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0화 (960/978)

960화. 성동격서(聲東擊西)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출발해요. 설성에서 나가 어인관으로 갈 것처럼 시선을 끌면 제운설도 더 이상 우리 뒤를 쫓진 못할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상의를 끝마치자 시화와 시묵이 식사를 내왔고 식사 후,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명했다.

잠시 후, 시화, 시묵, 진 영감은 준비를 마쳤고 일행은 성주부를 나왔다.

그때, 설성 사야가 다급히 달려와 진강과 사방화에게 물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설성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진강이 담담히 말했다.

“내기에 졌으니 약속대로 설성을 떠나야지. 왜? 우리가 가는 게 아쉽나?”

사야가 연신 공수를 올렸다.

“어찌 이리 농담도 잘하십니까.”

“며칠간 잘 대해줘서 정말 고마웠소. 운란 형님과 운설 공주에게도 대신 인사 좀 전해주시오.”

“예, 배웅해드리겠습니다.”

“괜찮소.”

진강이 사방화를 데리고 마차에 오르자, 대열은 성문으로 향했다.

* * *

설성은 먹구름이 가득 낀 듯 공기마저 무거웠다. 그 시끌벅적하고 번화하던 거리도 설성의 병갑들만 삭막하게 늘어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독이 퍼져버린 오늘날 설성의 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진강과 사방화 대열은 거침없이 성을 빠져나갔고, 제운설과 사운란은 모습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강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설성 사야는 성문 앞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러다 진강과 사방화의 떠나자, 급히 진 영감을 붙잡고 물었다.

“매족에 천하의 의독술이 기록된 의독 고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나 백골이 된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당시 자운 도장께서 그 고서를 물려받았다고 했어요.

자운 도장께서 매족의 조훈에 따라 다른 종족에겐 넘겨주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소왕야께선 자운 도장의 유일한 제자였으니 어쩌면 자운 도장과의 관계에서 그 고적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고적을 찾는다면 소왕비마마를 살릴 수도 있을 테니 잘 찾아보라 전해주세요.”

진 영감이 눈썹을 들썩이자, 사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매족인으로서 나도 소왕비마마가 저대로 죽길 바라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진 영감은 사야와 인사를 나눈 뒤, 진강과 사방화의 마차를 따라갔다.

* * *

제운설은 진강과 사방화가 설성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두 사람을 붙들어 놓고 싶었지만, 현재 설성의 상황으론 어찌할 방법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지켜보라고만 지시를 내렸다.

예감으론 진강과 사방화가 어인관으로 가 진옥과 합류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있었다. 남진, 북제에 설성까지 끼어든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북제와 설성이 연합하면 진옥이 있는 어인관은 이중으로 협공을 당할 거란 걸 진강도 꿰뚫어 봤을 거란 직감이 왔지만, 그들이 어디로 갈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화, 진강은 절대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며 현 상황을 그대로 좌시하지도 않을 것이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곧 제운설이 시중드는 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뭘 하고 계시느냐?”

“공자님께선 어제 돌아오신 뒤로 줄곧 폐관하고 계십니다.”

제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진강과 사방화가 떠났는데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깨끗이 잊은 것 같구나.”

“공자님께서 여전히 이전의 기억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왕경미가 폐관한 오라버니를 쳐들어왔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덥석 병마를 빌려줬단 말에 의심은 하고 있었지. 왕경미를 다치게 하긴 했지만,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공주마마,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과거 기억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자님과 수십일 째 마주치는데도 여전히 소인의 이름조차 외우질 못하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갔다간 공자님께서 칼로 절 베실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어요.”

제운설이 웃으며 말했다.

“사방화를 만나기 전까진 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만 오라버니가 대하던 태도를 보니 이젠 좀 안심할 수 있겠더구나. 사방화가 뭐길래 우리 오라버니가 이렇게 한평생 마음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지.”

“전부 공자님을 위해서 그러신 거란 거 압니다.”

제운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젠 우리 둘뿐이잖느냐.”

“언신 공자님도 계시잖아요.”

제운설이 차갑게 웃었다.

“언신? 난 그 사람 안중에도, 마음속에도 없다.”

“남진과 북제가 대립 중이니 언신 공자님께서도 더 이상 사방화를 마음에 담아두진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미 진강에게 시집도 갔고 아이까지 가진 데다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언신 공자님께서도 지금껏 현혹되셨던 것뿐입니다. 나중에라도 깨달으실 겁니다.”

시녀의 위로에도 제운설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제운설이 입을 열었다.

“굳게 닫힌 사랑의 봄은 서글프도록 늦어지는데, 불을 지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 말씀으론 아버지께선 저대로 내 운명을 지으셨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아.”

시녀는 깜짝 놀랐다.

“공주마마, 자운 도장께서……, 공주마마 운명을 그리 지으셨다고요?”

“그럼 또 누가 있겠니? 북제 선황폐하께서 그리 하셨겠어? 북제가 내게 공주란 신분을 내준 탓에 내가 이리 망가진 거야. 매족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면 이 천하에 남진과 북제가 있기나 했을까?

한낱 땅강아지와 개미들일 뿐인데 내 매족의 혈통을 어찌 그리 쉽게 끊을 수 있겠어? 매족 혈맥의 뿌리를 씻어내기 위해 운명을 바꾸어 진강과 사방화에게 기대를 건 아버지가 멍청했던 거지. 혈통이 없으면 술법도 없는 건데 그럼 우리가 한낱 그 개미들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주마마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난 매족이 영원히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던 거야. 매술이야말로 매족의 미랜데 매술 없이 어찌 미래를 논할까. 아버지가 틀렸다는 것과 아버지가 해내지 못한 걸 내가 해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다. 우리의 이 일맥이 왕실 혈맥을 도려내 매족 대통이 되고 매족을 전승하게 될 거야.”

