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8화. 뜻이 다른 두 사람 (1)
반 시진 후, 사방화가 깊이 잠들었을 때, 밖에서 사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왕야! 운설 공주마마께서 청설각(晴雪阁)에 술상을 마련하여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강은 조용히 방에서 나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청암, 소왕비마마를 잘 지키고 있거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청암은 곧장 검을 뽑아 들고 문 앞을 지켰다.
진강은 곧 사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소왕비는 지쳐 잠들었소. 어차피 술도 못 마시니 혼자 가겠소.”
“예, 이쪽으로 드시지요.”
사야가 길을 안내하고, 진강은 그 뒤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운란 형님이 설성의 성주이지요?”
순간 사야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진강의 말 한마디에 사야는 걸음을 잠시 멈추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야는 천천히 남몰래 진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만으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고, 질문은 무심코 던졌다는 듯 아주 여유로웠다.
사야는 이제야 그 유명한 영친왕부 소왕 진강의 위력을 절감한 것이다.
진강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서늘한 위압감이 있었다. 사운란에게 느껴지던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야는 진강의 의중도 읽지 못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곧 사야가 아주 공손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설성은 지금껏 성주의 정체를 비밀로 해왔습니다. 운란 공자님께서 성주가 맞는지 아닌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진강은 빙그레 웃었다.
“설성엔 규칙이 참 많군.”
“그 또한 설성이 존재하는 근본이라 할 수 있지요.”
“부디 설성이 이 세상에 자리를 잘 잡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하늘의 뜻을 거슬러 운명을 바꿨으니 이 설성의 운명도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말이지.”
사야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 진강이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듯 길을 안내하라고 손짓했다.
사야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청설각으로 향하는 이 짧은 길, 고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사야는 이제야 자운 도장이 왜 진강을 유일한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매족 성녀 일맥 후계자의 혈맥을 가지고 태어난 사방화가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진강을 사랑한 것인지 확실히 절감했다.
본래 날 때부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적인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강이었다. 거기다 진강은 그 매력과 더불어 순식간에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극락을 오가게 하는 압도적인 위압감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 * *
청설각에 다다르니, 붉은 옷을 입고 높은 누각에 앉아 있는 제운설이 보였다. 그 누각의 사방으론 비단이 하늘하늘,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진강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제운설은 흩날리는 비단 사이로 막 술 주전자를 집어 들고 있었다. 손을 드니, 제운설의 옷소매가 함께 흔들렸고 그 모습은 마치 신선에 노니는 선녀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묘했다.
사야는 다시 멈춰선 진강을 몰래 올려다보았다.
보기에 진강은 저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홀로 멀리에 있는 미인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눈빛은 더없이 서늘하고 청명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후, 진강이 천천히 청설각 계단을 올라갔다.
제운설은 즉각 진강을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그 사랑하는 부인도 두고 홀로 이리 와주시다니 참 기쁘네요.”
진강은 나른히 자리에 앉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굳게 닫힌 사랑의 봄은 서글프도록 늦어지는데, 불을 지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북제 소국구에게 쓴 구절이었습니까?”
순간 술을 따르던 제운설의 손이 멈칫했다. 곧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진강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내가 썼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냥 추측해본 겁니다.”
제운설이 웃으며 말했다.
“참 추측도 잘하시네요. 근데 소왕야, 어찌 이리 대담하십니까? 내가 오늘 이 청설각에 수를 써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뒀으리라곤 생각지 않으시나요? 내가 있는 곳에 이리 홀로 오시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공주마마께서 날 죽이려는 덴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일 텐데 난 도저히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난 북제의 공주입니다. 남진이 어인관을 함락했으니 강 소왕야를 죽일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강 소왕야는 남진 폐하께서 가장 믿고 가까이하시는 형제 아니십니까.
또 강 소왕야는 폐하만큼이나 백성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으시지요? 그런 강 소왕야 한 분만 죽여도 남진 강산 절반이 날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죽일 이유야 넘치지 않습니까? 군심도, 민심도 단번에 흩트려 남진의 패배를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데, 이보다 더 충분한 이유가 있을까요?”
