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화. 뜻이 다른 두 사람 (2)
“이젠 날 전부 꿰뚫어 봤다고 생각하십니까?”
제운설이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엔 거의 꿰뚫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 앉고 나니 더 확신이 서는데? 완전하다고는 할 순 없지만 거의 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공주마마가 진정한 북제 공주는 아니란 걸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제운설, 사운란은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친남매라는 걸 알게 됐네요.”
제운설이 차갑게 웃었다.
“거의 다 꿰뚫렸다고 겁날 건 없습니다. 어쨌든 설성의 병력은 북제에게로 넘어갈 테니까요. 소왕야께서 설성에 아무리 세력을 심어 두셨다고 해도 북제와 설성의 연합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난 설성의 병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 온 겁니다. 설성 병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내 눈엔 차지도 않습니다.”
진강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지만, 그 어조는 매우 강했다.
“설성의 병력이 눈에 차지 않는다니, 재주가 대단하신 분인 건 알지만 대체 얼마나 뛰어나시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비꼬는 제운설을 보고, 진강이 나른히 눈썹을 까딱였다.
“뭐, 공주마마께서 꼭 믿으실 필요는 없지만 설성의 병력 없이도 남진은 북제 황성을 함락했고 성 아래까지 진군했습니다. 시간문제였을 뿐이지요.”
제운설은 화가 나 탁자를 내리쳤다.
“안 믿습니다! 세상에 뭐 소왕야 말고 다른 사람은 그만한 재주도 없는 줄 아십니까? 북제에도 쓸만한 사람은 차고 넘칩니다!”
“그래, 뭐 그 문제로 입씨름할 필요는 없는 것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눈여겨보시면 되겠군요.”
“그런 말씀은 이 설성을 떠나고 난 뒤에나 하십시오. 설성이 멋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 천하에 천계산 빼고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고 보는데. 술 잘 마셨습니다, 공주마마. 밤이 깊었으니 부디 몸조심하시고요.”
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제운설이 소리쳤다.
“잠깐!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서도 물어보시려던 거 아니십니까? 왜 그냥 가시는 거죠?”
진강이 담담히 말했다.
“매족 란 장로께선 분명 매족의 지한술을 익혔을 테지만 신분을 숨기려 일부러 요술까지 익혔겠지요. 요술로 지한술의 기운을 숨기고, 운란 형님을 살리기 위해 지한술을 썼던 거고.
당시 운란 형님은 당연히 공주마마께서 란 장로께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거나 남진에 손을 쓰는 걸 반대했겠지만, 공주마마는 결국 뒤에서 몰래 계략을 짜 조가를 죽였을 겁니다.
그 후 의안을 찾으러 청운관으로 갔다가 진짜 신분을 알게 됐고 의안을 죽이려 날렸던 장풍에 왕 장군께서 돌아가신 거였지.
분심이 발작한 운란 형님을 살리고자 란비마마께선 목숨을 잃으셨고, 공주마마 어머님의 뜻이었는지, 공주마마의 뜻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란 형님은 기억을 잃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고 설성의 성주가 된 것이겠지요? 란비마마의 임종으로 공주마마와 운란 형님은 함께 천계산에 갔었잖습니까.”
이내 진강을 바라보는 제운설의 눈빛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어쩜 이리 추측을 잘하시는지, 박수를 드리고 싶네요.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로 모든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분이 남아있다는 건 정말 커다란 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주마마의 어머님은 매족의 장로이자 설성의 성주였을 수도 있지만, 세상은 그저 북제의 란비마마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평생 그 신분을 잘 숨겨왔던 것이지요.
그 란비마마께서 돌아가시기 전 운란 형님에게 설성 성주 자리를 물려 주고 기억을 지워도 공주마마의 친 오라버니니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을 겁니다. 거기다 앞으로 운란 형님은 친동생인 공주마마 말씀만 들을 테니 공주마마가 설성의 성주가 되는 것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잖습니까.”
“당연하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우리 남매는 서로밖에 없고 이 세상에 가장 가까운 혈연입니다. 사방화 생각만 하던 때보단 이 친동생의 말을 듣는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더 이상 얘기해도 아무 의미 없을 테니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주마마께 경고 하나만 드리지요. 천명과 천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앞으로 알아서 잘하시길 바랍니다.”
제운설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왕야께서나 잘하십시오! 아이 하나 때문에 저승 문 앞에 서 계신 분이 남한테 설교할 시간은 있나 봅니다? 천명이 어떻고 천도가 어떻다고요? 정말 천명과 천도가 있다면 자운 도장도 바꿨으니 나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방화와 왕의안에게만 매족의 비술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게도 매족의 피가 흐르고 천계산에서 그 비술을 얻었습니다. 천도 교훈 따위는 매족이 영원히 살아남도록 하려 만든 말일뿐입니다.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란 말이 있었는데 내가 깜빡했군. 부디 공주마마의 숙원이 이뤄지길, 매족이 영원히 살아남길 바랍니다. 당시 사부님의 소원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니 하늘에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진강은 웃으며 청설각 계단을 내려갔다.
제운설은 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닥에 잔을 던져 깨트려버렸다.
* * *
사방화는 진강이 언제 돌아온 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진강은 사방화 곁에 누워 지질 구조가 그려진 듯한 종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창가로도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방화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저 지금까지 잔 거예요?”
“밤새 아주 푹 자던데?”
사방화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왜 이리 깊게 잔 거지? 어제 제운설은 만나셨어요? 언제 돌아왔어요?”