시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오 무렵, 진강과 사방화가 설성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언신은 서둘러 제운설에게 해독약을 보냈고 동시에 북제와 설성의 연맹 문서를 보내왔다. 

제운설은 받은 해독약으로 서둘러 중독된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그리곤 약을 보내온 이에게 말했다. 

“겨우 이 문서 하나로는 설성의 수천 년간 내려온 규율을 깨고 북제와 동맹을 맺기엔 부족하다.”

“공주마마께선 뭘 원하십니까? 곧장 공자님께 아뢰겠습니다.”

“혼서를 보내라 전하거라.”

“혼서 말입니까?”

“어릴 적부터 정혼한 사이인데 아무도 말을 꺼내질 않는구나. 혹시 잊어버린 거냐고 물어보거라. 이미 혼인할 나이도 지났는데 이 혼약을 이행할 생각은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이행할 생각이 없다면 증표를 돌려주고 혼약을 깨든, 이행할 생각이 있다면 혼서를 보내오라 전해라.”

“예, 지금 바로 공자님께 전하겠습니다.”

제운설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 * *

한편, 설성을 떠난 진강과 사방화는 관로를 따라 어인관 방향으로 향했다. 

반나절이 지나고 대략 100리 정도 왔을까, 숲이 보이자 진강은 휴식을 취하도록 명했다.

그때, 제운설의 명을 받아 파견된 이는 계속 진강과 사방화의 대열을 뒤쫓고 있었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함부로 긴장을 놓을 수 없어 대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열은 반나절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재촉해 어인관으로 향했다. 

일주일 후, 대열은 어인관에 다다랐다.

곧 사방화, 진강이 어인관으로 들어갔음을 아뢰자, 제운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강과 사방화가 정말 어인관으로 갔단 말이냐? 확실해?”

곁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어릴 적부터 곁에 두셨던 암위잖습니까. 몰래 추적하는 솜씨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사람이니 결코 착오는 없을 겁니다.”

제운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지금 이런 상황에 진강이 어떻게 어인관으로 갈 수 있단 거지? 설마 내가 당연히 어인관으로 가진 않을 거라 추측한 것을 또 역이용해 거기로 간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북제와 설성의 병력이 어인관을 공격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설마 또 다른 기병이 있는 거야?”

* * *

제운설은 진강의 의중을 알 수 없어 계속 어인관 상황을 살피라 명했고, 어인관 내에서도 일찍이 이 소식을 접한 진옥이 황제라는 존엄한 신분도 내려두고 진강과 사방화를 직접 맞으러 나갔다.

그러나 진강과 사방화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진옥은 단번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진옥이 어떻게 사방화를 모르고, 친형제처럼 자란 사촌 진강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역용술도 그를 속일 순 없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시화와 시묵도 분장을 했지만, 그중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소등자만은 진짜였다.

진옥은 분명 뭔가 숨겨진 게 있단 걸 알고 일단 모두를 안으로 들였다. 

장군부로 들어와 부문과 방문을 걸어 닫자 진강과 사방화, 시화, 시묵으로 분장한 이들과 진짜 소등자가 일제히 진옥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다.”

또 다른 사람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진옥에게 건넸다.

“소왕야께서 남기신 서신입니다. 폐하께서 서신을 보시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진옥은 서신을 펼쳐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참 간도 크구나! 그것도 혼자 가면 될 것이지, 그 험난한 산골짜기에 방화까지 데리고 갔단 말이냐?”

아무도 답이 없었다.

진옥은 역용술을 쓴 네 사람을 제외하고, 한껏 얼굴을 구긴 채 진옥의 말에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리는 소등자를 쳐다보았다.

“소등자, 넌 어찌 따라가지 않은 것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서둘러 길을 재촉해 설성 100리 밖까지 다다랐지만 두 분의 마차를 따라잡진 못했습니다. 그 잠깐 사이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몰래 대열을 벗어나셨습니다. 역용술을 쓰셨다는 건 단번에 알아챘지만, 두 분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해 할 수 없이 대열을 따라 폐하께 오게 됐습니다.”

진옥은 소등자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물건을 보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소등자는 진옥의 시선에 곧장 입을 열었다.

“이 물건은 항상 차고 다니고 있습니다.”

“갖다 버려라! 악귀를 물리치기는 무슨, 불길한 물건이 따로 없구나.”

소등자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잘 생각해 보니 오는 길에 여러 차례 그들을 놓칠 뻔한 순간이 없었다면 분명 이렇게 버려지지 않고 진강과 사방화가 떠나기 직전 합류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등자는 서둘러 허리춤에서 물건을 빼냈다.

“지금 당장 갖다 버리겠습니다.”

진옥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소등자는 바깥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밖에서 누군가 아뢰었다.

“폐하, 사 후야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소천자가 사묵함을 방으로 들이자, 그는 네 사람을 힐끗 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진옥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하……. 사 후작, 그냥 밖에선 편히 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은가.”

“아무리 밖이라도 폐하는 폐하이시지 않습니까. 군신 사이에 존재하는 급이 있는데 존엄한 폐하께 감히 예를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지요.”

진옥은 속이 답답해져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예를 지킨다면 얼마나 좋았으려나.”

“매제랑 누이는 안 온 듯한데 어딜 간 겁니까?”

진옥이 서신을 건네주며 말했다.

“직접 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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