“뭐 이유야 그럴듯한데, 공주마마께서 날 힘들게 죽이지 않아도 난 어차피 목숨 앞에 무릎을 꿇을 평범한 사람입니다. 일찍 죽나, 늦게 죽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근데 공주마마, 한 가지 간과하고 계신 듯한데 날 죽이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마마의 목숨까지 잃을 수 있어요.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걸 걸고 전쟁에 뛰어들진 않을 텐데, 공주마마는 아주 똑똑하신 분 아닙니까.”
제운설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소왕야.”
진강이 담담하게 웃었다.
“뭐 다들 그리 말하더군요.”
“이리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자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지금껏 운설 공주마마께서 설성과 북제, 남진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제운설은 갑작스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 아실만한 분이 뭐 하러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요?”
“생각만으로 알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직접 물어서 확실히 하는 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이잖습니까.”
“말하기 싫다면요?”
“현재 천하의 형세와 설성의 국세가 이 지경까지 처했으니 말해주지 않아도 십중팔구 알아낼 수는 있습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그래요? 큰 의미도 없다고 하시면서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냥 물어본 겁니다. 말씀하시기 싫다면 됐습니다. 살면서 반드시 모든 걸 확실히 알아야만 하는 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상관없다는 진강의 태도에, 제운설을 그를 바라보다 술 한잔을 따라주었다.
진강은 술잔을 들어 향기를 한번 맡고, 한입에 시원하게 털어 넣었다.
“좋은 술이군.”
“내가 술에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데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일찍 죽든, 늦게 죽든 어차피 죽는 거라곤 했지만 소왕야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시면 아이까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순진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100가지 독에도 끄떡없다면 믿겠습니까? 사부님은 내게 의술을 가르쳐 주시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독에도 끄떡없는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운설이 눈썹을 들썩였다.
“자운 도장이요?”
“그럼 누구겠습니까?”
제운설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강 소왕야께는 참으로 잘 대해주셨군요.”
“돌아가신 지도 한참 됐는데 사부님께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습니까?”
“어머니께 무엇 하나 잘해주신 게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선 임종 전까지도 그분을 은애하셨어요. 대체 어디가 잘났다고 그렇게 은애하셨던 걸까요? 세상천지에 친아들을 그렇게 이용하는 친아버지가 어딨습니까? 사랑하던 여인까지 버리고 한평생 매족을 구하려 매달렸지만, 그것마저 실패했잖아요. 이러니 내가 화가 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비아냥대는 제운설을 보고, 진강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셨다면 마마께선 지금 북제 공주 신분으로 살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란비마마께선 당연히 불만을 가지셨을 법도 하지만, 운설 공주마마의 불만은 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설마……. 란비마마와 북제 선황폐하의 따님이 아니십니까?”
제운설은 순간 말문이 막혀 화를 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함부로 추측하지 마세요.”
진강이 다시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란비마마께선 북제 황궁으로 시집가신 뒤 얼마 되지 않아 운설 공주마마를 낳으셨지요. 공주마마께서 북제 선황폐하의 친 따님인지 아닌지는 뭐 관심도 없으니 화낼 필요 없습니다.”
제운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는 데 참 재주가 있으시네요. 사방화는 대체 소왕야 어디를 보고 혼인한 거랍니까?”
“방화가 날 좋게 봐주는 걸로 충분하니 공주마마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운설이 콧방귀를 뀌었다.
“안목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 오라버니를 시작으로 언신, 남진의 폐하, 이목청까지도 눈에 차지 않는다더니 하필 고른 게 강 소왕야라니.”
진강이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눈에 차지 않은 게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인연을 정해둔 것이지요.”
“정말 사방화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믿는 겁니까? 난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왜? 공주마마는 인연을 믿지 않습니까?”
“네, 안 믿습니다.”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운명도 안 믿겠군.”