진강은 미소를 지으며 사방화의 손을 잡아내렸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란 말이 있잖소. 얼마 안 돼 돌아왔는데 당신이 하도 깊게 자길래 깨우지 않았소. 방화, 안 그래도 머리가 나빠져 큰일인데 때리면 더 안 좋아질 거야. 그만하시오.”
사방화가 새초롬하게 진강을 흘겨보았다.
“잠을 많이 자서 머리가 멍한 것뿐이거든요.”
“맞아, 당신 배 속에 아기 요괴가 너무 둔해서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야.”
사방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말씀 안 하시기로 하셨으면서 또!”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아, 잠시 깜빡했소. 일어나시오. 밥 먹고 이제 설성을 떠납시다.”
장난을 치던 사방화도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젯밤 결국 의안은 안 온 건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운설이랑은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진강은 지도를 내려두고, 사방화에게 옷을 입혀주며 어젯밤 제운설과 나눴던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진정한 배후자가 제운설이었다니, 저도 제운설을 의심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조가진에서 맥을 짚어봤을 때 정말 심각했던 상태라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까지 약을 먹고 우릴 끌어들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거였거든요. 그 틈을 타 제가 언신을 의심하게 만들었군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 남진을 그 난리로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진강이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도성에 없어 틈을 내보인 것뿐이지.”
사방화가 곧 진강이 보고 있던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뭘 보고 계셨던 거예요?”
“북제의 지형도.”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의안은 설성의 흥망에 아무런 관심도 없나 봐요. 우리도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이번엔 언신에게 제대로 져버렸어요. 운란 오라버니도 기억을 잃어 친동생인 제운설 말만 들을 테니 제운설 뜻대로 북제와 연합해 설성의 병마를 북제에 넘겨줄 게 뻔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제운설은 북제 옥가랑 손을 잡아 왔으니 우리가 설성을 위기에서 구한다고 해도 남진을 도울 것 같진 않소. 하지만 설성의 병력도 딱히 눈에 차진 않으니 없어도 상관없소.”
“당신이 설성에 심어 둔 세력들은요? 정말 빈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미 들통나버린 세력들은 데려가고 나머지는 계속 설성에 남겨둘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어찌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소? 적어도 제운설, 사운란과 설성의 현재 상황에 대해선 잘 알게 됐잖소. 게다가 제운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언신이 북제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도 똑똑히 파악했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요. 근데 제운설이 우리가 순순히 떠나도록 둘까요?”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으니 언신에게 해독약을 얻어 성 전체가 물들기 전에 이 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오. 만약 설성도 뒷전에 두고 우릴 가로막는다면 그땐 우리도 당신의 혈맥이고 뭐고 설성을 봐주지 않을 것이오.”
“네, 똑똑한 제운설이니 우릴 어떻게 하진 못하겠네요. 설성의 위기를 바로잡는 게 우선일 테니까요.”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우릴 눈앞에 두고도 어찌하질 못하니 어젯밤에 화가 나 잔을 깨트렸던 거지. 지금은 제운설의 지반인 설성에 있으니 지금껏 제운설이 저질렀던 일은 우선 설성을 빠져나간 뒤에 결판을 내도록 하면 되오.”
사방화도 제운설이 저지른 일을 떠올리자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 사방화가 절명 장치에 떨어져 진강과 정효양을 구하지 못했다면 진강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해야만 했다.
“어인관으로 갈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숭령(崇岭)의 산골짜기를 넘어 낙하산(落霞山)으로 갈 것이오.”
“낙하산이요? 왜 거기로 가시려는 거예요?”
“진옥이 어인관을 함락해 북제 군에 막심한 사상자를 만들고 옥하파까지 후퇴하게 만들긴 했지만, 남진도 잇따라 작전을 펼친 터라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당분간은 전진하긴 무리일 것이오. 어인관에서 머물고 있을 거야.
하지만 북제 황제도 이미 황성을 나온 이상 남진에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북제의 모든 병갑을 동원해 어인관을 탈환하려 할 테지. 특히 제운설도 당연히 북제를 도울 테고. 그럼 설성의 지리적 위치로 봤을 때 설성이 출병한다면 어인관은 북제와 설성 양쪽의 협공 아래 놓이는 것이오.”
“그러네요. 어인관으로 가면 안 되겠어요. 옥하파 북면 30리에 낙하산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북제의 경지죠. 어인관과 옥하파를 돌아 옥하파 후방으로 진입해 제언경이 옥하파에 박아놓은 대영을 습격할 생각이에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설성에서 낙하산까지는 100리나 떨어져 있어요. 당신 말대로 깊은 산으로 내려가 숭령의 골짜기를 넘어 낙하산을 우회해 옥하파 후방에서 북제 군영을 기습하는 건 가능하긴 하겠지만, 대거로 이동하는 건 힘들 거예요.
남진의 사병이 그 먼 길을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어찌해서 낙하산까지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작전을 펼칠 순 없을 거예요. 소수로 움직인다면 병력이 힘없이 약해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고요.”
“내가 가진 병마 10만을 데리고 갈 것이오.”
사방화가 물었다.
“그 병마 10만도 변경에 가 있는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깊은 산골짜기를 넘는 것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북제에 진입하면 반드시 은밀히 전략을 세워 단병으로 싸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10만 병마도 북제 황제의 대군을 어찌하긴 힘들 거예요. 소식이 새어나가 우리가 포위되는 순간 끝이에요.”
“그럴 일 없소.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면 소리소문없이 들키지 않고 북제로 진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