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6화. 낯선 사람
거처로 돌아온 뒤, 사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강, 오늘 안에 운란 오라버니와 의안이 올까요?”
“장담할 순 없소.”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운란 오라버니를 못 본 지 정말 오래됐어요. 잘 지내려나 모르겠네요.”
“매족 왕실 후계자도 아닐뿐더러, 란비가 분심을 풀어줬으니 앞으론 고통 없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것이오.”
“하지만 어머니 목숨과 맞바꾼 것이니 기쁘기만 할 순 없을 거예요.”
“그런 것까진 신경 쓰지 마시오. 끝내 오지 않으면 진옥과 합류하면 되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다림 속에 시간은 흐르고, 저녁이 찾아왔다.
이 무렵, 사야에게 누군가 소식을 전했다.
“사야, 운설 공주마마와 운란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사야는 몹시 기뻐하며 황급히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실 이 위기에 명성이 높거나 실력을 갖춘 사람이 온다면, 그 누구든 구세주로 여겨질 만했다.
사방화도 사운란이 왔다는 소식에 곧장 달려 나가려 했지만, 진강은 일단 사방화를 데리고 성주부 전망대로 향했다. 그곳은 성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니, 과연 설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설성은 지금껏 남진과 북제 양국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수용해주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이 아주 대담해서, 성이 위기에 처했음에도 사야가 있어 심각한 공포와 혼란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은 설성이 반드시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듯, 설성의 함락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도, 걱정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방화는 성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곤 성문 입구로 눈길을 돌렸다.
성주부에서 성문까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고 마침 황급히 달려가는 사야의 뒷모습이 열렸다.
그리고 성문이 열리고, 익숙한 두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옥청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바로 사운란과 제운설이었다.
사방화는 단번에 그들을 알아봤지만, 거리가 멀어 두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질 않았다. 다만 사야가 둘에게 깍듯이 예를 차리는 모습만 보였다.
두 사람은 곧 사야와 대화하며, 성주부가 아닌 위중한 환자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잠시 후, 사운란과 제운설이 사야에게 무어라 말하자, 사야는 잔뜩 풀죽은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을 성주부로 인도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진강이 운을 뗐다.
“저들에게도 방법이 없나보군. 하루만 더 기다려 보고 의안이 오지 않으면 설성을 떠납시다.”
왕의안이 오지 않는다면, 사방화와 진강도 더는 이 설성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강의 손을 붙잡았다.
“진강, 성문 입구는 아니라도 부랑 앞에선 오라버니를 맞이해도 괜찮죠?”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전망대를 내려왔다.
* * *
설성 성주부 입구에 다다르자, 사야를 따라오는 사운란과 제운설이 보였다.
“운란 오라버니!”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놓고 사운란에게로 다가갔다.
사운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방화를 보곤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피하더니, 손에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멈추시오.”
평생 들어본 적도 없던 차디찬 목소리였다.
사방화는 사운란의 반응에 깜짝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운란은 마치 꼭 한기에 휩싸인 사람 같았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냉혈한이 된듯했다. 특히 사방화를 보는 그 눈은 낯설 정도로 차가워서 순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그렇게 서늘한 눈빛으로 검을 겨눈 채 가까이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낯선 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사방화는 넋을 잃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운란 오라버니.”
사운란은 차가운 눈빛으로 사방화를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사방화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진강은 그렇게 따뜻한 온도로 놀란 사방화의 마음을 달래고, 서늘한 한기를 밀어냈다.
곧 진강이 사운란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운란 형님,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겁니까?”
사운란은 차디찬 눈빛으로 사야를 돌아보았다.
“성주부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소?”
사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께……, 아룁니다. 이분은 남진 영친왕부의 진강 소왕야십니다. 이분은 소왕비마마시고요. 공자님께서도 아시는 분들이신데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사운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운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제운설이 앞으로 나와 사운란의 검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면 됐어요. 오라버니는 지금껏 사씨 미량에서 지내왔고, 여기 이 소왕비마마는 사씨 충용후부의 아가씨예요. 오라버니가 사씨 미량에서 사셨으니 소왕비마마와는 친척 관계지요. 현재는 영친왕부 진강 소왕야와 혼인하셨어요.
오라버니, 어머니께서 임종 전 우리 남매에게 꼭 잘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 그것만 기억해요. 나머진 모두 성가신 일들이니 기억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말아요.”
사운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운설은 사야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쉴 수 있게 자리 좀 마련해줘요.”
사야는 사운란을 힐끗 보곤 길을 안내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이내 사운란은 진강과 사방화를 한번 보고 사야를 따라 성주부로 들었다.
사운란은 뒷모습마저도 여전히 옅은 한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공기에 주변의 바람마저도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사방화는 도저히 제운설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운란이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정녕 진강도, 사방화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그때, 진강이 눈썹을 까딱이며 입술을 뗐다.
“운설 공주마마, 남진에서 봤을 때와 참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천계산 불이 사람을 키우기라도 한 건가?”
“소왕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짐승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는 불바다인 천계산에서 어찌 그게 가능하겠어요? 소왕비마마야말로 몸 관리를 잘하신 듯한데요? 회임한 지도 벌써 석 달은 넘었겠어요.”
제운설은 진강을 위아래로 살피고는 사방화를 보며 웃었다.
곧 사방화도 제운설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운란이 서늘한 한기에 휩싸여 있다면, 제운설은 마치 뜨거운 불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입은 붉은 치맛자락까지 흡사 저녁놀 같은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렇지요, 그러니 앞으로 잘 살펴주세요.”
