누그러뜨렸다.
“오라버니, 지금 지한술을 어디까지 연마한 거예요?”
제운설이 사운란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8단계까지 오른 것 같구나.”
사운란의 대답에, 제운설은 깜짝 놀랐다.
“그 단기간에 벌써 8단계까지 연마한 거예요? 그럼 한 단계만 더 오르면 완전히 통달하는 거네요?”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더구나.”
“어떻게 이리 빨리 연마한 거예요?”
“어머니께서 내게 물려주신 힘과 관련이 있는 듯해. 너도 알다시피 어머니께서 임종하실 때 남아있던 모든 공력과 술법을 내게 넘겨주셨잖느냐. 그 힘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니 더 빨리 가능했던 거겠지.”
“맞아요. 어머니께서 한평생 기르신 공력과 술법의 힘이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되죠. 젊고 창창하셨을 때 천계산의 최연소 장로가 되셨다는 것만 봐도 타고나신 재주가 어마어마하시고 똑똑하셨단 걸 알 수 있잖아요.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타고난 재주를 물려받은 걸 거예요.”
사운란은 미소를 지으려는 듯 입꼬리가 움직였지만, 이내 그의 한기로 인해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