“맞습니다.”
“운명도 안 믿는다는 분이 어찌 매족이 하늘의 뜻대로 사라지게 두지 않고 뒤에서 수많은 계략을 꾸미며 이 세상에 남아있도록 용을 쓴 거지?”
순간 제운설의 눈빛이 번쩍, 하고 빛났다.
“지금 또 나를 함부로 착각하시는 겁니까?”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추측한 것뿐입니다. 그 이유 말곤 도저히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으니까. 대체 무엇이 공주마마로 하여금 옥가와 손을 잡고 남진을 발칵 뒤집게 만들었는지 참 궁금하군요.
왜 방화의 매술을 뺏으려 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지, 옥조천이 남진을 떠나며 시선을 끌었을 때 왜 공주마마께선 그 틈을 타 수를 쓴 건지. 왜 이여벽을 이용해 심혈을 재촉하는 독을 쓰고, 포각루에는 살수를 매복한 건지.
목청과 방화가 형양성으로 가던 길에 영혼까지 가두고, 조가의 죽음을 비롯해 나랑 효양이 절명 장치 아래로 추락했을 때 형양성 관아에서 도망친 사야까지 모든 게 다 공주마마께서 짜둔 계획 아니었습니까? 이 모든 계략을 이토록 절묘하고 완벽하게 짤 만한 배후자는 오직 공주마마뿐인데.”
제운설은 말없이 진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 모든 계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세상에 바람이 새 나가지 않는 벽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의심을 받아 그 뒤 계략에 영향을 미칠까 싶어 언신으로 분장한 이에게 조가진의 향운각에다 공주마마를 옮겨두라고까지 했잖습니까. 거기다 언신이 제조한 환각약까지 먹어 방화가 언신을 의심하게끔 만들어 일거에 목적을 이루려 했고.”
제운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중 뭐 형양 정씨부 절명 장치는 나랑 방화를 단번에 사지에 몰아넣을 가장 큰 계략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 우리 두 사람이 죽는다고 매족 혈맥이 끊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건 바로 공주마마도 운란 형님과 같이 매족 혈맥을 타고난 란 장로와 자운 도장의 딸이기 때문이겠지요.
자운 도장은 왕실 후계자는 아니라도 매족 왕실 출신이기에 그 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매족 왕실과 성녀 일맥의 후계자를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하고 매족의 대통을 빼앗아 천하에 흩어져 있던 매족들을 모으고 계속 매족을 이어나갈 계획이었겠지요. 운설 공주마마, 내 추측이 맞습니까?”
제운설은 침착한 표정을 하고 진강을 바라보았다.
“남진 폐하께서도 생각지 못한 걸 소왕야께선 모두 다 꿰뚫고 계시는군요. 소왕야께서 남진 황위에 오르셨다면 지금 형세보단 한참은 나았을 텐데.”
부인하지 않는 제운설을 보고, 진강도 담담히 말했다.
“황제는 나라를 책임져야 하지만, 나 같은 일개 사내는 오직 한 여인만 책임지기에도 벅찹니다. 내겐 세상을 책임질 능력 같은 것도 없지만,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천하의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 있거든요.”
“그 높고 원대한 뜻을 가진 대단한 기재가 사랑 하나 때문에 그 능력도 펼치질 못한다니 참으로 안타깝군요. 그런 소왕야께서 돌아가신다면 더 아까울 일이겠고요.”
진강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내 원대한 포부까지 운운하다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안다는 겁니까?”
제운설이 차갑게 웃었다.
“여인에게 빠져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른들 거기서 뭘 하신다는 겁니까?”
“살아가는 데는 각자 생각이 다르니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에게 달렸겠지요. 공주마마도 내가 아니니 내 삶의 행복을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높은 자리는 천하와 같아서 바라면 얻고, 얻으면 잃기 마련입니다. 수만 가지 방법 중 내가 가장 원하는 방법을 택한 것뿐인데 아쉬울 게 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