이어진 진강의 말에, 제운설이 웃으며 눈썹을 들썩였다.
“내가 어찌 소왕비마마를 살펴드린다는 겁니까?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농담하는 거 아닌데. 똑똑하신 공주마마께선 당연히 내 말뜻을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만. 한 달 전, 남진에서 뭘 했습니까? 밝혀진 건 없지만 세상에 바람이 새지 않는 벽 따위는 없습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단 말이지요.”
제운설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소왕야, 실력이 아주 뛰어나시단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말솜씨까지 이리도 엄청나실 줄은 몰랐네요.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어찌 계속 여기 계시는 겁니까? 설성은 소왕야의 지반이 아니란 건 아셔야지요.”
“누가 설성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알고 싶을 뿐이지, 설성이 누구의 지반이든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공주마마께서도 밤새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신이 없는 듯하니 어서 가서 쉬시지요. 오늘 밤은 달빛이 아주 좋을 겁니다. 공주마마만 괜찮다면 달빛 아래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은데.”
순간 제운설의 눈빛이 바뀌었다.
“예? 지금 부인을 곁에 두고 외간 여인에게 술을 권하는 겁니까?”
“방화도 함께 갈 겁니다.”
이내 제운설은 대답 대신, 사방화에게 물었다.
“소왕비마마, 어찌 한마디 말씀도 없으세요? 오라버니 때문에 놀랐어요?”
사방화도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란 오라버니는 어쩌다 저렇게 된 겁니까?”
“그거야 간단하죠. 어머니께서 필생 술법과 목숨을 걸고 오라버니 분심을 풀었으니까요. 안 그럼 지금쯤 벌써 저세상에 도착해 있겠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오라버니의 모든 기억도 다 사라져버린 겁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몰라서 내가 다 알려줘야 했어요. 앞으론 친동생인 날 제외하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날 빼곤 육촌까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무리하게 다가가지 말아요. 오라버니가 무정하게 손을 써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라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는데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되잖아요?”
사방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리고 제운설은 진강에게 말했다.
“잠깐 쉬다 나와서 소왕야와 술 한 잔 기울이도록 하지요.”
제운설의 뒷모습은 마치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듯했다. 제운설 주위로 성주부 초목까지도 들끓는 불을 보듯 뜨거운 공기에 휩싸였다.
사방화는 계속 멍하니 생각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사운란을 만나면 몹시 반갑겠구나, 막연히 기뻐하고만 있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만났다.
사운란은 이제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나? 전생의 기억도 사라졌나? 그 눈빛은 전생도, 이 세상에서도 볼 수 없던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괴로워하는 사방화에게 따스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사방화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진강을 올려다보았다.
“괴로워하지 마시오. 그래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 다행이잖아.”
진강은 그렇게 사방화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 * *
방으로 들어와, 사방화가 먼저 운을 뗐다.
“그래도 저렇게 변해버린 오라버니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요.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된 걸까요? 동은사에서 까지만 해도 제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갑자기 저렇게 변해버리다니.”
사방화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를 가만히 안아주며 따뜻하게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렇게 한참 위로를 전하던 진강이 조용히 입술을 뗐다.
“아마 운란 형님과 제운설 둘 중 하나가 분명 설성의 성주일 것이오.”
사방화는 깜짝 놀라 진강의 품을 나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야가 둘에게 저리 깍듯이 대하는 것만 봐도 범상치 않은 신분이란 게 보이네. 무려 북제의 소국구인 그 존귀한 언신에게도, 고귀한 소왕비인 당신에게도, 내게도 사야는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진 않았잖소?”
사방화도 사야가 두 사람에게 대하던 태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누가 성주일 것 같아요? 제운설?”
“왜 제운설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운란 오라버니는 기억도 잃어버렸고 어릴 적부터 사씨 미량에서 자라 설성과는 달리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잖아요. 아무리 란비가 오라버니를 구해줬다고 할지라도 지금 저 상태로 설성의 성주가 되기엔 무리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볼 순 없소. 운란 형님은 사부님과 란비의 아들이지만, 제운설은 란비와 북제 황제의 딸이오. 신분으로 따지자면 둘 중 누가 더 설성과 가깝겠소? 수천 년 된 고성도 틀림없이 혈맥을 따질 것이오.”
“그럼 운란 오라버니일 거란 말씀이세요?”
“당신이 아까 제대로 못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성주부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냐고 물었던 그 말투에 엄연한 주인의 느낌이 났소.”
“근데……. 그럼 뭔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응? 뭐가?”
“설성에서 병마 1만을 빌려준 덕에 당신은 제언경에게 중상을 입혔잖아요. 그리고 그때 초지가 란비가 운란 오라버니를 살리고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럼 그때 운란 오라버니 기억은 이미 전부 지워졌다는 건데 우릴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병마를 빌려줬다는 거예요? 사야도 성주가 떠날 때 우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래, 자세히 한번 알아봐야겠군.”
“당신은 설성에 왔던 그날 밤 누굴 만나셨던 거예요? 왕경미 고모님, 옥계언 고모부님?”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성에 배치해 둔 암위 수령을 만났소. 두 분은 뵙지 못했고.”
“두 분께선 아직 설성에 계세요?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당장 모셔오겠소.”
“음, 운란 오라버니와 제운설도 있으니 성주부로 모셔오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괜찮아. 운란 형님은 그렇다 쳐도 제운설은 이미 다 알 것이오.”
이내 진강은 청암에게 명령을 내렸다.
“청암! 가서 고모님과 고모부님을 모셔오거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소왕야!”